제879화
“이, 일격?”
보르고스가 목이 떨어져 나간 발록을 보며 피 묻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 괴물을 일검에 베어버릴 줄이야····’
불길을 휘감은 악마의 무력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최상급 무구 뇌성의 망치를 새끼손가락으로 으깨버리고, 작은 불씨 하나로 회색 망치 길드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괴물을 일검에 죽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검신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아·’
라온이 초월에 올랐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초입을 넘어서 안정화 단계에 올랐을 줄은 몰랐다· 무시무시한 재능· 대륙의 역사를 뒤집어엎는 성장력이었다·
“그렇지!”
마르타가 검을 쥔 손으로 본인의 손바닥을 쳤다·
“저 정도는 해줘야 광풍대주지!”
그녀는 시원시원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벼락까지 사용하는 건가?”
버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불꽃, 서리, 바람, 땅에 이어서 벼락이라····”
그는 다음에 사용할 힘이 궁금하다며 눈썹을 내렸다·
“오늘 라온 대존잘·”
루난은 화상을 입은 드워프와 장인들을 보호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라온의 등에서 보라색 눈동자를 떼지 않았다·
“허····”
셰릴이 마족 다섯을 한 번에 베어버린 후 놀라움이 담긴 탄성을 흘렸다·
‘저 검술, 이번에 가주님께 배운 거잖아·’
글렌이 라온에게 천뢰검을 전수하겠다면서 신나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고작 하룻밤 배운 검술을 실전에서· 그것도 초월에 오른 괴물에게 사용해서 목을 베어버리다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이제 끝난 건가요?”
도리안이 헥헥 소리를 내며 검을 내렸다·
“그럼 빨리 돌아가죠? 여기는 너무 더워서 부상자들에게 좋지 않은····”
“아니·”
라온이 도리안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를 잃은 발록의 목 위에서 불꽃의 분수가 솟아올랐다·
화아아악!
짙은 화염은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닿기라도 한 듯 다섯 개의 뿔이 솟아나 있는 발록의 머리를 그대로 되살려냈다·
“바로 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내 인지를 벗어난 속도라니·”
발록은 대단하다고 중얼거리며 본인의 뒷목을 주물렀다·
“끄어어어억!”
도리안은 발록이 부활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모, 목이 잘려도 살아난다고?”
“지랄한다! 무슨 도마뱀 꼬리냐고!”
“못생긴 만큼 끈질겨····”
버렌, 마르타, 루난 역시 못 볼 것을 본 듯 굳어진 안색으로 입술을 떨었다·
“마족이 목 좀 잘랐다고 죽는 게 더 이상하겠지·”
라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풀었다·
-되살아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라스가 의외라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이미 한번 보았던 일이니까·’
흑탑의 초월자였던 창염마군은 라스에게 머리통이 뽑혔음에도 죽지 않았다·
마족 중에서도 강자라는 발록이 목을 벤 것으로 죽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머리를 재생시킬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내 생각 이상으로 간이 짭짤하게 밴 먹잇감이로구나·”
발록은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듯 길게 입맛을 다셨다·
“허세 부리지 마라·”
라온이 턱을 모로 튼 채로 발록을 올려보았다·
“죽지는 않았어도 기운이 줄어든 게 느껴지니까·”
발록은 머리통을 재생시키며 꽤 많은 기운을 소모했다·
힘의 차이가 느껴졌던 처음과 달리 지금 놈의 기운은 자신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허세 따위가 아니다·”
발록이 팔을 길게 펼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저 너 같은 강자와 싸울 수 있다는 게 기쁠 뿐이다· 내가 죽든 네가 죽든, 아니면 둘 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전력으로 오거라!”
그가 살갗이 따끔할 정도의 투기를 일으키며 발을 굴렀다· 얇은 대지가 터져나가며 사방에서 용암과 불길이 솟아올랐다·
“아니, 죽는 건 너뿐이다·”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적섬을 그었다· 서리꽃이 맺힌 듯한 은백색 섬광이 거센 불길을 가르고 발록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하늘을 노니는 유성이 불타는 대지로 가라앉히는 듯한 광경이었다·
“깨부숴주마!”
발록이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손을 뻗자, 용암의 근원에서 솟아난 듯한 끈적한 점성의 대검이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후우우우웅!
발록의 대검에서 피어난 불길은 천지를 뒤덮을 것처럼 포효하며 적섬이 만들어낸 차디찬 공기를 지워버렸다·
콰아아아아앙!
불꽃과 서리를 휘감은 두 자루의 검이 격돌하며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하얗게 얼어붙었던 땅이 갈기갈기 쪼개지고, 굳어버렸던 용암이 다시 불을 뿜어내며 지면을 뒤덮었다·
온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 듯한 광경이었다·
“도망치지 않는 거냐?”
발록은 놀랍다는 듯 날카로운 눈동자를 세웠다·
“인간치고는 싸우는 자세가 되어있구나· 하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야·”
그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 허약한 육체로는 내 힘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발록은 이대로 찍어눌러 버리겠다며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힘을 더해도 라온의 팔과 다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버틴다고? 인간이 어떻게····”
발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이제 네가 견딜 차례다·”
라온이 가뿐하다는 듯 손목을 세우자, 얇디얇은 제천검이 건물의 기둥만 한 화염의 대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두 배 이상 큰 발록을 힘으로 밀어내는 모습에 사람과 악마 모두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이게 인간의 힘이라고?”
발록은 본인의 근력이 밀린다는 것에 당황한 듯 대검을 두 손으로 잡았지만, 여전히 기세를 잡지 못하고 라온의 힘을 견뎌내는 게 다였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라온이 당황한 발록의 눈을 보며 턱을 틀었다·
“이제 시작이거든·”
-흥· 본왕의 뼈와 살을 쪽쪽 빨아먹었으니, 저런 놈은 가볍게 짓눌러야 하는 게 당연하느니라·
라스는 지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지·’
자신은 라스 덕분에 그랜드 마스터일 때부터 초월자를 넘어선 육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 초월에 오르며 어마어마한 능력치와 특성이 상승했기에 발록에게도 지지 않는 육체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좋다! 끝까지 힘으로 승부를 내자!”
발록은 힘으로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존심이 상한 듯 발을 구르며 마기를 극성으로 일으켰다·
대검에서 피어나는 불길이 강해지며 그의 주변이 허옇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잉!
라온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발록의 화검을 향해 서리연을 펼쳤다·
두 줄로 이어지는 은빛 섬광이 불길을 가르고 그 뒤에서 다가오는 발록의 대검을 쳐냈다·
쩌저저저정!
라온이 그은 제천검과 발록이 찔러낸 화염의 대검이 연달아 격돌하며 새까맣게 타버린 균열이 벌어지고, 땅굴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 세상에 혼돈이 찾아온 듯 대지를 가득 메운 용암이 출렁이며 사방으로 끈적한 불씨를 뿌렸다·
쿠구구구구!
라온과 발록은 핏빛 용암 위를 걸으며 서로를 향해 패도적인 검광을 피워냈다·
초월의 무게가 실린 발걸음 하나하나에 땅굴 전체가 뒤흔들렸다·
잡기 따위는 없는 힘과 속도의 격돌· 천지를 개벽하게 만드는 무한한 힘이 끝없이 부딪쳤다·
날렵한 검극이 일으키는 선풍에 용암이 갈라지고, 무른 돌덩이들은 아스라이 부서져 흩날렸다· 두 초월자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부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멧돼지처럼 돌진하다니····
라온은 찌르는 게 아니라, 터트릴 듯이 밀려오는 발록의 대검을 쳐내며 눈매를 찌푸렸다·
‘무인과 비슷하지만 다르군·’
아무리 힘과 속도에 집중하는 무인이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부상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발록은 자신을 죽이고 본인도 죽겠다는 듯 급소를 가리지도 않은 채 힘과 투기로 밀고 들어왔다·
검술 자체도 대단했지만, 움직임 자체에 신념과 혼이 실려 있어서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이제 지쳐가는 모양이구나!”
발록은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듯 잔혹한 미소를 그리며 대검을 거꾸로 잡았다·
불길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길고, 매끄러운 화염의 채찍을 이뤘다· 꼭 용의 꼬리를 보는 것 같았다·
화아아아악!
발록이 화염의 채찍을 내리치자, 자신의 머리 위로 아홉 줄기의 불꽃이 쏟아져 내렸다· 화룡이 끝없이 불길을 내뿜는 것 같았다·
쿠우우우웅!
라온은 서리의 염주벽을 세워 불꽃 채찍을 막아내고서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싸울수록 강해지는 건가?’
발록은 싸울수록 힘을 얻는 듯 점점 더 강한 투기를 일으키며 자신을 압박해왔다·
놈이 휘두르는 채찍의 불꽃이 파랗게 변해가며 글래시아의 냉기까지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따위 냉기로는 내 불꽃을 막을 수 없다!”
발록은 글래시아의 냉기를 비웃으며 채찍을 다시 화염의 대검으로 바꿔서 내리찍었다·
쿠우우우웅!
라온이 발록의 대검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그 열기가 너무도 강해 제천검을 휘감은 냉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감히!
라스가 이를 갈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무얼 하는 것이냐! 본왕이 무시당하잖느냐!
녀석은 왜 당하고 있냐는 듯 이를 갈았다·
-힘으로 조지라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록의 검술과 능력을 전부 파악했으니, 이제 끝을 낼 생각이었다·
“더 힘을 내보란 말이다!”
발록이 두 손으로 잡은 대검으로 용암의 수평선을 그리자,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지독한 열기 속에 바람의 울부짖음이 더해지며 무시무시한 불꽃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 공간 전체가 발록의 붉은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
라온이 쇄도해오는 발록의 대검을 향해 제천검의 검극을 찔러 넣었다·
예리한 검신 위에서 빼어난 한기가 서리꽃을 피워내며 지하 전체로 퍼져나갔다·
분노의 마왕 결전기·
백은의 오로라·
검술로 그려낸 백은의 오로라가 초월의 영역 속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다·
콰아아아아아아!
공기를 에이는 혹한의 숨결이 소용돌이치며 불꽃의 파도 속으로 스며든다· 색이 다른 공기가 충돌하는 곳곳에서 아름다운 빙화의 물결이 피어났다·
온 지하를 뒤덮었던 용암과 불길이 가라앉고, 오직 은빛의 세계만이 살아남았다·
인간의 격을 벗어난 초월의 영역 속에서 대자연의 힘을 끌어낸 결과였다·
콰드드드득!
백은의 오로라 앞에서 얼어붙은 화염 폭풍은 라스를 형상화한 서리의 세계수를 보는 듯 찬란한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 잠깐! 이 냉기는!”
발록이 불꽃을 일으켜서 백은의 오로라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은빛 세계는 이미 놈의 팔다리를 묶고, 몸통과 목까지 조여 버린 상태였다·
“네, 네놈 분노의 군주와 어떤···크흡!”
발록은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과 머리까지 모두 얼어붙었다·
“말이 많아·”
라온이 입매를 비틀며 제천검을 그었다·
콰아아아아앙!
얼어붙었던 발록의 육체가 터지고, 들끓던 용암과 불꽃이 모조리 가라앉았다· 이전과 달리 놈의 육체에서는 자그마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쉽지는 않군·’
간단하게 잡은 듯했지만, 사실 한끗 차이였다· 라스의 결전기를 이용하여 글래시아의 전력을 다 끌어내지 않았다면 역으로 자신이 불에 태워졌을 수도 있었다·
-잘했느니라!
라스가 동그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본왕의 힘을 무시하더니! 꼴이 좋아!
녀석은 조각난 발록을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네가 칭찬도 해주고 별일이 다 있네·’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며 싱긋 웃었다·
-칭찬? 본왕이 언제?
‘잘했다며·’
-그, 그건 그냥 나온 소리이니라! 제대로 힘을 쓸 줄 모르는 놈을 잡고 건방 떨지 마라!
라스는 애송이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건방 안 떨게· 그런데 확실히 초월은 다르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검이 움직이고, 대자연의 힘조차 조절할 수 있는 경지· 고룡을 잡고, 발록을 잡으니, 이제야 자신이 초월에 올랐다는 실감이 난다·
‘음?’
라온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다가 눈동자를 좁혔다· 용암이 사라진 땅굴의 끝에서 흐릿한 마기가 느껴졌다·
‘이건 발록의 마기가 아닌데?’
발록의 기운은 무인을 보는 듯 정심했지만, 발록이 소환된 것으로 보이는 땅에 남아 있는 마기의 흔적에서는 추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나····’
다른 놈이 소환한 거군·
자신과 싸운 발록은 분명 강했지만, 마왕들처럼 제멋대로 차원을 뚫고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많은 준비를 하여 소환한 게 분명했다·
‘아마 흑탑이겠지·’
볼 것도 없다· 이 정도로 더럽혀진 마기를 사용하는 놈들은 오직 흑탑의 마인들뿐이다·
‘이 공간에서 힘을 키우게 한 뒤 끌어내려고 했던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지하에 발록을 소환하여 드워프들을 제압한 후 양쪽 모두를 본인들의 세력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발록과 마족들이 힘을 키우기 전에 처리한 덕분에 수천 혹은 수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막았다·
다만 이곳에서도 죽거나 이들이 많아서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라온이 혀끝에서 씁쓸함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끝났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
손아귀에 남아 있는 발록의 열기를 털어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제 부활 안 하는 거예요?”
도리안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서 얼어붙은 발록의 시체를 가리켰다·
“부활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해도 위협이 안 될 거야·”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을 벗어난 존재들이 되살아난다고 해도 대부분은 크게 힘을 소모한다·
발록이 지금 되살아난다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이 셰릴의 손에서 끝이 날 것이다·
“아까 발록이라고 하던데 그게 뭐야?”
마르타가 처음 했던 말을 떠올린 듯 눈매를 좁혔다·
“마족·”
라온이 발록의 시체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마족 중에서도 굉장히 강한 전투 종족이지·”
라스가 해주었던 설명을 간략하게 읊어주었다·
“발록? 그, 그러고 보니····”
보르고스가 턱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버지께서 그런 괴물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다· 불꽃과 전투, 무기에 탐욕이 강한 놈들이라고 하셨었지·”
그는 이제야 떠오른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모든 종족 중에서도 상대할 자가 드물다고 했는데, 네가····”
보르고스가 피가 굳어서 딱지가 진 무릎을 세워서 라온에게 다가왔다·
“고맙다· 아니, 고맙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는 드워프와 사람들을 구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살이 지져지고 있음에도 신음 하나 없이 머리까지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드워프와 회색 망치 길드의 장인들도 부상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보르고스의 뒤에서 무릎을 꿇은 채 주먹으로 땅을 쳤다· 장인들의 인사였다·
“이러지 마세요·”
라온이 보르고스와 장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도울 수 있어서 도운 것뿐입니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단한 일이 맞소· 그대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망치만 두드리다가 이 불길 속에서 죽어갔을 테니까·”
보르고스는 이런 인사로도 부족하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일단 치료부터 하고 인사를 해주세요· 부담스러우니····”
-라온!
라온이 고개를 젓다가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라스 역시 같은 것을 느낀 듯 비명처럼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콰드드드득!
발록이 죽은 공간이 갈라지며· 아니, 공간 자체가 거칠게 뜯겨 나가며 심연 같은 새까만 물결이 밀려왔다·
콰아아아앙!
차원이 열리는 강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진 유리창처럼 지하 공간이 거칠게 터져나갔다·
쩌어어엉!
급히 제천검을 뽑아서 차원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기파를 막았지만, 그 힘이 너무도 강대하여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원이 개방되는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훌쩍 튕겨 나가 벽에 등을 박았다·
“크윽····”
라온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쿠웅!
새까맣게 갈라진 공간의 틈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지옥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섬뜩한 안광· 조금 전에 죽은 발록과 비슷한 형상이지만, 그 본질이 달랐다·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굽어보는 절대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영혼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저놈이 왜 여기에!
라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설마····’
-본왕이 아까 말했을 터다· 스스로 마계의 옥좌를 걷어차 버린 투귀가 있다고·
녀석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놈이 당대 발록의 수장, 아스카라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