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3화
“아····”
라온은 승리의 미소를 그리는 카룬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 인간이····’
카룬 지그하르트가 맞나?
카룬은 본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과 실비아를 무시하고 모욕했었지만, 본인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과 노력을 통해 열등감을 극복하고 초월에 올랐다·
지그하르트에 대한 깊은 애정과 무인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을 지닌 남자였기에 마음속으로 우러러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확 식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지금 드래곤을 잡고 온 조카한테 할 소리요?”
발데르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거기다 라온은 드래곤을 세 마리나 잡았잖아· 겨우 한 마리 잡다가 죽을 뻔한 댁이랑은 다르다고·”
“뭘 모르는군· 작은놈은 몇을 잡든 의미가 없다· 얼마나 큰놈이지가 중요하지·”
카룬은 낚시꾼끼리 누가 대어를 잡았냐를 자랑하듯 드래곤의 크기만을 말했다·
“음, 듣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발데르는 갑자기 카룬에게 동화된 것처럼 크기는 중요하다고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아니지! 조카가 드래곤을 잡았다면 그냥 칭찬이나 해주라고!”
그는 정신을 차리라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흥·”
카룬은 발데르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후 마티루스의 뿔에 손을 얹었다·
“이 고룡의 이능은 무엇이었지?”
“마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중력이었습니다· 미세한 강도부터, 저를 찌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수준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더군요·”
라온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고 말하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중무전주께서 고룡급 드래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겁니다·”
거짓이 아니다· 세이피아로 떠나기 전 카룬이 고룡에게 특별한 이능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마티루스는 물론이고, 블랙 드래곤의 감각 변화에도 크게 당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너는 스스로 해냈을 것이다·”
카룬은 직접 이뤄낸 공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큰 눈깔이는 왜 저러는 것이냐?
‘큰 눈깔이?’
-눈깔이 아빠니까· 큰 눈깔이가 맞지 않느냐·
라스는 카룬을 큰 눈깔이라고 부르며 콧잔등을 좁혔다·
-저 사나운 눈깔에 가득하던 열등감이 사라진 반동인지 바보가 된 것 같구나·
녀석은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카룬의 언행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내 이름 뒤에 지그하르트라는 성이 붙는 게 자랑스럽다· 그걸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어·”
카룬이 마티루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오늘 너에게서도 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네 영혼에도 조금은 지그하르트에 대한 자부심이 자리 잡았다는 뜻이겠지·”
그는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서 등을 돌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간직해주기를 바란다· 잘 돌아왔다·”
카룬은 고생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다시 가주전 앞으로 나갔다·
“아, 아버지· 라온이랑은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버렌이 긴장된 눈빛으로 카룬에게 다가갔다·
“별일 아니다· 그보다····”
카룬이 가늘게 좁힌 눈동자로 버렌을 위아래로 살폈다·
“너는 이번 임무에서 무얼 느끼고 돌아왔느냐?”
“음, 제가 아직 한참 부족한 것을····”
“내가 봐도 그렇다· 너는 가주님 대신 내가 봐주마·”
“예?”
그는 눈을 끔벅이는 버렌의 뒷목을 부여잡은 채 중무전으로 끌고 갔다·
“저 인간 왜 저러는 거야?”
발데르는 카룬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라온은 멀어지는 카룬의 등을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나름대로 칭찬해주고 싶었던 건가·’
카룬의 성격상 친근하게 다가올 수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서 자신을 격려해주려고 한 것 같았다·
“저 인간을 보고 있으니, 생각할 게 많아서 배가 고프네·”
발데르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본인의 배를 매만지며 라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어보니 드래곤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조금 남았으려나?”
그는 남은 고기가 있으면 달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물론입니다· 도리안·”
“아, 옙!”
라온이 턱짓을 하자,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드래곤 고기를 꺼냈다·
“크흠! 고맙다·”
발데르는 잘 먹겠다고 말하며 세 덩이의 드래곤 고기를 냉큼 받았다·
“아, 그리고····”
그가 고기를 본인의 어깨 위에 올리며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부탁했던 것 말인데····”
“이런 곳에서 무슨 대화를 하는 거야?”
발데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음····”
발데르의 산 같은 덩치 뒤로 데니어와 마르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표정을 보니 진지한 대화 같은데, 내가 방해를 했나·”
데니어는 굳어진 발데르를 보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진지는 무슨! 이 고기를 어떻게 구워야 하는지를 물어보고 있었을 뿐이야·”
발데르는 헛소리 말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 드래곤 고기네· 이거 굽기는 힘들지만, 맛 하나는 최고급 소고기도 못 따라와요!”
마르타는 예상외로 맛이 좋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도리안· 고기 남은 거 있지?”
“충분히 있죠!”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배 주머니에서 세 종류의 드래곤 고기를 꺼내주었다·
“고맙다· 잘 먹으마·”
데니어는 도리안과 라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왜 온 거요?”
발데르는 왜 찾아왔냐며 한쪽 눈썹을 내렸다·
“네가 요즘 나만 따라다니길래 오늘은 왜 안 오는지 기다리고 있었지·”
데니어는 함께 돌아가자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그런 거라면 잠시 기다리시오· 조카한테 받을 게 더 있으니까·”
발데르는 먼저 가 있으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지·”
데니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고생 많았다· 푹 쉬거라·”
그는 언제나 보여주는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등을 돌렸다·
“잘 먹을게!”
마르타는 아버지인 데니어에게 팔짱을 낀 채로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저 모습에서 아주 조금이지만, 불안함이 느껴졌다·
“음, 아까 하려던 말을 이어서 하자면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발데르가 멀어지는 데니어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오히려 시간을 너무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짜증이 날 정도더군· 밥 먹고 산책하는 시간까지 다 정해져 있어·”
“이모를 찾아가지는 않습니까?”
“거의 매일 들리는데, 네 걱정과 달리 누님한테 이상한 주술을 쓸 기세는 전혀 없어·”
그는 말 그대로 병문안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라온이 발데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나중에도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발데르는 조카의 부탁은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도리안·”
라온이 발데르와 함께 걸어가는 데니어의 등을 보며 도리안을 불렀다·
“조금 전에 이곳에 왔던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도리안은 심안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음····”
도리안이 입가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무전주님은 곧은 칼날 같은 느낌이었어요· 다만 예전과 달리 검신이 연검처럼 부드러워진 느낌이었고· 진무전주님은 그냥 시, 식욕?”
그는 카룬과 발데르를 말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현무전주님에게서는····”
도리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는 아예 모르겠다고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라온이 사라지는 데니어를 보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발데르의 의도도 알아차린 것 같고· 역시나 쉽지 않네·’
하긴 이런 일로 꼬리가 밟혔다면 진즉에 가주님에게 들켰겠지·
데니어 지그하르트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지금도 그가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계속 견제를 해야겠지·’
또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으니, 어떤 방법이든 대비를 해놓는 게 옳았다·
“도리안· 나도 고기 좀 줄래?”
라온이 도리안에게 고기를 달라고 말하며 손을 뻗었다·
“넵!”
도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세 종류의 드래곤 고기를 꺼내주며 웃었다· 그는 물건을 꺼내고 넣을 때 가장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고맙다·”
-오오! 본왕을 주려고?
라스는 드디어 제물을 바치냐는 듯 거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꿈 깨셔·’
라온은 달라붙는 라스를 밀어내고, 유아와 율리우스와 함께 별관으로 향했다·
아이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따끈한 연기가 올라오는 별관이 보였다·
“마님! 언니들!”
유아가 세차게 문을 열고 들어가 임무에서 복귀했다는 것을 알렸다·
쿠구구구!
계단이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자마자, 시아가 튀어나와 라온을 끌어안았다·
“라온! 늦었잖아!”
시아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래도 라온 대신 내가 집을 지키고 있었어!”
그녀는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자신에게 머리를 비볐다·
“라온!”
“장인어른에게 네 활약은 들었다· 용을 세 마리나 잡았다며?
실비아와 에드가도 잘 돌아왔다는 듯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고생했어· 누나·”
라온은 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어요·”
역시나 자신이 마음 편하게 있을 곳은 대륙 전체에서 이 별관뿐이었다·
“이건 선물·”
도리안에게 받은 드래곤 고기를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본왕이 잘 먹을····
‘네가 아니라고!’
* * *
“아우!”
라온은 가족들과의 식사를 끝낸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목욕을 하고, 배를 채우니, 이대로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크흠! 드래곤 구이를 먹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별관 요리들은 여전히 맛깔나느니라·
라스는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였다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역시 집밥이 제일이니라!
‘집밥이라····’
이제 라스도 별관을 집처럼 여기는 건가·
집이라는 단어는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예전에도 집밥이라는 말은 한 번씩 했지만, 이렇게 쉽고 편안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헌데 그건 어떻게 할 것이냐?
라스가 꼬리를 살랑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거?’
-도마뱀 하트 말이다·
녀석이 서랍 위에 올려놓은 아공간 주머니를 가리켰다·
-고룡급 도마뱀 하트는 네놈의 생각 이상으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느니라· 도마뱀들의 특별한 능력도 그곳에서 나오니까·
라스는 조심해서 다루는 게 좋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줄 사람을 정해놨어· 그리고 남은 하나는····’
라온이 라스를 보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놔두려고·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줄 사람? 그게 누구냐?
‘그건····’
답을 해주려고 할 때 창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글렌이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라온이 눈을 끔벅인 채 창문을 열었다·
“여기는 어떻게····”
글렌과는 오늘 밤 가주의 연무장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그가 이곳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산보 삼아서 나와보았다· 이리된 김에 연무장까지 걸어가자꾸나·”
글렌은 나오라는 듯 턱을 까딱이고서 등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제천검과 진혼검 그리고 리메르의 검까지 챙긴 후 조용히 별관을 나섰다·
먼저 걸어가는 글렌의 옆으로 다가가서 다시 인사를 했다·
“생각해보니, 그 녀석의 검을 반납하러 가서 그대로 가져왔구나·”
글렌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리메르의 검을 보며 가늘게 웃었다·
“수호자께서 지그하르트와 세이피아의 동맹의 증거라고 다시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라온은 스테린이 검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리고····”
허리 뒤편에 꽂아 놓은 진혼검을 꺼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은 아직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떠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실····”
라온은 리메르의 영혼이 지금도 진혼검에 박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크하하하하!”
글렌이 드물게도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놈다운 일이다· 셰릴이 좋아하겠어·”
그는 질리는 엘프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천검대주님이랑 스승님이랑 무슨 관계이셨습니까?”
라온은 슬쩍 리메르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흠, 그건··· 아니, 내가 말할 게 아니지·”
글렌은 수하들의 사생활에 관여할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직접 물어보거라· 아마 도망치겠지만·”
그는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간다는 듯 옅게 웃었다·
“제가 묻기는 힘들죠····”
라온이 뒷머리를 매만졌다·
“···나도 그렇다만, 너도 많이 변했구나·”
글렌은 사람 관계의 눈치가 생긴 것 같다며 턱을 주억였다·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도 눈치 없다는 소리를 매일 같이 듣고 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글렌과 말을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속 깊은 이야기까지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가주전 뒤편의 연무장에 닿을 수 있었다·
“창궁검은 다 익혔느냐?”
글렌이 어둑한 하늘을 올려보며 물었다·
“완전히 숙달된 건 아니지만, 이제 못 펼치는 초식은 없습니다·”
초월에 오르고, 모든 검술의 경지가 상승했기에 이제는 창궁검에서도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 연습 시간만 충분하다면 전부 숙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구나·”
“다음이요?”
“하늘 어딘가에서는 언제나 벼락이 치는 법이지· 이번에 전수할 무학은····”
글렌의 눈동자 위로 붉은 벼락이 번쩍였다·
“내가 얼마 전에 만든 뇌기의 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