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7화
-아주 색색들이 몰려오는구나!
라스가 골드 드래곤으로 보이는 남자를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먹는 맛이 있겠느니라·
녀석은 이왕이면 시원한 블루 드래곤도 있었으면 좋겠다며 헛소리를 주절거렸다·
‘다른 도마뱀과는 달라·’
라온이 골드 드래곤에게서 전해져 오는 강대한 기파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태로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눈앞에 있는 금발 남자의 기운은 처음에 싸웠던 블랙 드래곤보다 훨씬 윗급이었다·
전력의 자신이라도 해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긴장감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고오오오오·
라온이 호흡을 조절하며 가라앉은 집중력을 끌어 올릴 때 세이피아로 추락했던 스테린이 다가왔다·
“미안하다····”
스테린이 입가에 흘러내린 핏물을 닦으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이제 정말 갈 때가 되었는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더구나·”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미안하다는 말만 읊조렸다·
“너는 세이피아를 구해주었는데, 내가····”
“괜찮습니다·”
라온이 뒤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베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스테린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조차 속일 수 있도록 더 당당한 말을 꺼냈다·
“그래· 여기서 막자꾸나·”
스테린은 자신의 말에 힘을 얻은 듯 손가락의 주름이 빨개지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놈의 이름은 마티루스, 당대 로드를 제외하면 골드 일족 중 가장 강한 드래곤이다·”
스테린은 고룡 중에서도 위험한 존재라고 말하며 활을 쥐고 있는 손을 떨었다·
그의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제가 앞에서 싸우겠습니다· 수호자님께서는 뒤에서 도와주십시오·”
“라온····”
스테린 미소와 함께 마티루스의 앞으로 나아가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란 녀석은·’
라온은 싸우자가 아니라,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 전쟁을 본인의 것으로 여기며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고룡급 드래곤 둘에 저 뱀 가면의 인간과 싸워서 많은 힘과 체력을 소모했을 텐데도,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는 모습에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냐! 내 네 뒤를 꼭 지켜주마!”
스테린은 라온의 배려를 받아들이며 세차게 활을 들어 올렸다·
근육이 찢어지고, 살이 뜯겨나간 고통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손주의 제자를 지켜주겠다는 의지만이 차올랐다·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구나·”
마티루스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 오늘 세계수와 세이피아는 사라진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세계수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고위 마법 지옥의 불길이었다·
우우우우웅!
마티루스는 불꽃의 벽을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아공간에 넣어둔 대형 몬스터까지 소환하여 세계수에 있는 엘프들을 압박했다·
“으아아아악!”
“모, 몬스터가 여기에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본 엘프들은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았다·
전투원들이 거의 없었기에 모두가 불길과 몬스터에 밀려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마티루스!”
스테린이 세계수의 뿌리를 태우기 시작한 불길을 보며 악을 질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시작은 너희들이다· 앞으로 적이 될 종족의 씨앗을 멸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마티루스는 왜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계수는 엘프들만의 것이 아니다! 대륙 전체에 영향이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세계를 망치는 벌레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지·”
그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티루스····”
스테린이 치가 떨린다는 듯 하얀 이를 갈았다·
-도마뱀 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치졸해지는구나!
라스는 직접 튀어나와서 마티루스의 이빨을 뽑아버리고 싶다며 미간을 구겼다·
“아, 그러니까····”
라온이 마티루스를 굽어보며 턱을 까딱였다·
“오마 밑에서 딸랑거리려고 세계수를 불태운다는 거네? 세계의 중재자라는 놈들이?”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위아래로 저었다·
“앞으로 드래곤을 보고 중재자니, 조율자니 하는 놈은 혀를 뽑아야겠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얍삽한 협잡꾼으로밖에 안 보이니까·”
라온은 땅을 기어 다니는 도마뱀보다도 못하다고 말하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 주둥이부터 닫게 해주어야겠군·”
마티루스가 이마에 힘줄을 세운 채로 손가락을 세웠다· 그의 손끝에서 응집된 빛이 황금색 화살이 되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날아들었다·
쩌어어어엉!
라온이 제천검으로 염주벽을 세워서 마티루스가 쏘아낸 빛의 화살을 막아냈다·
‘무겁군·’
염주벽을 운용했음에도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묵직했다· 얇고, 작은 빛이었지만, 그 위력은 초월자들의 검격에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시작이다·”
마티루스는 인사였을 뿐이라고 말하며 방금 쏘아낸 빛의 화살을 다발로 생성해서 쏘아냈다·
숫자가 늘었음에도 그 위력과 속도는 죽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막아야 해·’
라온이 급소를 향해 날아드는 빛의 화살을 보며 어금니를 씹었다· 막는 것 자체가 손해였지만, 기동력이 느려진 스테린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쩌저저저저정!
라온은 광아검과 설풍검결로 쌍검술을 펼치며 마티루스가 일으킨 빛의 화살을 쳐냈다·
지친 어깨와 전완근이 찌르르 울리는 듯했지만, 혀를 깨물고 모든 빛을 베어냈다·
“기회로군·”
녹랑사가 가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어둑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소리 없이 라온의 좌측에서 나타나 바람이 응축되어 있던 칼날을 찔러넣었다·
“····”
라온은 녹랑사의 움직임을 파악했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마티루스의 빛을 지워내는 데만 집중했다·
“끝이다·”
녹랑사의 검날이 자신의 허리를 찌르려는 찰나 뒤편에서 푸른빛을 머금은 화살이 날아왔다·
콰아아아아앙!
스테린이 쏘아낸 화살은 녹랑사의 검을 쳐내는 것으로 모자라, 우측에서 밀려오던 빛의 화살마저 꿰뚫어버렸다·
“어딜 감히·”
스테린은 절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온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녹랑사· 네놈이 늙은 엘프를 잡아라· 이 인간은 내가 죽이마·”
마티루스는 녹랑사에게 스테린을 맡기며 오른손 위로 금빛의 구체를 조형했다· 빛의 오브· 마법사들의 환상을 현실로 끌어내는 장치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좋겠군·”
녹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는 바람을 휘감은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라온· 내 걱정은 하지말고, 마티루스에게 집중하거라·”
스테린은 투구를 쓴 애송이 정도는 이길 수 있다며 고요히 활시위를 당겼다·
“물론입니다·”
라온은 믿고 있겠다고 말하고서 마티루스를 향해 서리연을 그었다·
제천검 앞으로 쏘아진 서리의 칼날이 마티루스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캬아아아앙!
서리의 칼날과 제천검이 마티루스의 목을 베려던 찰나 놈이 만들어낸 오브에서 금빛 섬광이 솟아나 서리연의 두 검격을 동시에 막아냈다·
“조잡하구나·”
마티루스가 코웃음을 치자, 검격을 막아낸 빛이 수십 갈래로 나뉜 채 자신의 급소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 쏘아냈던 빛의 화살보다도 더 빠르고 강맹했다·
“네 스스로 다가왔으니, 피할 공간이 없을 것이다·”
놈의 말대로 빛의 숫자가 너무 많고, 빨라서 저 모든 것을 막아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
라온이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제천검을 세웠다·
“모조리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제천검의 검날 위로 불꽃의 장벽을 세웠다· 허공을 길게 잘라내는 듯한 불길이 마티루스의 빛을 휘감았다·
만화공 천화·
무금향·
본래 어둠을 집어삼키는 불꽃의 비단은 타락한 조율자의 빛을 먹어치우며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앙!
라온은 무금향이 폭발한 틈을 놓치지 않고 마티루스를 향해 돌진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두 지친 상태였기에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했다·
투우웅!
허공에서 태화이보를 밟고 나아가 마티루스의 사각에서 리메르의 검을 찔러넣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마티루스는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인간들은 언제나 멧돼지처럼 달려들기만 하지·”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오브가 작은 구슬처럼 응축되었다가 펼쳐지며 빛의 해일을 일으켰다·
세이피아의 하늘이 황금빛 바다로 보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빛의 파동이었다·
치리리리링!
라온이 제천검과 리메르의 검을 사선으로 세운 채 벼락처럼 내리쳤다· 만화공 염해무결· 불꽃과 서리의 파도로 빛의 해일을 가르며 은검몽을 그렸다·
화아아아아아!
꿈결처럼 흐트러지는 적빛의 검격이 마티루스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피가 터지지는 않았다· 놈은 빛을 이용한 분신을 세워둔 채 이미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흥!”
마티루스가 머리 위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오브가 길게 벼려지며 찬란한 빛의 검을 세웠다·
“성화검·”
그는 두 손으로 빚은 광검을 그대로 내리찍어왔다· 검술은 아니었지만, 그 위력은 초월자의 절기 못지않았다·
치이이이잉!
라온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빛의 검격을 향해 적섬을 그어 올렸다·
파지지지직!
불꽃의 검과 빛의 검이 맞부딪치며 하늘 위로 스파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끝없이 마나를 응축시키는군·’
라온은 마나의 양으로 적섬을 견뎌내는 빛의 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건 기회로 삼을 수 있겠어·’
적섬에 예검과 쾌검의 묘리를 극성으로 담아내며 리메르의 검을 쥐고 있는 왼쪽 손목을 돌렸다·
금빛을 지워버리는 하얀색 물결· 상대의 무학을 지우는 반격기, 백영섬이었다·
촤아아아아악!
백영섬이 마리투스가 일으킨 빛의 검을 지워버린 순간, 적섬에 폭발력을 더해서 마티루스의 심장을 노렸다·
콰드드드득!
적섬의 불꽃이 금빛 협잡꾼의 가슴을 베려는 찰나 흩어졌던 빛이 방패가 되어 검격을 막아냈다·
마티루스는 이번에도 대량의 오러를 쏟아부으며 검격을 차단했다·
다른 건 몰라도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만큼은 저쪽이 압도적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마나의 양이나, 마법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 많아·
마티루스는 조금 전에 상대했던 블랙 드래곤이나, 레드 드래곤보다 전투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다·
스테린이 지쳤다고 해도 밀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저 둘을 죽일 실력은 있는 것 같군·”
마티루스가 인정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별다를 건 없지만·”
그는 장난은 끝이라고 말하며 왼손에 새로운 빛의 오브를 만들어냈다·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버틴다?”
라온이 번쩍이는 오브를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네 목이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를 계산하는 게 빠를 거다·”
* * *
“거, 검은 불! 지옥의 불길이야!”
“몬스터도 있어!”
“도, 도망칠 공간이 없는데····”
성지로 들어갔던 엘프들은 천천히 밀려오는 지옥의 불길과 몬스터들에게 겁을 먹고 속절없이 물러서기만 했다·
“죽을 수밖에 없나·”
“세계수는 누군가가 지켜주겠지·”
몇몇 엘프들은 이미 생을 포기한 것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렸다·
파아아앙!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시얀이 이불을 벗어 던지고 앞으로 나섰다·
우우우우웅!
그녀의 손끝에서 유니콘의 모습을 한 물의 최상급 정령과 나비의 모습을 한 바람의 최상급 정령이 나왔다·
콰아아아아아!
정령들은 그녀의 마음을 읽고 바람의 칼날로 몬스터를 베어버리고, 푸른 소나기로 밀려오는 흑염을 밀어냈다·
“시얀 님?”
“뭣들 하는 거예요!”
시얀이 감사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뒤를 돌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분노가 깃든 눈동자로 동족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세이피아! 그리고 성지에요!”
시얀이 이를 악문 채로 하늘을 가리켰다·
“외부의 사람이 목숨을 걸고 있는데, 왜 가디언을 찾고, 생을 포기하는 건데요!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면 세계수가 좋아할 것 같아요?”
그녀는 정신을 차리라며 세차게 발을 굴렀다·
“우리의 땅을 지킬 사람은 오직 우리뿐이에요!”
시얀은 스스로 움직이라고 외치며 단호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드러냈다·
“하, 하지만 저희는 하급 정령밖에 소환을 못 합니다·”
“저도 평범한 궁술밖에 쏘지 못해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핑계가 되지 않아요·”
시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까지 몰린 이상! 하급 정령이든! 돌을 던지든! 상관없이 싸워야 한다구요!”
그녀는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외치며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무리로 뛰어들었다·
쿠구구구구!
세 번째로 소환한 대지의 정령이 땅을 갈라서 몬스터들을 가라앉혔다·
“허억····”
시얀이 거친 숨을 내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계속 세이피아 전체의 독기를 막아내고 있던 상태에서 정령들을 계속 부리다 보니,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곧 쓰러질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끝까지!”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서려고 할 때 아직 어린 엘프들이 앞으로 나와서 작은 물의 정령을 소환했다·
파아아악!
아이들만큼이나 어린 정령들이 오줌보 같은 물을 뿌렸다·
하나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여럿이 모인 물결은 조금이나마 불길을 밀어냈다·
“으음····”
그 모습을 본 엘프들도 입술을 깨문 채 앞으로 나와서 하나씩 정령을 소환하여 몬스터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두려움은 있었지만, 포기하거나 물러나는 사람은 없었다·
“걱정 마세요· 누구도 저보다 먼저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시얀은 모두 함께 싸우자고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 한번 잘하네· 공주님!”
마르타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세계수로 다가오던 오우거의 목을 갈랐다·
“다른 사람들이 돕는다고 해도 자기 집은 자기들이 지켜야지!”
그녀는 생각이 마음에 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이 아니라, 차기 수호자시다· 여기는 왕국이 아니야!”
버렌이 우측에서 밀려오는 오크 무리를 한 번에 베어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응· 시얀· 잘했어·”
루난은 물에 젖어서도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서리로 밀어내며 시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 차기 수호자라고! 버릇없는 짓 좀 하지 마!”
버렌이 루난의 행동에 당황하여 입술을 떨었다·
“흐으으, 여기가 더 험하네····”
도리안은 세이피아가 더 지옥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대주님이 계신 곳이 제일 안전해·”
크레인이 천공에서 싸우는 라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다들 잡소리는 그만하고 집중해·”
버렌은 세계수의 아래에 올려져 있는 진혼검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의 고향이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가자아아아아!”
마르타의 외침과 함께 광풍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 * *
쩌저저정!
라온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빛의 폭격을 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틈이 없어·’
검사가 접근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을 보니,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마티루스는 실전 경험과 전투 감각이 뛰어났다·
‘아니, 저놈이 경험이 많은 것도 있지만····’
내 움직임이 이상해·
정신이나, 육체적으로 지친 것 이상으로 몸이 무겁다· 눈에 보이는데도, 빛의 마법을 베거나 막는 게 쉽지 않았다·
캬아아아앙!
라온이 구름처럼 밀려드는 빛의 파도를 가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스테린도 본인의 몸 상태가 평소보다 너무 좋지 않아서 마티루스를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자신과 대련을 해서 지쳤다고 해도 초월자가 저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확인해볼까?’
평생을 수련해오며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말 지친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문제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후우우우웅!
마티루스가 만들어낸 오브에서 수십 갈래의 빛무리가 뿜어져 자신의 전신 급소를 노려왔다·
터억!
라온이 좌측으로 태화보를 밟았다· 빛이 일으키는 그물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한순간 몸이 무겁고 느리게 느껴졌다·
콰아아아앙!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거워진 몸 때문에 피하지 못하고 빛의 그물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허억····”
라온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조금 전 아주 미세하게 육체와 오러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일어난 작용이 분명했다·
“그걸 느낀 건가·”
마티루스가 놀랍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확실히 저 늙은 엘프와는 다르군·”
그는 감탄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절거리지 말고, 묻는 말이나 대답해라· 도마뱀·”
“내가 알려줄 이유는 없지·”
마티루스는 짜증이 난 듯 콧잔등을 찌푸리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허공에 떠 있는 오브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천지사방으로 빛의 조각들을 뿜어냈다· 밤하늘의 별이 모조리 쏟아지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아!
라온이 양손에 든 검을 시간 차를 두고 휘둘렀다· 셰릴에게 배웠던 쌍검술을 이용하여 다가오는 빛들을 모조리 쳐내려고 할 때였다·
‘또야·’
조금 전 충분히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빛 마법이 제천검보다 빠르게 지나가 자신의 옆구리를 뚫었다· 고통보다도 어떤 방식인지가 떠올랐다·
치이이잉!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일으켰다· 열기와 냉기의 폭발로 주변의 빛을 모조리 지워버린 후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알겠어·”
라온이 하늘의 끝에 닿을 뜻 올라서 있는 마티루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중력이로군·”
처음에는 자신의 육체에 저주라도 내리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마티루스는 자신이 선 공간의 중력을 건드려서 육체와 오러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기이하게도 마나로 중력을 다루는 게 아니었기에 파악하는 게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감각이 좋군·”
마티루스는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중력을 미세하게 통제하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알게 된 이상 의미는 없다·”
라온이 마티루스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럴까?”
마티루스가 비웃음을 흘림과 동시에 그의 몸이 웅대한 빛으로 휘감겼다·
쿠구구구구구!
하늘에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육체· 처음 대수림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고룡이 천공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재미는 보았으니, 이제 끝을 내자·]
마티루스의 담담한 음성을 듣자마자, 자신의 육체가 통제를 벗어나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구구구!
미세한 중력 조작이 아니라, 초월급으로 강한 중력 조작이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라온은 결국 스테린이 처음 떨어진 것처럼 세이피아의 땅으로 추락하며 피를 토했다·
“크헉!”
녹랑사와 싸우고 있던 스테린 역시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라온의 옆으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마티루스이 길게 비웃음을 흘렸다·
[중력 조작은 내가 고룡이 되어서 얻어낸 능력이다· 마나로 다루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지· 미세한 조종이 가능하다면 강한 힘을 내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는 그저 인간의 발버둥을 보려고 했을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빛은 질량이 없지만, 중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죽여주마·]
마티루스는 세계수 주변을 중력으로 내리누르며 고개를 쳐들었다·
“끄아아악····”
“이, 일어설 수가 없어!”
“소, 손도 발도 안 움직여····”
승기를 잡아가던 광풍대 검사들과 엘프들도 무엇하나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커헉····”
스테린도 힘이 다한 듯 검은 피를 토했다· 저물어가는 육체로 무리를 한 반동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이 나는군·”
스테린에게 부상을 입었는지 어깨 위로 피를 흘리는 녹랑사가 입맛을 다셨다·
고오오오오!
마티루스이 중력으로 모두를 내리누른 채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놈의 새까만 목구멍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브레스· 그것도 하루에 쓸 수 있는 브레스를 모조리 끌어모은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창공 위에서 모여드는 황금빛 브레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강해진 중력 때문에 검을 쥐고 있는 손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고, 오러를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블랙 드래곤,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보다도 더 강한 저 브레스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도와줄 사람이····’
라온이 라스를 바라보았다·
-으음, 어쩔 수 없구나· 본왕이 나서주마·
라스는 아직 영체가 다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머뭇거림 없이 도와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 너는····’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라스를 바라볼 때였다·
후우우우!
중력에 짓눌려서 가지가 꺾여나가던 세계수의 잎들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푸르른 녹빛을 퍼뜨렸다·
그 빛을 받은 진혼검에서 바람이 일어나 자신의 어깨와 등에 닿았다·
“아····”
라온이 어딘가 그리운 바람의 향을 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꼭 리메르가 할 수 있다는 듯 어깨를 잡아주는 기분이었다·
-현재로서는 강림이 불가능하다· 본왕이 기운을 밀어줄 터이니····
‘괜찮아·’
라온이 라스에게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게 무슨····
‘내가 할게·’
천근처럼 무거운 무릎을 세우고, 허리를 폈다·
‘이제는 내가 할 때야·’
언제나 도움만 받았다·
리메르 덕에 살아남고·
글렌에게 구출되고·
라스가 강림하여 위기를 넘겨주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은 덕에 지금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초월에 올라서도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기다린다는 건 스스로의 가치와 미래를 땅에 버리는 일이었다·
오늘은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발과 손으로 걸어갈 때였다·
쿠와아아아아아!
마티루스가 살기를 가득 담은 채 세계수를 향해 성광의 숨결을 내리쳤다·
브레스가 일으키는 어마어마한 파동에 하늘이 찢겨 나가고, 닿지도 대지가 바스러진 채 떠올랐다·
라온은 눈앞을 아니, 세상을 가득 채운 듯한 브레스를 바라보며 제천검과 리메르의 검을 고쳐잡았다·
우우우우우웅!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휘돌리며, 초월의 영역을 개방했다·
‘내가 초월에 오르며 배운 건 자연의 오러만이 아니야·’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초월에 닿게 된 이유는 인간의 감정이다·
희노애락을 모두 깨우치고, 인간이되 인간을 뛰어남은 존재가 되었던 그때의 감각을 두 자루의 검에 담아냈다·
쿠우우웅!
지진을 일으키듯 발을 굴렀다· 리메르의 검 위로 만화공의 불꽃을 담아내고, 제천검 위로 글래시아의 냉기를 둘렀다·
유려한 칼끝을 타고 솟아오르는 오러가 새로운 시대를 알리듯 황금빛 여명을 일으켰다·
검계현신·
개벽·
들불처럼 솟아오르는 황금색 기파가 중력을 담은 채 쏟아지는 성광의 숨결과 격돌했다·
쿠와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