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9화
“하아····”
리메르처럼 호랑이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있던 셰릴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가는 모양이네요·”
그녀는 5 연무장을 떠나는 광풍대 검사들을 보며 가늘게 입술을 씹었다·
“저분들이 저보다 낫군요·”
로엔이 광풍대를 살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저는 아직 리메르 님을 떠나보내지 못했는데, 광풍대 분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나이가 부끄럽다고 말하며 허허허 웃었다·
“어쩔 수 없죠· 그 망할 녀석과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셰릴이 미간을 깊게 구겼다· 그녀 역시 아직 리메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듯 안색이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사는 언제나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법이다·”
호랑이 바위 위에 서 있는 글렌이 무겁게 입술을 뗐다·
“다만 그 검사가 죽으면 등에 지고 있던 죽음은 칼날이 되어 남은 이들의 가슴에 박히게 되지·”
글렌은 아직 리메르가 남긴 칼날을 받아들이는 중이라며 참으라고 읊조렸다·
“그렇죠·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받아들이는 것뿐이죠·”
셰릴은 받아들인다고 말과 달리 팔이 떨리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망할 새끼·”
그녀는 광풍대 앞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줄 때와 달리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 좋은 분이셨습니다·”
로엔이 푸르른 하늘을 올려보며 호랑이 바위를 매만졌다·
“매번 제 일터를 찾아와서 난장판을 벌이고 가셨죠·”
“···그건 좋은 분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 아니에요?”
셰릴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혼자서 일하는 경우가 많으니, 외로울까 봐 함께 시간을 보내주신 것 같습니다· 가끔 살기를 억제하지 못할 때 대련을 받아주시기도 했지요·”
로엔은 리메르가 자주 찾아와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요?”
“예· 다들 5 연무장에 없으면 도박장에 갔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리메르 님은 지그하르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재능이 있는 분이셨죠·”
그는 가볍지만, 진중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두 손을 모았다·
“특히 광풍대의 이야기를 할 때 눈이 반짝거리셨습니다· 라온 님과 다른 검사분들의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로엔은 덕분에 5연무장에 가지 않아도 대부분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며 웃었다·
“내게도 그랬다· 라온이 작은 일만 해내도 가주전을 찾아와서 하루종일 진상을 부렸어· 걸음마를 자랑하는 애 아빠를 보는 것 같았지·”
글렌은 공감한다고 말하며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라온이 초월에 오른 것을 가장 좋아했을 사람도 그놈이었을 거다· 그러니 웃으면서 갔을 것이야·”
그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
셰릴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더 있군요·”
로엔이 셰릴을 바라보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리메르 님은 셰릴 님의 이야기를 할 때도 굉장히 즐거워하셨습니다·”
“네? 제 이야기라니····”
셰릴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릴 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싸웠는지를 말하며 제게 도움을 요청하신 적이 많아요·”
로엔은 리메르를 가장 즐겁게 만들었던 사람은 셰릴과 광풍대였다며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나도 자주 들었다·”
글렌이 셰릴을 내려다보며 턱을 주억였다·
“네가 망신을 당하거나, 잘한 일이 있을 때도 나를 찾아와서 수다를 떨다 갔어·”
그는 리메르의 수다 소재는 대부분 셰릴과 광풍대였다고 말해주었다·
“그 멍청이가····”
셰릴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를 갈았다·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고·”
그녀는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리메르에 대한 원망을 흘렸다·
“····”
글렌과 로엔은 셰릴의 마음을 느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사실 제가 가고 싶었어요·”
셰릴은 5 연무장을 떠나는 광풍대를 보며 떨리는 손목을 잡았다·
“그놈의 마지막 유품을 전해드리고 싶었지만, 스승을 잃은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아쉬움과 씁쓸함이 어우러진 눈동자를 굽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메르는 알아줄 거다·”
글렌은 걱정하지 말라며 셰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뇨· 그 멍청이는 모를 거예요· 그냥 지금은····”
셰릴이 한숨을 내쉬고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저 아이들이 슬픔을 다 이겨내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광풍대에게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래· 광풍대라면 분명 더 성장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리메르 녀석이 바라던 대로····”
글렌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과 광풍대를 전으로 승급시킬 수 있겠지·”
* * *
‘왜일까?’
라온은 잔잔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웠다·
-뭐가 말이냐?
식사를 끝내고, 불침번 야식까지 먹은 라스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아직도 내가 초월에 올랐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
바라고 바라던 초월이라는 영역에 올라섰음에도 자신이 강해졌다는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위로 가고 싶다는 욕구만 차올랐다·
-본래 산이란 오르기 전에는 높아 보이고, 오른 후에는 낮아 보이는 법이니라·
라스가 동그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네놈은 이미 초월이라는 산에 올랐으니, 낮아 보이는 게 당연하지· 그랜드 마스터에 머물러 있었다면 여전히 거대한 벽처럼 보였을 것이니라·
‘그건 그렇겠지·’
라온이 구름처럼 떠 있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귀때기가 죽은 이후로 네놈은 오직 앞만 보고 있느니라· 눈 옆을 가리고 달리게 만든 경주마처럼·
라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때기의 죽음을 겪었기에 다시는 다른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다짐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잖느냐·
녀석은 그게 아니고서는 파티 날에도 밤새 수련을 하지 않았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네·’
라온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라스의 말대로 자신은 초월이라는 경지를 즐기지 못하고, 더 위를 향해 달리고만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광풍대 검사들만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누구 하나 잃고 싶지 않았기에 글렌처럼 강해져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의외네·’
라온이 라스를 보며 픽 웃었다·
‘네가 날 이렇게 잘 알 줄은 몰랐어·’
-본왕도 겪었으니까·
라스는 같은 일을 겪었다는 듯 탁한 시선을 돌렸다·
‘같은 일을 겪었다고? 그러고 보니 전에도····’
라온이 라스에게 과거의 일을 물어보려고 할 때 우측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니, 자신과 함께 불침번을 서고 있는 유아가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훌쩍이고 있었다·
“유아야?”
라온이 유아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이야?”
“···리메르 님이 생각나서요·”
유아는 얼굴을 들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불침번을 서고 있으면 중간에 일어나셔서 항상 말을 걸어주셨거든요· 그게 생각나서····”
그녀는 리메르가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나왔다며 훌쩍였다·
“울지 마····”
함께 불침번을 서는 율리우스도 리메르가 그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흔들려서는 안 돼· 굳건한 모습을 보여줘야 그분이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고·”
율리우스는 유아에게 한 말과 달리 슬픔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하아·
라온은 억지로 울음을 참는 유아와 율리우스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축하도 제대로 못 해줬네·
유아와 율리우스는 리메르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인해 마스터의 벽을 부수고 강기를 끌어냈다·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아서 자유자재로 강기를 쓸 수는 없지만, 마스터에 오른 것은 분명한데 지금까지 축하를 못 해준 게 떠올랐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자신 역시 초월에 올랐지만, 축하받을 여유는 없었다· 받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저 아이들은 다를 것이기에 미안함이 밀려들어 왔다·
“그럼 딱 오늘만 울자·”
라온이 유아와 율리우스 사이에 앉아서 두 아이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성인이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직 도움이 필요한 여린 아이일 뿐이었다·
흐아아앙·
유아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대성통곡을 했고, 율리우스는 꾹 참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먼저 잠을 자고 있는 광풍대의 천막에서도 아주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은 리메르의 검을 꼭 잡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생각보다· 아니, 당연하게도 스승님의 빈자리가 많이 허전하네요·’
다들 슬픔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한쪽에서 아직도 리메르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리메르가 광풍대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기에 슬프면서도 기이하게도 기쁘기도 했다·
라온은 광풍대를 위로해주듯 불어오는 청아한 바람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 * *
후우·
라온이 푸르른 세상을 보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대수림· 엘프들의 성지 세이피아를 수호하는 거대한 녹색 대지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짙은 자연의 마나와 천지사방으로 깔려 있는 수풀을 보자, 이곳에 함께 왔던 리메르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때도 바보 같았는데·’
당시 리메르는 본인이 엘프라는 것을 잊고 있다가 처음으로 숲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또 리메르 다운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으음····”
유아가 당시의 리메르에게 정말 엘프냐는 농담을 던졌는데 그녀도 그 일이 떠오른 듯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가?”
마르타가 틈 하나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미로라며 부대주가 없으면 못 가는 거 아니야?”
그녀는 길을 헤매는 건 싫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했으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마중을 나오겠지·”
버렌은 침착하게 답을 해주며 팔짱을 꼈다·
“···냄새가 좋아·”
루난은 숲의 향이 좋다고 말하며 어깨를 떨고 있는 유아를 안아주었다·
“기다리자· 버렌의 말대로 가디언이 오실 테니까·”
라온이 이곳에서 기다리자고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리메르의 유품을 돌려주려고 온 것이기에 괜히 무리해서 숲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려도 대수림에서 나오는 엘프는 없었고, 야생동물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크레인이 너무 늦는다고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네· 스승님도 아니고, 엘프들이 약속을 잊지는 않을 텐데····”
도리안도 이상하다며 턱을 주억였다·
“스승님도 엘프다·”
“아!”
버렌의 말에 도리안이 헉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들어 가보자·”
라온이 손목을 돌리며 다시 대수림 앞으로 다가갔다·
“미로라는데, 길은 어떻게 찾게?”
마르타가 괜찮겠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길을 열 수 있을 것 같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승님이 하셨던 것처럼·’
리메르가 길을 열었던 것을 떠올리며 가루누아의 바람을 불러와 대수림에 펼쳐져 있는 자연의 마나와 이어지는 길을 만들었다·
후우우우욱!
가루누아의 바람이 대수림의 마나 속으로 스며들자, 틈새 없이 솟아오른 수풀들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좌측과 우측으로 밀려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라온은 환영한다는 듯 가늘게 흔들리는 수풀과 나무를 보며 손끝을 떨었다·
리메르가 열어주었던 풍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재연하자 기분이 묘했다·
“뭐, 뭐야!”
크레인이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대주님도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는 엘프의 피도 섞였냐는 듯 턱을 떨었다·
“멍청한 소리!”
마르타가 헛소리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부대주의 향기가 나·”
루난이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스승님을 따라해본 거야·”
리메르의 바람을 이용해서 엘프처럼 숲의 길을 열었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진짜····”
마르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일단 들어가자· 밤이 되기 전에 세이피아에 도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라온이 앞장서서 숲을 나아가려고 할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대수림의 중심 부근에서 하늘을 가릴 듯한 거대한 몸체가 떠올랐다가 황금색 빛이 되어 사라졌다·
라온이 한순간에 밝아진 하늘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드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