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8화
“···유언이요?”
라온은 셰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유언이라니····’
스승님은 본인이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라도 하신 건가?
리메르의 마지막 말이 ‘행복해라·’라고 생각했는데, 따로 유언을 남겼을 줄은 몰랐다·
그가 본인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초월에 오른 녀석이 그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하면 어떻게 해·”
셰릴이 턱을 살짝 올린 채 피식 웃었다·
“이번 임무 전에 준 게 아니라, 한참 전에 준비한 거야·”
“아····”
라온이 종이를 보며 낮은 탄식을 흘렸다·
“그렇다고 이 종이가 누런 게 나 때문은 아니다· 이 망할 놈이 대충 써서 준 거야·”
셰릴은 리메르의 성격을 알지 않냐면서 누런 종이를 손으로 탁탁 털었다·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셰릴 같은 사람이 리메르의 유언장을 대충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먼지 하나 타지 않도록 소중하게 보관했을 테니, 종이는 처음부터 저렇게 누런색이었을 것이다·
-귀때기는 유언마저 더럽게 남기는구나· 정말 한결같은 놈이니라·
라스는 정말 질리는 놈이라며 헛웃음을 흘렸다·
“같이 보시겠습니까?”
라온이 셰릴에게 리메르의 유언장을 받으며 물었다·
“아니·”
셰릴이 칼날처럼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언장을 네게 남긴 것을 보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일 거야· 그놈은 그런 놈이니까·”
그녀는 리메르의 생각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가 남긴 종이를 펼쳤다·
툭·
편지 안에서 사각형으로 접힌 쪽지가 떨어졌다· 쪽지를 주워서 손에 쥔 후 그 내용을 살폈다·
리메르 특유의 가벼운 글씨체가 보이자, 심장이 꽉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게 이 편지가 전해진다면 내가 죽었다는 뜻이겠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게 슬퍼하지는 마라· 엘프에게 죽음은 그리 슬픈 일이 아니야· 세계의 마나가 되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인간에게도 비슷한 말이 있잖아?]
그는 미리 쓴 유언장에도 회자정리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의 죽음에는 큰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유언장인데· 사실 유언으로 남길 말은··· 없어! 생각나는 게 몇 가지 있지만, 말하지 않을란다·]
리메르는 유언장에 유언을 남기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 편지를 쓸 때 짓고 있었을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머리에 그려졌다·
[유언을 남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꼬맹이들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거든· 내 바람은, 내가 가지고 가련다· 그저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는 본인이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웃으라며 웃는 눈매를 형상화한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럼 왜 이 유언장을 셰릴에게 주었는지 궁금할 텐데, 부탁이 있어서야·]
부탁이라는 글귀를 보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바레스 은행에 있는 내 개인 금고에서 돈을 찾아서 과자와 장난감을 좀 사줘· 그걸 가지고 이 밑에 있는 주소로 가면 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가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리메르는 금고의 번호와 금고를 열 수 있는 암호와 함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
라온은 금고의 암호를 외우며 입술을 꾹 씹었다·
[추신 1· 만약 내 시체가 멀쩡하다면 묻지 말고, 태워서 너희들의 바람으로 날려다오· 어디에서도 광풍대를 지켜보고 싶으니까·]
글렌은 리메르를 지그하르트의 묘지에 묻고 싶어 했지만, 본인이 원하고 있으니, 화장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후····”
라온은 짧은 숨을 내쉬고서 두 번째 추신으로 시선을 내렸다·
[추신 2· 편지에 들어 있던 쪽지는 셰릴에게 줘· 그리고 가끔 찾아가서 좀 놀아 줘· 보기보다 약한 녀석이다·]
리메르는 셰릴을 챙겨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유언장을 끝냈다· 유언장이 아니라, 편지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그놈다운 유언이로구나····
라스는 가볍지만,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고 말하며 땅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검대주님·”
라온이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셰릴에게 내밀었다·
“이건 셰릴 님에게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나한테····”
셰릴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다가 결정을 내린 듯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가져갔다·
“으····”
그녀는 쪽지의 첫 문장을 보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을 참으려는 것 같았지만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비밀이야·”
셰릴은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서 쪽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셰릴의 말대로 본인만이 간직하고 싶은 추억과 이야기가 있을 테니, 말해주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구, 궁금한데····
라스가 궁금하다고 말하며 목을 길게 빼서 셰릴의 쪽지를 읽으려고 했다·
‘하지 마·’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라스의 꼬리를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라온· 너는 그 녀석의 의지를 잇고 있으니까· 항상····”
셰릴이 자신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패하지 말라는 거겠지·’
지지 마라, 쓰러지지 말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기에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셰릴의 말은 그것과는 달랐다·
“여유를 가니고 웃고 다녀· 지금처럼 매사에 진지했다가는 제힘도 못 낼 테니까·”
그녀는 리메르처럼 바보는 아니더라도 여유와 웃음을 가지라며 가는 미소를 그려주었다·
“···네· 그럴게요·”
셰릴이 왜 웃으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더·”
셰릴이 떠나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았다·
“복수··· 할 거지?”
“해야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데루스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소멸되더라도 데루스의 계획을 막고 놈의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그때 함께할게·”
셰릴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서 떠났다·
“····”
라온은 가라앉는 새벽을 바라보며 리메르의 유언장을 소중하게 접어 넣었다·
* * *
라온은 아침이 되자마자, 도리안을 데리고 리메르가 알려준 바레스 은행으로 향했다·
“저기 은행에는 왜 가는 거예요?”
도리안은 돈은 전부 본인에게 있다고 말하며 눈을 끔벅였다·
“스승님이 부탁을 남기셨거든·”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며 눈앞에 있는 은행을 가리켰다·
“그, 그런 일을 저 같은 놈이랑 가도 되나요? 저는····”
도리안은 본인에게는 자격이 없다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서 온 거야·”
라온이 도리안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리메르의 죽음으로 광풍대 전체가 힘들어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도리안이다·
자신과 글렌의 조언을 들었음에도 녀석의 우울함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들어가자·”
라온은 도리안을 질질 끌고서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라온 님이시군요!”
입구에 서 있는 경비원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용무를 물었다·
“개인 금고를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금고의 번호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4478-3번입니다·”
리메르의 유언에 적혀 있던 금고의 번호를 말했다·
“4번이군요·”
경비원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서 자신과 도리안을 은행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은행장님· 4478-3번 금고를 찾아오신 손님입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은행장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은행장이라 불린 덩치가 큰 중년인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뜻밖의 비보에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도 리메르와 연을 쌓은 듯 슬픔이 담긴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과 무슨 관계이신지····”
라온이 은행장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일단 가시죠·”
은행장은 가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며 등 뒤에 보이는 회색 금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그의 손이 닿은 금고의 문이 열리고,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차원의 통로가 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좌우로 수없이 많은 문이 걸려 있었고, 그 문에는 4번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곳이 4번 금고가 모여 있는 차원인 것 같았다·
“4번으로 시작하는 금고는 사람이 아니라, 번호와 암호로 이어져 있습니다· 금고를 개방한 본인이 아니라도, 번호와 암호를 알고 있다면 누구나 열 수 있지요·”
은행장은 여러 방식으로 4번 금고가 사용된다고 말하며 옅게 웃었다·
“그럼 4478-3 금고의 암호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4478이라 적혀 있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온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입술만 달싹였다·
“····”
은행장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있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도련님?”
도리안은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라온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후우····”
라온이 땅이 꺼질 듯이 긴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5 연무장·”
눈동자를 바로 세운 채 리메르의 편지에 적혀 있는 금고의 암호를 말해주었다·
“아····”
도리안은 이제야 라온이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린 듯 입술을 떨었다·
“제가 이 은행에 입사했던 첫날 리메르 님과 만났습니다· 운 좋게도 제가 그분의 담당이었죠·”
은행장이 금고에 암호를 입력하며 고개를 저었다·
“물욕이 없는 엘프답게 처음에는 돈만 맡겨두고 아예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비밀번호도 바꾸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였죠· 은행으로서는 최고의 손님이었습니다·”
그는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가느다란 웃음을 그렸다·
“다만 전쟁에서 리메르 님의 수하분들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달랐습니다· 잠적하시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한참 동안 금고의 돈을 바라만 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뒤에는 처음으로 금화 100개를 인출하셨고, 그 이후에도 자주 돈을 가져가셨습니다·”
은행장이 급격한 변화였다고 말하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당시에는 금고의 암호를 수시로 바꾸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고, 날짜이기도 했고 혹은 뭔지 모를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옆에서 보아도 리메르의 감정과 정신이 불안해 보였다며 입술을 씹었다·
“다만 5 연무장의 교관을 맡은 이후에는 달라지셨습니다· 우울해 보였던 눈빛이 사라지고, 여유와 활력을 새롭게 채워 넣으셨더군요· 그때 정했던 5 연무장이라는 암호는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은행장은 보는 사람이 기분 좋은 미소였다고 말하며 금고의 문고리를 잡았다·
“비밀번호 혹은 암호라는 건 본래 자신이 잊을 수 없고, 기억하고 싶어 하는 숫자와 문자로 정하기 마련인데, 리메르 님에게 5 연무장은 그런 의미겠지요·”
은행장은 누구보다도 소중한 가치일 것이라고 읊조리며 금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쿠우우웅!
마법 처리가 된 철문이 열리고, 금화와 은화 그리고 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금고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 돈이 없어서 질질 짜던 리메르의 금고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게 부대주님의···?”
5 연무장이라는 암호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다·
“····”
라온은 잠시 금고 안을 바라보다가 금화 10개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분이 가져가신 것과 비슷하네요·”
은행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금고의 문을 닫았다·
“그럼 다음에 찾아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금고로 향하는 차원을 지우며 고개를 숙였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라온은 은행장에게 마주 인사를 하고서 은행을 나섰다·
“그 돈으로 뭘 하실 거예요?”
“장난감이랑, 과자를 사라고 하더라고·”
“어? 그거 저한테 전부 다 있는····”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본인의 주머니를 사용하고 싶어서 불안해하는 도리안을 데리고 장난감과 과자, 아이스크림을 사서 리메르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지그하르트 성벽 밖에 있는 중형 마을의 외곽이었는데, 낮은 담벼락 안에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건물이 보였다·
‘고아원?’
라온은 문패에 적혀 있는 슬란 고아원이라는 이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로 자식을 두었나 했더니, 리메르가 보낸 곳은 부모를 잃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고아원이었다·
“어?”
“빨간 머리 형 온 거야?”
“아니야! 모르는 금발이야!”
“으아악!”
담벼락을 올려보고 있던 대여섯 살 아이들이 꺄르르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뭐, 뭐죠?”
“···나도 모르겠어·”
라온이 눈을 끔벅이고 있을 때 고아원 건물 안에서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너희들! 손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랬지!”
그는 뒤에 숨어 있는 아이들의 등을 가볍게 쳤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금발이라고만 했는데····”
“그냥 빨간 머리 형 기다린 건데!”
아이들은 잘못하지 않았다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여튼·”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고서 라온에게 다가왔다·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라온 님·”
그는 라온의 눈과 머리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장난감과 과자를 보고서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예· 이곳이 리메르 님이 정기적으로 후원을 해주시는 슬란 고아원입니다·”
중년인은 본인이 이 고아원의 원장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 부대주님이 고아원을 후원했다구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도리안은 이제야 생각났다며 손뼉을 쳤다·
“그 이후에 싹 사라져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헛소문이 아닙니다· 광풍대· 아니, 여러분들이 검사가 되기 한참 전부터 후원해 주셨으니까요· 그것도 사람을 이어서·”
고아원장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사람을 잇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제가 이 고아원에서 크고 있을 때 슬란이라는 지그하르트 검사분이 매주 오셔서 저희와 놀아주고,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슬란 님이 전쟁에서 돌아가신 후에는 리메르 님이 찾아오셔서 슬란 님 대신 아이들과 놀아주고, 여러 가지로 지원을 해 주셨죠·”
그는 고아원을 이렇게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된 이유가 리메르 때문이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그럼 슬란 고아원이라는 이름은····”
“리메르 님이 바꾸셨습니다·”
고아원장은 모두가 동의했던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리다가 이쪽을 바라보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들은 모르는 겁니까?”
“리메르 님은 이름을 말하지 않고, 빨간 머리 형이라고 불렸으니까요· 혹시나 이름을 듣고 슬퍼할 일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고아원장은 본인이 어릴 때도 그랬다며 피식 웃었다·
“물론 사정을 아는 큰 녀석들은 저 아이들에게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구석에 숨어서 울고 있죠· 물론 저도····”
그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
라온이 손을 들어서 두 눈을 가렸다·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리메르의 금고에 그런 돈이 있을 줄도, 고아원에 후원을 하고 있을 줄도 몰랐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양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도 될까요?”
“물론이죠·”
고아원장은 환영이라고 말하며 길을 열어주었다·
라온이 조심스럽게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가져온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같이 먹을래?”
“으····”
아이들은 처음 본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괜찮단다·”
고아원장이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가져갔다·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삼키며 헤헤 웃었다·
“이 아이스크림 무슨 맛이야?”
“형은 이름이 뭐야?”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준 것으로 경계를 풀었는지 조근조근 말을 걸어왔다·
“그거 민트초코· 나는 라···· 아니, 금발 형이라고 불러·”
라온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리메르처럼 금발 형이라는 말을 꺼냈다·
“어? 빨간 머리 형 친구야?”
“빨간 머리 형은 언제 와?”
아이들은 리메르를 기다리고 있는 듯 그가 언제 오는지를 물으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잠시····”
라온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여행을 갔어·”
아마 리메르의 여행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이들의 마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리메르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자, 심장에 얼어붙어 있던 슬픔이 조금은 녹아내린 것 같았다·
“으음····”
도리안 역시 마음이 안정된 듯 입술을 내리누른 채 울음을 참고 잇었다·
그는 이걸 위해서 자신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라온은 청아하게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리메르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그렸다·
* * *
라온이 초월의 검으로 시프를 베어버렸던 던전 앞의 공터·
저벅·
망가지고 깨진 대지 위로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을 두른 듯한 검은 로브의 남자가 피에 젖은 깃털을 주우며 붉은 입술을 씹었다·
“이곳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짙은 분노가 실려 있는 그의 음성에 그림자의 암살자들이 피를 토하듯 전신을 떨었다·
“영혼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모조리 알아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