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6화
“네, 네가····”
라온이 멀린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선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청풍은 현재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지그하르트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이곳에서 멀린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네가 맡긴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복귀했지·”
멀린은 글렌에게 영혼석을 전달해주고 왔다며 싱긋 웃었다·
“어머님이랑 함께 정말 좋아하시더라고· 특히 너를 대견해하셨어·”
그녀는 칭찬을 듣다가 귀가 아플 정도였다며 두 손으로 박수 치는 시늉을 했다·
“그랬구나·”
라온이 멀린에게 고맙다고 말하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임무를 끝낸 후 가문으로 복귀할 때마다 글렌에게 칭찬을 듣는 게 하나의 일상처럼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를 원망하실지도·’
리메르와 아리스를 지키지 못했다는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구역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끄흐으····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멀린 때문에 저 안으로 도망친 것 같았다·
“이야기는 들었어·”
멀린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가면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피부는 햇볕을 한 번도 안 본 것처럼 맑았기에 얼굴을 가리자 잠시 선실이 어두워진 것만 같았다·
“사실 근처에 있던 동물의 몸을 빌려서 배를 쫓아가려고만 했는데, 리메르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본체를 불러왔어·”
멀린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서 자신의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를 살리고 싶어?”
그녀는 리메르를 살리고 싶냐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살릴 수 있어···?”
라온이 멀린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혼이 남아 있다면 가면이나 투구로 만들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멀린이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바라지는 않잖아· 너나, 그 역시·”
“그래· 그렇지····”
라온이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리메르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그의 여유로운 미소와 농땡이를 부리는 모습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멀린의 말대로 가면과 투구의 힘을 빌려 다른 이의 육체에서 되살아나는 건 리메르 본인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특히 시아와 에드가의 일을 겪은 자신은 절대 그 일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멀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건 참는 것과 우는 것뿐이야· 나는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었지만, 너는 많잖아· 우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그녀는 인생의 선배처럼 쓸쓸한 웃음을 그렸다·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한 것처럼·
‘아니, 겪어봤겠지·’
록타가 멀린을 공주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녀도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어본 게 분명했다·
“나나, 록타나 그리 좋은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록타를 부르고, 다른 사람들도 되살리고 싶었는데····”
멀린이 허무함을 두른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와서는 그 모든 게 후회가 돼· 물론 덕분에 너를 만난 건 기쁘지만·”
그녀는 궁금하면 본인의 사정을 말해줄 수도 있다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음····”
궁금하기는 했지만, 멀린의 표정을 보니 쉽게 들을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리메르의 죽음만으로도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기에 지금은 그녀의 사연을 집중해서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을게· 꼭·”
“그래· 그러면 네 이야기라도 내게 털어놔· 분명 편해질 거야·”
멀린은 그 말을 하며 선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으음····
라스가 눈치를 보다가 팔찌에서 머리만 쑥 들어 올렸다·
-광녀는 싫다만 저 말은 맞느니라· 속을 풀면 조금은 편해질 것이니라·
라스는 멀린이 아니라 본인에게 털어놔도 된다며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치, 친구는 애매하지만, 본왕의 그릇으로서 조금은 들어 주겠느니라!
“자·”
-자!
멀린과 라스는 각자 자신에게 속을 털어놓으라며 두 팔을 펼쳤다·
“그으····”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말해줄게· 지금은 나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저 둘을 보니, 웃고 싶지 않았음에도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둘 다 자신에게 편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 편할 때 해줘·”
멀린은 이것도 기다리겠다며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본왕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라스도 밤낮없이 말하라고 외치며 멀린을 노려보았다· 겁을 내면서도 경쟁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리스· 아니, 이모는 일어났어?”
“이모님? 모르는데?”
멀린은 전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음? 너 다른 사람들한테 듣고 온 거 아니야?”
“몰래 들었지· 다만 동물의 모습이어서 바로 이 안으로 본체를 소환했어·”
그녀는 본인이 이곳에 있는 건 아무도 모를 거라며 싱긋 웃었다·
-봐, 봐라! 저러니까 광녀지! 이제는 말하고 다녀도 될 텐데, 숨어다니는 게 일상이잖느냐!
라스는 저래서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며 턱을 떨었다·
‘음····’
저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만 멀린의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아니, 마왕이 한 명 있었다·
“러스트는 어디에 있어?”
라온이 주변을 둘러보며 눈매를 좁혔다· 현재 자신이 정상이 아니었지만, 러스트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망할 길치녀····”
멀린이 화가 난다는 듯 이를 갈았다· 길치녀라고 하는 것을 보니 대충 답을 알 것 같았다·
“할아버님께 영혼석을 드린 후에 너한테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제는 길을 알겠다고 먼저 간다고 하더니, 사라졌어!”
“안 잡았어?”
“잡았지! 근데 길을 외웠다고 저 혼자 날아갔다고!”
그녀는 길치 주제에 자신감만 넘친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본왕이 말하지 않았느냐!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스토커 주제에 길치고, 본인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고!
녀석은 이상한 속성이 겹쳤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나 도움이 안 되느니라!
“방해만 돼!”
멀린과 러스트는 서로 말이 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이좋게 러스트를 욕했다·
“뭐, 러스트의 실력이면 어디서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러스트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없기에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후우····”
라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진혼검을 챙겼다·
리메르의 영혼이 아직 검에 남아 있을 수도 있기에 두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나가게?”
“이모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거든·”
아리스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상태일 것이다·
평소에는 글렌보다도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시프의 앞에서는 누구보다 약해졌기에 더 걱정되었다·
라온이 진혼검을 꽉 쥔 채 선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두 명의 초월자를 베었습니다·]
[천 년 만에 천족을 살해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위업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새로운 특성····]
[새로운 칭호····]
이번에도 메시지를 다 보지 않고, 밀어버렸다·
-헉!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이···· 음?
라스가 시스템을 욕하다 말고 자신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안 보는 것이냐?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
-그렇군····
녀석은 이해한다는 듯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를 놀릴 수 있을 때 보려고·’
-얌마!
라온은 라스의 외침을 뒤로 하고, 선실을 나섰다· 밤이었기에 갑판에 있는 사람은 소수의 선원뿐이었다·
아리스가 있을 병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갑판의 끝에 서 있던 도리안이 다가왔다·
“일어나셨어요?”
도리안은 몸은 괜찮으냐고 물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모님은 일어나셨어?”
라온은 도리안을 보며 바로 아리스의 상태를 물었다·
“조금 전에 병실에 다녀왔는데,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도리안은 라바윈이 아리스의 병실을 지키고 있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아리스가 일어나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으니까·
“다른 애들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들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어요·”
도리안은 청풍의 선원들이 대신 경계를 서주고 있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는?”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사실 이 녀석이 제일 피곤할 텐데, 참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저는 괜찮아요· 누워도 잠이 안 와서요·”
도리안은 그래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네·”
라온이 난간에 팔을 걸친 채 곱게 찰랑이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니, 쓸 수밖에 없겠지· 나도 스승님이 계속 생각나니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면 흑검에 가슴이 뚫린 채로도 웃고 있는 리메르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이 정도이니, 처음부터 모든 것을 본 도리안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네····”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도 계속 그 모습이 떠올라요· 제가 대신 목숨을 던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했는데····”
“의미 없어·”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랜드 마스터도 낄 수 없는 싸움이었어· 너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어요····”
도리안이 난간에 머리를 묻은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울보 주제에 계속 참으면서 본인의 탓만 하더니 이제야 감정의 뚝을 터트린 것 같았다·
“흐으윽····”
“괜찮아· 그 사람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으니까·”
라온은 마지막까지 웃었던 리메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도리안의 머리를 두드려주었다· 스승이 그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후우욱·
두 사람을 위로라도 해주듯 바다 같지 않은 청아한 바람이 잠시 청풍의 뱃머리를 머물렀다가 떠나갔다·
* * *
청풍이 지그하르트에 가장 가까운 북해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라바윈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리스와 리메르를 두 대의 마차에 나눠서 태운 후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해적질은 이제 못할 것 같아서요·”
그는 청풍의 선원 대부분이 본래 지그하르트의 검사였고, 남은 인원들도 전쟁에 참여한 전적이 있으니, 함께 돌아가도 문제없을 거라며 라온의 허락을 구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타고 지그하르트로 향해 나아갔다·
던전에서 청풍으로 돌아갈 때처럼 웃으며 수다를 떠는 일은 없었다·
광풍대도, 라바윈과 청풍의 선원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며 지그하르트로 걸어갔다·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의 끝에서 눈 쌓인 지그하르트의 성벽이 모두의 눈동자에 비쳤다·
“····”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성벽을 보며 입술을 꾹 씹었다·
언제나 반가웠던 회색 성벽이 너무도 높고, 무겁게 느껴졌다·
저 성벽이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미 리메르에 대한 소식은 전해졌겠지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에 겁이 나서 손이 떨렸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검사들도 두려움과 걱정이 차오른 눈빛으로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걱정이 되고 무서웠지만, 이곳에 머물러 성벽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리메르를 쉬게 하고 싶었다·
“가자·”
라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지그하르트의 정문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신분을 확인한 후 정문을 열어주지만, 오늘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그하르트의 정문이 열리고 외총관 일리운과 검사들이 걸어 나왔다·
챠아아앙!
그들은 검은 제복을 입은 채 가슴 앞에 검을 거꾸로 세워 지그하르트의 검례를 취했다·
“····”
라온은 어금니를 지그시 씹은 채 본관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향해 마차를 몰았다·
대로의 좌측과 우측으로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이 줄을 지어서 서 있었는데, 그들 역시 자신들을 향해 정중하면서도 무거운 검례를 보내왔다·
지그하르트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한 이를 위한 검사들만의 인사였다·
“흐으윽····”
“부대주님·”
“왜 하필!”
등 뒤에서 광풍대 검사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자신은 대주다· 감정을 내리누르며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캬아아앙!
철전대, 공검대, 전검대· 그리고 중무전, 현무전, 진무전의 검사들까지 나와서 리메르에 향한 검례를 취했다·
평소에 으르렁거리면서 다투던 이들까지 한 결의 구김 없이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자, 더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리메르와 아리스를 실은 두 대의 마차와 함께 본관의 앞에 서자, 실비아와 에드가, 도괴, 페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알현실 안에서 기다리던 글렌과 로엔마저 가주전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서 우울함과 슬픔이 느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를 보자, 가슴이 타는 듯이 아려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코끝이 간지러웠다·
터억·
라온이 떨리는 다리로 말에서 내렸다·
무서웠다· 가고 싶지 않았다·
리메르를 죽게 만든 자신을 원망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저들의 앞에 서면 정말 리메르의 죽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라온은 길게 숨을 내쉬고서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가주님·”
끝까지 참아내기 위해서· 원망을 들어도 견뎌내기 위해서 전신에 힘을 준 채 글렌의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전부 제가 판단을 잘못 내려서····”
글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려는데, 그는 자신의 몸을 잡고 그대로 끌어 안아주었다·
“고생했다· 그리고····”
글렌은 자신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뼈를 씹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미안하구나·”
라온은 두 손으로 글렌의 장포를 움켜쥔 채 참고 있던 눈물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