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3화
터어어엉!
라온은 숨을 쉴 새도 없이 달려가 쓰러지는 리메르를 붙잡았다·
“부대주님!”
리메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 청량했던 호흡이 들리지 않았고, 바람의 향기도 지워져 있었다·
“제발!”
검게 죽어가는 리메르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을 쏟아냈다·
하지만 아리스에게 주었던 양이 너무 많았기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마르타!”
라온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마르타의 이름을 불렀다·
“제기랄! 리메르!”
마르타가 악을 내지르며 달려와 리메르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오러를 밀어 넣었지만, 리메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부, 부대주님!”
“아아아악!
버렌과 루난도 땅을 기듯이 뛰어나와 리메르의 이름을 외쳤다·
“부대주!”
“교관님!”
“제, 제발 좀 일어나요!”
피로 범벅이 된 도리안과 광풍대의 모두가 달려가서 리메르를 붙잡았지만, 그의 눈꺼풀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왜 광검이라고 불리는지 알겠더군·”
시프가 흑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입맛을 다셨다·
“저런 버러지들을 살리려고 초월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버리다니, 그 이름만큼이나 미친놈이었어·”
그는 리메르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줘·”
라온은 차가워지는 리메르의 손을 잡아주고서 몸을 일으켰다·
리메르를 조롱하고 있는 시프를 노려보며 손아귀에 피가 흐르도록 신검과 마검을 말아쥐었다·
‘다····’
전부 다 내 탓이다·
이 던전의 이상한 점을 먼저 파악했다면·
시프를 믿지 않았다면·
바르디엘의 결계에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면·
전력으로 빛의 결계를 뚫어내고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나왔다면·
같이 죽을지언정 리메르 혼자 쓸쓸히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내 탓이었다·
“저놈·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칭하더군· 거짓된 검계를 사용하고, 가짜 팔까지 달고서 인간이 되려는 게 우습지 않아?”
시프는 뚫린 입으로 지랄맞은 말을 주절거렸다·
“하긴 뭐, 상관없지· 곧 천족이 될 내 입장에서는 인간이든, 엘프든 벌레일 뿐이니까·”
저놈의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힘이····’
힘이 필요해·
지금 자신의 무력으로는 시프 하나도 죽일 수도 없다·
바르디엘과 시프를 처절하게 죽여버리기 위해서는 강대한 힘이 필요했다·
고오오오오!
분노를· 영혼 속에 잠들어 있는 마왕의 감정을 모조리 끌어왔다·
내가 지워져도 좋으니, 복수하기 위한 힘을· 저 쓰레기들을 처절하게 죽여버릴 수 있는 힘을 원했다·
-안 되느니라!
라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자신의 시야를 막았다·
-지금은 본왕이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느니라! 본왕의 폭주가 아니라, 네놈이 폭주한다고! 정신 차리거라!
녀석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며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아악! 부대주님!”
‘미안해· 라스····’
하지만 도리안의 절규와 시프의 웃음을 보자, 마지막까지 참고 있던 이성이 깨져나갔다·
빠직!
뇌리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친 분노의 감정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끼이이익····
새하얀 서리가 심장에 스며들며 여덟 개의 불의 고리가 녹이 슨 것처럼 삐걱거리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신검의 불길이 가라앉고, 마검의 서리가 폭발할 것처럼 일렁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전신의 마나 회로에 냉기가 차올라 눈앞이 하얗게 굳어졌다·
쿠구구구구!
언제나 호흡을 맞추던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균형이 깨지고, 세 개의 단전이 오싹할 정도의 냉기로 채워졌다·
쿠와아아아아!
라온은 불이 꺼진 신검을 버리고, 마검만을 들어 올렸다· 이마 위로 푸른 뿔이 돋아난 그의 등 뒤에서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서리의 폭풍이 치솟았다·
“복수를 위해서 마족의 힘을 받아들인 건가?”
시프는 재밌겠다는 듯 혀로 붉은 입술을 핥았다·
“죽여주마····”
라온이 겨울의 중심에 선듯 허연 김을 내뱉었다·
서리의 힘이 폭주한 듯 검사의 자세가 아니라, 짐승처럼 패악적인 투로로 검을 찔러넣었다·
쿠와아아아아앙!
한 번의 검격에 공동의 절반이 얼어버리고, 시프가 힘에서 밀린 듯 벽으로 튕겨 나갔다· 무시무시한 힘의 발현이었다·
“다 같이 죽자는 거냐! 괜히 광검의 제자가 아니로군!”
시프가 눈동자에 검은 핏줄을 세운 채 흑검을 치켜들었다· 공간을 가르는 참격이 라온의 가슴 앞에서 솟아올랐다·
퍼어어어억!
라온은 피하지 않았다· 서로 죽고 죽이자는 듯 서리의 갑주로 공간참을 견디며 시프를 향해 더 사나운 검격을 내리쳤다·
쩌저저저저정!
서리의 참격과 공간검이 격돌하며 새하얗게 얼어붙은 균열이 벌어졌다가 그대로 폭발했다·
사방에서 폭음이 터지며 공동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힘 하나는 초월 이상이로구나·”
시프가 서리가 스며든 오른팔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후우우우웅!
라온은 시프가 물러서기 위해서 뒤로 보법을 밟을 때 마검을 역수로 들어서 땅에 내리꽂았다·
마검의 칼날이 터질 것처럼 번뜩이자, 시프가 도망치기 위해서 열어놓은 공간이 얼어붙고, 그의 주변으로 냉기로 이루어진 폭풍이 치솟았다· 서리로 만들어낸 감옥이었다·
치이이잉!
라온이 눈동자에서 푸른 광망을 일으키며 시프에게 돌진했다·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고 할 때 우측에서 쏘아진 허연 빛살이 그의 허리와 허벅지를 꿰뚫었다·
“크아아아아!”
라온은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시프를 향해 마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다만 중간에 힘과 속도가 빠졌기에 시프는 어렵지 않게 검격 막아내고, 좌측으로 빠져나갔다·
“저놈 뭐야·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시프는 서리가 차오른 흑검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가능하다·”
바르디엘이 라온을 보며 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저 인간에게 힘을 빌려준 마족은 분노의 군주니까·”
그는 좋지 않다는 듯 눈썹을 깊게 내렸다·
“분노의 군주?”
시프가 바르디엘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마계를 지배하는 군주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괴물이다· 왜 빛이 얼어붙었는지 알 것 같군·”
바르디엘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합공을 해야 한다· 초월자는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경계를 해야 해·”
“흐음····”
시프가 점점 더 강한 냉기를 뿜어내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실험 한번 해볼까?”
“실험?”
“기다리고 있어봐·”
그는 라온이 일으킨 냉기를 피한 후 리메르의 주변에 모여 있는 광풍대를 향해 공간참을 쏘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
공간을 뚫어버리고 나아간 참격이 광풍대 검사들의 목을 가르려는 순간 시프에게 달려들던 라온이 다급히 뒤로 물러서서 얼음의 벽을 세웠다·
콰아아아앙!
다행히 시프의 기습에서 광풍대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냉기의 방향을 급격하게 뒤틀었기 때문인지 라온의 입술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크하하하하하!”
시프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에도 동료를 먼저 챙긴다고? 멍청한 점까지 닮았을 줄이야!”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음····”
바르디엘도 라온에 행동에 놀란 듯 눈매를 찌푸렸다·
“이래서 인간이 버러지라는 거야· 정에 이끌려서는 큰 일을 할 수가 없지·”
시프가 한심하다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그는 흑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바르디엘을 바라보았다·
“그래· 합공을 하도록 하지·”
바르디엘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의 손아귀 안쪽에서 신력을 응집시킨 순백의 광휘가 타올랐다·
쩌어어어어어억!
시프가 내리치는 검격이 공동의 마나를 비틀어 쪼갠다·
초월에 이른 공간검· 허공을 찢어발기는 듯한 균열과 함께 사방에서 참격이 몰아쳤다·
‘나는····’
라온은 광풍대와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참격과 빛의 물결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건가·’
스승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버렸지만, 동료들이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무엇 하나 놓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자신을 저주하며 쌓아 올린 냉기를 폭발시켰다·
‘미안해요 부대주님· 미안해 라스·’
라온은 스스로가 아닌 광풍대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치켜들었다·
검계현신 개벽·
마검의 칼날 위로 황혼을 보는 듯한 보랏빛 광채가 솟구친다·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동료를 지키기 위한 검격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천족의 빛 그리고 공간을 찢어발기는 참격과 부딪쳤다·
쿠와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터지며 공동의 바닥이 내려앉고, 천장과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규격을 넘어선 충격에 던전 자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커헉!”
라온이 검게 죽은 피를 토하며 무너진 땅속에 처박혔다·
다만 그가 만들어낸 서리의 벽 안에 있는 광풍대는 자그마한 상처 하나도 입지 않았다·
“라온!”
“일어나!”
광풍대가 라온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는 죽은 듯이 눈을 뜨지 않았다·
“죽었나? 아니, 확인을····”
“나가야 한다!”
시프가 라온의 상태를 확인하자고 할 때 바르디엘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헛소리야! 시체라도 데리고 가야지!”
“이 던전의 시간축은 외부와 다르다! 던전이 붕괴하기 전에 나가지 않으면 밖에 나갔을 때 몇 년이 지나 있을 수도 있다!”
바르디엘은 어차피 이 던전에 묻혀서 죽게 될 놈들이라며 나가야한다고 외쳤다·
“쯧·”
시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리 빼냈던 아리스를 어깨에 걸친 후 얼음에 갇혀 있는 광풍대에게 손짓을 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어차피 죽을 테니까·”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바르디엘과 함께 무너지는 공동을 빠져나갔다·
“허억····”
라온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마 남지 않은 냉기로 광풍대가 다치지 않도록 서리의 벽을 더 두껍게 쌓아준 후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부대주님·’
광풍대 녀석들 사이에서 리메르의 얼굴이 보였다· 쓰러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그를 보자 죽고 싶을만큼 속이 아려왔다·
‘미안해요····’
라온은 리메르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가 죽은 듯 가느다란 숨을 내쉴 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진혼검이 청아한 녹색 빛으로 번쩍였다·
* * *
다시 눈을 뜨자, 나는 심상의 세계에 와 있었다·
자주 와서 이제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열기와 냉기로 양분하고 있던 대지가 허옇게 얼어붙어 있었고, 검들은 서리가 박힌 채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여덟 개의 불의 고리 역시 회전을 멈춘 채 부서진 듯 아래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자신의 마음처럼 심상의 세계 역시 얼어붙어 있었다·
“정말 버러지 같군·”
얼어붙은 심상의 세계에 주저앉은 채 픽 웃었다·
스승의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마왕의 권능에 몸을 맡겼건만, 또 동료를 희생할 용기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꿈틀거리기만 하는 지렁이가 된 것 같았다·
트윽·
라온이 얼어붙은 채 땅에 박혀 있는 검 하나를 뽑았다·
“못난 주인이라 미안하다·”
초대 가주의 이기어검을 형상화한 듯한 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할아버지라면·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단호하고, 강한 검사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 궁금했다·
“아니, 이제는 상관없나·”
자신은 이미 망가졌다· 만약 살아남는다고 해도 복수를 하려면 정말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잃은 게 너무 많군·’
리메르는 죽었고, 아리스는 생사불명이며, 시프는 반대로 힘과 정보를 얻었다· 이득은 없고 오직 손해뿐인 결과에 가슴이 답답했다·
“전부 다 내 탓····”
“또 자신의 탓만 하고 있냐?”
청아한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
라온이 짝다리로 서 있는 적발의 엘프를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교, 교관님?”
리메르·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가 자신의 심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너무 놀라서 부대주가 아니라, 예전에 불렀던 호칭을 꺼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여기에····”
“몰라·”
리메르는 본인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항상 말하지만 너는 머리를 너무 많이 써· 가끔은····”
그가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이 심장으로 생각을 하라고·”
“아····”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가짜가 아니다· 진짜 리메르였다·
“부대주님· 저는····”
“봤다·”
리메르가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너다운 모습이었어·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을 챙겨가려는 욕심 많은 라온 지그하르트였지·”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이해가 간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본인을 가리켰다·
“나도 비슷했거든·”
그는 도리안과 아리스를 구하느라 만싱창이가 되었다며 키득거렸다·
“부대주님····”
“그 호칭은 이제 됐어· 스승이라고나 불러· 제자를 상사로 모시는 것도 지겨우니까·”
“아, 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네 심상이야? 역시나 재미없네·”
리메르는 어떻게 심상의 세계에 검밖에 없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나이면 연애도 하고, 친구랑 밤새 술도 마시고, 여행도 좀 다녀야지·”
그는 안타깝다고 말하며 혀를 찼다·
“죄송····”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좀 알겠어·”
리메르가 허공에 있는 불의 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유라뇨?”
“네 검술과 오러는 이미 초월자 급인데, 경지는 계속 그랜드 마스터였잖아· 오러가 초월급이고, 검술이 모자라면 이해가 되는데, 그게 아님에도 초월의 벽을 못 넘고 있는 게 이상했거든·”
그는 라온을 보며 장난기 있게 눈매를 좁혔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음····”
라온은 리메르의 말이 아직 이해되지 않았기에 대답을 하지 않고 낮은 신음만 흘렸다·
“처음 보았을 때의 너는 백지 같았어· 무학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 신기하게도 분노는 깊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슬픔, 기쁨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
그는 재능은 있었지만, 감정이 망가진 것 같았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다행히 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인 덕분에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도 알게 되었지만, 네게 부족한 게 하나 있더구나·”
“그게 무슨····”
“슬픔·”
리메르가 라온을 향해 검지를 들어 올렸다·
“희노애락 중 슬픔을 몰랐어· 너는 어릴 때는 냉정했지만, 점점 감정적으로 변하더구나· 아마 인간적인 감정들이 네 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야·”
“아····”
그의 말대로다· 자신의 성장에는 인간의 감정만이 아니라, 마왕들의 감정도 영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슬픔은 몰랐어· 아니, 슬픔을 분노로 받아들였지·”
리메르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다· 슬픔은 슬픔으로 받아들여· 다른 감정으로 바꿔서 억지로 견딜 필요는 없다·”
그는 환희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온· 너는 그 누구도 아닌 라온 지그하르트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본질로 돌아가라·”
리메르가 그 말을 하며 물러나자,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갔다·
“스승님!”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그는 안개처럼 지워지기 시작하는 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다시 보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리메르는 광풍대에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 그리고 그 망할 새끼는 무조건 죽여! 알지? 내가 이 말 안 하고 가려고 했는데! 너까지 괴롭히는 꼴을 보니까! 못 참겠····”
그는 꼭 시프를 죽이라고 외치다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다웠다·
“하하····”
라온이 웃었다· 억지로 느끼지 않으려고 했던 감정을 받아들이자, 눈물이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슬픔을 받아들이되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쿠우우웅!
다만 가슴을 찢어버리는 듯한 영혼의 통증은 그대로· 아니, 전보다 더 심해졌다· 슬픔에서 이어지는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지금 내게 전해지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심상의 세계가 진동하며 천지를 얼어붙게 만든 냉기의 끝자락에서 황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잔불처럼 고요히 솟아오르는 불길은 녹색의 바람을 타고 천지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화아아아아!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아내리고, 서리에 잠식되었던 검들이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결국 천공까지 닿은 금색의 불꽃은 냉기가 차오른 여덟 개의 불의 고리를 녹이고, 슬픔이라는 심상으로 벼린 아홉 번째 고리를 이었다·
전장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회전하는 불꽃의 고리가 공명하면 라온의 영혼을 일깨우는 포효를 터트렸다·
우오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