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2화
“허억····”
리메르가 허연 숨을 내뱉으며 시프가 쏘아낸 공간검을 쳐냈다·
검을 막은 것만으로 쇳덩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팔이 아려 오고, 내장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그걸 계속 막으려고?”
시프가 리메르를 굽어보며 짧게 혀를 찼다·
“피하면 편할 텐데?”
그는 왜 가만히 서서 맞고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 진짜 빌어먹을 놈이네·”
리메르가 입에서 흘러 내려오는 피를 소매로 훔치며 이를 갈았다·
“왜?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당신 정도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잖아·”
시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설마 저 뒤에 있는 짐덩어리들 때문에?”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서 리메르의 뒤에 있는 도리안과 아리스를 가리켰다·
“둘 다 도움 안 되는 것들이잖아· 하나는 아예 쓸모없는 버러지고, 어머니는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내게 힘을 주고 계시거든·”
시프는 턱을 치켜든 채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냥 버려· 편해지자고·”
그는 다시 제대로 싸워보자며 흑검을 겨눴다·
“말은 잘하는군·”
리메르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무조건 이쪽으로 공간검을 쏴대면서·”
시프는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이 아니라, 아리스와 도리안을 향해서만 참격을 날렸다·
약점을 잡아놓고서 저렇게 주절거리는 꼴을 보니, 목을 분지르고 싶었다·
“그럼 계속 막아보든가·”
시프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며 천천히 흑검을 내질렀다·
피아아아아앙!
느릿하게 나아가는 흑검과 달리 놈이 일으킨 참격은 자신의 눈앞에서 튀어나와 섬뜩한 살의를 드러냈다·
치이이이잉!
리메르는 나뭇잎 검을 사선으로 비틀어 시프가 쏘아낸 공간검을 좌측 하단으로 흘렸다·
콰아아아아앙!
시프의 참격에 닿은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파여 나가고, 공동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쉽지 않군·’
이전에 시프가 전력으로 펼쳐냈던 공간참을 막아내느라, 오른 어깨에 달아놓은 인공 팔에 균열이 생겨서 손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상도 심해진 상태라 인공 단전 역시 제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 부대주님····”
도리안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많이 겪어봤거든·”
리메르가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래· 많이 겪어봤지·’
천재로 알려진 것과 달리, 자신은 정말 많은 패배를 겪었다·
‘내 첫 번째 패배가 언제였더라····’
리메르는 다시 쏘아져 오는 시프의 공간검을 보며 흐릿한 눈을 떴다·
‘그래· 그 인간이지····’
* * *
내가 다른 엘프들과 그리 다르지 않던 시기·
세이피아에 오랜만에 인간 손님이 찾아왔었다·
“오늘 성지에 들어온 인간 중에 지그하르트의 직계가 있더군· 글렌 지그하르트· 현 가주의 아들이라고 한다·”
에리안은 눈빛부터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고 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르다라····”
다른 종족에게 흥미가 없는 에리안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져서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할아버지의 집 앞에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문이 열리고 숲을 비추는 햇살처럼 화려한 금발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젊은 나이임에도 이미 완성된 무인의 기도가 느껴졌다· 에리안의 말대로 살벌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고요히 가라앉은 붉은 눈· 격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눈동자를 마주하자, 나 자신도 몰랐던 호승심이 솟아올랐다·
궁금해졌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내 할 일에 집중하겠지만, 저 남자에게서 피어나는 존재감을 무력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숲이 조용해지는 저녁 시간에 글렌의 숙소를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오?”
글렌은 당시 젊은 나이였음에도 노인네 같은 말투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었다·
“세이피아의 가디언 리메르라고 합니다·”
당시의 나는 수호자의 손자이자, 세이피아의 가디언이었기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자신을 소개했다·
“대련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좋소·”
글렌은 자그마한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수호자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들었기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검을 몇 번 나누기도 전에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좋은 대련이었소·”
글렌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숙소로 들어갔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던 검술의 세계가 깨져버린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도, 밥을 먹어도, 외부 경계를 설 때도 계속 글렌의 패도적인 검술이 머리에 아른거렸다·
다시 보고 싶고, 또 싸워보고 싶었다·
다음 날 저녁 다시 글렌을 찾아가 대련을 신청했다·
“좋소·”
글렌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시원하게 대련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또 졌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
머리를 부여잡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글렌이 세이피아를 떠나는 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가주님의 얼굴이 참 볼 만했지·’
요즘에야 라온 때문에 글렌이 당황하는 모습을 자주 보지만, 그의 놀란 표정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글렌은 내 의지와 행동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돌격대의 수장을 맡겨주었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돌격대? 처음 보는 녀석을 뭘 믿고요?”
셰릴· 얼굴만 곱상한 왈가닥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만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딱 보니까 허우대만 멀쩡하지, 일을 제대로 할 관상이 아니라구요!”
그녀는 지금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시끄러운 인간이로군·”
내가 셰릴에게 내뱉은 첫 번째 말이었다·
“뭐?”
“말로 하지 말고, 검으로 말해보든가·”
무시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바로 셰릴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졌다····
“앞으로 내 앞에서는 기어 다녀· 돌격대를 맡을 생각도 말고·”
셰릴은 콧방귀를 뀌고서 대련장을 떠났다· 나중에서야 느낀 건데, 셰릴은 이때부터 나를 엘프가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배려가 깊지만, 성질은 고약한 녀석이었다·
“대련 경험이 너무 적어·”
글렌은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며 작게 웃었다·
“하루에 한 번씩 셰릴과 대련을 하도록·”
그의 말대로 매일 셰릴을 찾아가서 대련을 신청했고, 매일 패했다·
다만 글렌의 말대로 대련 경험이 문제였는지 조금씩 따라잡게 되었고, 6개월이 지났을 때쯤 처음으로 셰릴을 꺾었다·
“너 이씨····”
셰릴은 분한 듯 코를 훌쩍이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대련장에서 도망쳤다·
“나중에 보자· 내일은 절대 안 져!”
귀여웠다· 그렇게 잔소리를 퍼붓던 인간에게 저런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제 돌격대의 장을 맡아도 되겠군·”
글렌이 수고했다는 듯 어깨를 쳐주었다· 내가 강해졌다는 성취감 이상으로 가슴이 따스해졌다·
아직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다음 날·
글렌은 자신의 밑에 소속될 검사들을 보내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슬란이라고 합니다!”
성격이 쾌활해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가 고개를 숙여왔다·
“유세르····”
비쩍 말라서 눈 밑이 검은 여성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이름만 말했다·
“쿠레오 지그하르트입니다·”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은 과할 정도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해 왔다·
“드레빈이라고 합니다· 돈에 관한 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검사치고는 조금 살집이 있는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누구를 봐도, 어디를 봐도 비슷한 엘프들과 달리 하나 같이 개성이 넘치는 인간들이었다·
다만 글렌, 셰릴과 달리 관계를 쌓기는 쉽지 않았다·
상사와 수하· 가르침과 명령을 내리고, 받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글렌이 가주가 된 이후로도 계속 함께 했기에 다행히 손발은 잘 맞았고,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돌격대 단독 임무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 노숙을 할 때 슬란이 말문을 텄다·
“대주님은 혹시 꿈 같은 게 있으십니까?”
슬란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딱히 꿈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초월에 오르는 것은 꿈이라기보다는 목표였고, 글렌은 큰 도움을 주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가주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그럼 제 이야기나 해볼까요?”
슬렌이 웃으며 모닥불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저는 불쌍한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인처럼 힘들게 크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라며 고아원과 보육원에 급여를 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은 금액이 아니라, 번 돈을 그대로 가져다 박잖아!”
드레빈이 슬란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너는 돈을 쌓아두기만 하잖아· 그보다는 낫지·”
슬란이 드레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돈을 왜 모으는 거지?”
돈에 아무런 가치도 못 느꼈기에 순수하게 궁금증이 일었다·
“돈은 힘이니까요· 있는 사람은 몰라요· 돈이 없는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는····”
드레빈은 어릴 때 워낙에 가난하게 살아서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되는 게 꿈이라며 팔을 휘저었다·
“저는 도박을 원 없이 하고 싶어요!”
지그하르트의 직계인 쿠레오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비볐다·
“패를 쪼일 때의 감각은 전투로도 충족이 안 되거든요·”
그는 복귀해서 도박장에 가는 게 기대된다며 입맛을 다셨다·
“너는 맨날 지잖아·”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긴장감이 좋은 거라고!”
쿠레오는 도박 자체가 자신을 살아있게 만든다며 웃었다·
“그건 네가 부자라 그런 거야· 돈이 많으니까 도박이 즐겁지·”
드레빈은 쿠레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유세르· 너는?”
슬란이 벌써 졸기 시작한 유세르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자고 싶어····”
유세르는 살짝 눈꺼풀만 들어 올린 채 고개를 저었다·
“돌로 태어나서 평생 자는 게 꿈이야····”
그녀는 꿈을 꾸면서도 꿈을 꾸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사실··· 저는 애들을 좀 키워보고 싶기도 해요·”
슬란이 모닥불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해서 애를 낳겠다는 거야?”
쿠레오는 평범하다며 혀를 찼다·
“아니, 스승이 되어보고 싶다고· 그냥 교관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스승·”
슬란이 리메르를 보며 가늘게 웃었다·
“대주님이 우리를 세세하게 챙겨줄 때처럼 저도 아이들을 훌륭한 검사로 키워보고 싶어요·”
“그러냐····”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기부, 물욕, 도박, 게으름· 전부 자신과는 상관없는 가치들이었으니까·
10년이 지났음에도 수하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는 게 느껴졌다·
“대주님· 이번 임무가 끝나면 저랑 같이 고아원에 가보실래요? 아이들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니, 분명 환영받을 거예요·”
“고아원처럼 지루한 곳 말고, 저랑 도박장에 가시죠? 제가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슬란과 쿠레오는 고아원과 도박장에 가자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그러지 말고, 돈이 있으면 저한테 맡기세요· 1년에 2배로 불려 드릴게요·”
드레빈은 이 와중에도 돈 이야기를 하며 손을 싹싹 비볐다·
“····”
유세르는 무엇도 관심 없다는 듯 코를 고로롱 골며 잠에 빠졌다·
“기회가 된다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루에서 수십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기에 임무 외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고, 나와 수하들은 글렌과 함께 성검련과의 전쟁에 나섰다·
언제나 같을 거라고 생각한 그 날·
슬란이 고아원의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유세르가 침낭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쿠레오가 카드를 만지고, 드레빈이 돈을 세는 언제나와 같은 그 날·
대원 모두가 죽고, 나는 단전이 깨진 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지그하르트에 있었고, 수하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엘프에게 있어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리 슬픈 일이 아니다·
죽은 이는 이 세계의 마나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되니까·
하지만 내 영혼이 인간의 삶에 녹아내렸기 때문인지 칼에 찔린 듯 속이 미어지고, 가슴이 아려 왔다·
한동안 폐인처럼 살며 방에만 박혀 있을 때 셰릴이 숙소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우! 먼지 봐라!”
셰릴은 더럽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야! 청소하게 나가!”
그녀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청소를 하겠다며 나를 내쫓았다·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숙소를 벗어났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번화가로 나오게 되었고, 화려한 간판을 보게 되었다· 쿠레오가 자주 간다고 말했던 도박장이었다·
주머니에 딱 하나 남이 있던 금화를 가지고 도박장으로 들어갔다·
첫판에 모두 잃었다· 쿠레오가 패를 쪼는 맛이 좋다고 했는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걸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음날에는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돈을 보러 은행에 갔다· 내 창구에 산처럼 쌓여 있는 금화· 드레빈이라면 좋아했겠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금화 100개를 가지고, 슬란이 주기적으로 기부를 한다는 고아원을 찾아갔다·
몇몇 아이들이 까치발을 들고, 담장 밖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슬란의 죽음을 모르기에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이 되었을 때 금화와 슬란이 남긴 듯한 편지를 두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마지막으로 셰릴이 청소해준 방에 들어가서 유세르처럼 며칠 동안 잠만 자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고,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기부, 게으름, 돈, 도박· 무엇 하나 와 닿는 게 없었다· 그 녀석들과 나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같이 그 행동을 반복했다· 돈을 보고, 기부를 하고, 도박을 하고, 죽은 듯 잠을 잤다·
언제부터일까· 쌓여 있는 돈을 기분이 좋았고, 도박판에서 패를 쪼이는 것만으로 심장이 쫀득했고, 기부할 때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뿌듯했고, 잠을 잘수록 행복해졌다·
내가 엘프에서 사람이 되던 날·
내가 수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던 날·
처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슬란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관이 아닌, 진짜 스승이 되어보고 싶다고 했었지·’
슬란은 나를 보고 깨닫기라도 한 듯 진짜 스승이 되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정복을 갖추고 글렌을 찾아가서 교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너도 오래 걸렸구나·”
글렌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저건 나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헌데 교관이라? 아무 자격도 없는 놈에게 지그하르트의 교관 자리를 줄 수는 없지· 직접 시험을 통과해서 자격을 얻어라·”
그는 오랜 전우라고 봐주지 않고, 시험을 치고 다시 오라고 말했다·
어둠에 빠져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시기와는 달랐다· 글렌도 심마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흥·”
셰릴은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반가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합죠·”
나는 글렌이 내려준 더럽게 어려운 시험을 간신히 통과하여 교관의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세이피아에 찾아왔던 글렌처럼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는 아이를 만났다·
그게 내 새로운 시작이자, 가장 큰 행복이었다·
* * *
캬아아아앙!
리메르는 손목이 비틀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건가?
내상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한 순간 정신이 날아갔던 것 같았다·
“어딜 보는 거냐· 계속 막아야지· 안 그러면····”
시프가 턱을 틀어 올린 채 자신의 뒤에 있는 도리안을 향해 공간검을 쏘아냈다·
트으윽!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뒤로 빠져서 도리안의 목을 노리는 검격을 쳐냈다·
“후욱····”
리메르가 다음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숨을 내쉴 때였다·
퍼어어어억!
공간을 열고 튀어나온 시프가 그의 가슴에 흑검을 박아 넣었다·
“커헉!”
리메르가 피를 토하며 상체를 굽혔다·
‘젠장····’
반응이 늦었다· 흑검이 살을 뚫고, 뼈를 부수는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영혼이 찢겨지는 듯한 고통에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봐· 버러지를 챙기니까· 이렇게 되잖아·”
시프가 리메르를 향해 짙은 조소를 던졌다·
“어차피 네가 죽으면 이것들도 죽는데 말이야·”
“아니지····”
리메르가 왼손을 들어서 가슴을 뚫고 있는 흑검을 잡았다·
“내가 죽기 전까지 내 제자가 살아 있는 거잖아· 그거면 충분해·”
“···아직도 이런 힘이 있다고?”
시프는 리메르의 왼손에 잡혀서 빠지지 않는 흑검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부대주님!”
도리안이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그는 아리스를 업은 채로 검을 뽑아서 시프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터어어엉!
도리안의 검격은 그의 경지를 초월한 듯 날카로웠지만, 시프의 오러를 뚫지 못하고, 안개처럼 녹아내렸다·
“이 쓰레기가!”
시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힘을 다해서 도리안을 걷어찼다·
“끄윽!”
도리안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서 시프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저 녀석도····’
리메르가 두려움을 잊은 도리안을 보며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많이 컸네·’
자신이 아는 도리안은 이런 상황에서도 겁에 질린 채 구석에 숨어있어야 했는데, 초월자에게 달려들다니, 조금이지만 힘이 났다·
“네놈부터 죽여주마!”
시프가 흑검을 뽑아서 죽이겠다는 듯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어딜 가려고·”
하지만 리메르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가슴을 뚫은 흑검에서 손을 풀지 않았다·
“이런 미친놈이!”
시프의 주먹질을 맨몸으로 받으며 삐걱거리는 오른팔을 움직였다·
퍼어어어억!
세이피아의 신물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듯 어둠을 밀어낼 듯한 장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 무슨!”
시프가 경악하며 왼손을 내렸다· 아리스의 오러를 이용하여 방어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간다·’
사라졌던 자유가 다시 찾아온 듯 전신에 힘이 넘쳐난다·
검을 짧게 잡고, 손끝을 세웠다· 내가 쌓아 올린 가루누아의 바람과 라온이 전해준 광풍류를 휘감은 채 검을 꽂아 넣었다·
캬아아아앙!
검푸른 빛으로 일그러진 오러의 벽이 깨지고, 시프의 가슴에 깊은 검흔이 새겨졌다·
“하아····”
하지만 이제 정말 힘이 다한 듯 검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버러지가!”
시프가 참지 못하고 흑검을 꽂은 상태에서 자신의 복부를 후려쳤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흑검의 칼날을 잡고 있는 왼손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서 끝나도 내 제자와 그 아이의 가족만큼은 지켜야 했다·
무릎이 떨리고, 고통에 이가 악물리고 있음에도 견뎌냈다·
하지만 의지에도 한계가 있는지 결국 손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 후회는 없었다·
초월에 오르지 못한 것도, 다른 사람을 지키다가 부상을 입은 것도 다 괜찮았다·
다만 이제 도리안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게 그리고 라온과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쉬워서 가느다란 한숨이 나왔다·
“지독한 놈! 좋다! 그냥 죽이지는 않으마!”
시프는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일 수 있음에도 더 큰 고통을 주겠다는 듯 흑검 속으로 오러를 밀어 넣었다·
뼈와 살이 헤집어지는 듯한 고통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며 피가 섞인 숨을 내쉴 때 공간이 갈라지고, 날개를 두른 인간이 피를 쏟으며 튀어나왔다·
그 뒤를 이어서 익숙한 불꽃이 공간을 가르고, 라온과 광풍대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라온 지그하르트네· 하지만 조금 늦었어·”
시프가 조롱 섞인 말에 라온과 아이들이 뒤를 돌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격동하는 아이들의 눈동자들이 아릿하게 가슴에 박혔다·
그런 표정 할 필요 없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던 이유는·
거짓된 팔을 달고, 거짓된 단전을 삼키면서까지 버틴 이유는 모두 너희들 때문이었으니까·
너희가 나를 또 한 번 사람으로 살 게 만들어주었다·
하아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해가는 게 느껴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망할 패륜아 놈을 처참하게 죽여 달라고 할까?
글렌에게 이제 솔직해지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해볼까?
내가 볼 수 없겠지만, 라온에게 누구보다도 훌륭한 가주가 되어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이 아는 제자들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이루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힘들 아이들에게 그런 무거운 말을 건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답은 정해져 있지·
“언제나····”
리메르는 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피를 삼키고 웃었다·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마지막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행복해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환한 웃음을 그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의 어린 왕·
아니, 나의 가장 위대한 제자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