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0화
“급조한 다리라….”
시프가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가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라, 그렇잖아?”
리메르가 나뭇잎 검으로 본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나름 길게 살았는데, 이딴 식으로 초월에 오르는 꼴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거든.”
다른 사람의 힘을 강탈해서 초월에 오른다는 이야기는 대륙 역사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현재 시프는 확연한 초월자의 기파를 뿜어내고 있지만, 분명 약점이 있을 것이다.
“그럼 직접 느껴보라고. 내가 파탄을 드러내는지 아닌지!”
시프가 비틀어진 미소와 함께 발을 굴렀다. 놈의 주변으로 강대한 오러의 물결이 요동친다. 초월자만이 보일 수 있는 절대의 기파였다.
쿠구구구구!
시프는 단숨에 끝을 내겠다는 듯 눈앞으로 돌진해왔다. 살을 떨리게 만드는 예리한 검격이 안구를 뚫어버릴 것처럼 짓쳐 들었다.
‘분명 약점이 있을 거야.’
리메르가 왼쪽 무릎을 굽히며 나뭇잎 검에 푸른 바람을 담았다. 피내음을 지워버리는 청량한 기파와 함께 나아가며 멸풍검의 진의를 펼쳐냈다.
쿠와아아아앙!
리메르도, 시프도 서로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검격과 검격이 정면에서 격돌하며 공동 전체가 뒤흔들렸다.
“음….”
리메르가 탁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튕겨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주며 눈매를 찌푸렸다.
“어때?”
반편 시프는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은 채 능글맞은 웃음을 그렸다.
“파탄이 보이나?”
“이걸로는 모르지.”
리메르가 손아귀에 남아 있는 시프의 기운을 털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이 아니군.’
일검을 부딪쳤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린다. 내상은 아니지만, 충격이 컸다. 육체 능력과 오러에서 완벽하게 밀린다는 뜻이었다.
‘정면에서 싸우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군.’
시프의 육체 능력과 오러 수준은 한참 전에 초월에 오른 무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정면에서 싸웠다가는 몇 수 버티지도 못하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모른다라….”
시프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보여줘야겠네.”
그가 손목을 앞으로 꺾어서 흑검을 세웠다. 찌르기를 하듯 검날을 하나의 점으로 만든 순간 눈앞으로 푸른 빛이 번쩍였다.
‘공간검!’
리메르가 다급하게 자세를 낮추며 가루누아의 바람을 일으켰다.
콰드드드득!
공간을 격하고 튀어나와 가루누아의 바람을 깎아버리는 예리한 참격. 아리스의 공간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능숙했다.
“….”
리메르가 뺨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뭐지?’
시프의 공간검은 진짜였다. 파탄을 드러낼 거라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그래도 계속해야 해.’
이미 싸움이 시작된 순간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믿고 계속 나아가야 했다.
후욱.
리메르가 광풍류의 바람을 휘감은 채 시프의 좌측에 이르렀다. 왼발을 구르며 허벅지 옆에 붙여두었던 나뭇잎 검을 그어 올렸다.
응집시켜 두었던 가루누아의 바람이 개방되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발했다.
“빠르군.”
시프는 작은 감탄을 흘리며 흑검을 사선으로 틀었다. 방어가 아닌 공격. 놈은 방어를 하지 않고, 오히려 공간검을 쏘아내어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피하면 안 돼.’
한 번 밀리는 순간 공간검이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다. 자신의 검을 믿고 저돌적으로 치고 나갔다.
파아아아아앙!
나뭇잎 검과 흑검이 교차하며 푸른 바람과 공간의 참격이 격돌했다.
수천 개의 유리창이 깨져나가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공동의 중심에 새까만 균열이 벌어졌다.
치이이이익!
리메르와 시프는 각기 다섯 걸음씩 밀려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만 여유로운 시프와 달리 리메르의 안색은 흙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뚝.
리메르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파라스는 시프가 아리스를 떠날 때까지 공간검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근접 거리에서도 완벽한 공간검을 펼쳐냈다. 예상과는 달리 자그마한 파탄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좀 믿음이 가는 모양이로군.”
시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느끼는 그대로 나는 초월에 올랐다.”
“…말이 안 돼.”
리메르가 시프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으로도, 주술로도, 무학으로도 타인을 초월에 오르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시프가 자신이나, 라온보다 초월에 가까이 서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의 각성이 아니라, 아리스를 찌르는 것으로 초월에 오른다는 건 이 세계의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일이었다.
“인간의 힘이 아니라면?”
시프가 흑검을 땅에 박은 채 고개를 저었다.
“뭐…?”
“리메르. 평생을 할아버지와 함께 한 당신이라면 말해줘도 되겠지.”
그는 재밌을 것 같다고 말하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지그하르트의 인간에게는 천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천…족?”
리메르의 눈동자가 격랑을 맞은 듯 출렁였다.
“네 말대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타인의 힘을 강탈해서 초월에 오르는 게 불가능해. 하지만 천족의 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럼 네가 아리스에게 했던 건….”
리메르가 마른침을 삼키며 도리안의 등에 업혀 있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시프가 리메르를 따라 아리스를 바라보며 사이한 웃음을 그렸다.
“어머니의 피에 어려 있는 힘을 천족의 그릇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네 말대로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지.”
그는 이제 이해가 되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아직 이해가 안 돼.”
리메르가 시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의 피에 천족의 피가 섞인 건 어떻게 알았고, 힘을 뺏는 방식은 또 뭔데!”
“천족과 내 몸을 모두 연구했으니까.”
시프는 손가락으로 본인의 머리를 가리키며 두개골을 열었다고 말했다.
“천족과 네 몸을 연구….”
리메르가 검을 쥐고 있는 손끝을 떨었다. 천족의 연구. 지금 저게 가능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너 설마….”
“맞아.”
시프가 양팔을 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 로베르트. 그분이 나의 신이다.”
그는 데루스의 이름을 꺼내면서 진중한 눈빛을 드러냈다.
인간 자체가 망가진 것처럼 성격이 제멋대로 바뀌고 있었다.
“데루스가 널 납치해서 실험한 건가….”
“아니, 내가 스스로 바친 것이다. 데루스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시프는 본인의 의사였다고 말하며 웃었다.
“덕분에 대륙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초월에 올랐잖아.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안배다.”
그는 데루스를 정말 신으로 여기는 듯 두 손을 모았다.
“어머니의 힘을 완전히 뽑아낸 후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가는 게 우리의 목적이지.”
시프는 본인이 글렌을 죽일 수 있는 칼이 될 거라면서 무겁게 턱을 내렸다.
“하!”
리메르가 시프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너…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 둘의 이름을 꺼냈네.”
“내가 왜 말해줬을 거 같아?”
시프가 얼굴을 숙인 채로 섬찍한 눈빛을 드러냈다.
“너희 모두가 여기에 묻힐 테니까.”
그는 다시 성격이 가볍게 변한 듯 키득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좋아. 어디 해보자고.”
리메르가 울렁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제자가 초월자를 죽였으니,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눈을 내리감은 채 검을 위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심상의 세계에 깃들어 있는 바람과 벼락을 불러오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검계현신 바람과 벼락의 노래.”
리메르가 검계를 열자, 공동 전체에서 녹색의 바람과 적색의 벼락이 몰아치며 어마어마한 오러의 파동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바람과 벼락 한 줄기가 하나의 강환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가짜로군.”
시프는 리메르의 검계를 가짜라 칭하며 턱을 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네 거짓된 검계를 부숴주마.”
그가 흑검을 내리치자, 허공에서 수십 개의 검영이 그려지며 요동치는 바람과 벼락이 갈라졌다.
“그 정도로?”
리메르가 코웃음을 치며 검으로 내리자, 죽은 듯 가라앉았던 바람과 벼락 줄기가 다시 솟아올랐다.
“흥.”
시프가 대지를 밀어내며 다가온다. 공간검의 묘리를 보법에 담은 듯 갑작스럽게 우측에서 튀어나와 흑검을 찔러넣는다.
희끄무리하게 번쩍이는 칼날. 놈은 근접전에서도 공간검을 펼치고 있었다.
‘막으면 손해야.’
공간검을 상대의 방어를 넘어서 들어오는 참격이다. 방어하는 순간 기세를 잃기에 차라리 공격을 하는 게 나았다.
우우우우우웅!
리메르는 바람과 벼락을 휘감은 칼날을 세워 짓쳐 들어 오는 시프의 검격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어엉!
오러의 힘 자체는 여전히 시프가 위였지만, 바람과 벼락의 힘 덕분에 간신히 버틸 수는 있었다.
“가짜치고는 제법인데?”
시프가 비웃음을 흘리며 흑검을 좌측으로 비틀었다. 꺾여서 솟구치는 검은 칼날에 파천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쿠와아아아앙!
나뭇잎 검을 바람과 벼락으로 휘감아서 막았음에도 속이 울렁거린다.
시프의 검격 자체에 공간검의 묘리가 어려 있었기에 조금만 반응이 늦어도 손해가 막심했다.
“힘들어 보이네? 난 아직 여유로운데?”
시프가 흑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기가 진동을 하며 벼락과 바람이 뜯겨나간다.
놈이 본래 지니고 있던 검술에 공간검이 녹아들자 점점 더 상대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접근하자. 멀리 떨어지면 이쪽이 손해야.’
시프가 근접 거리의 공감검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먼 거리보다는 효율이 낮았다.
초근접 거리에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방식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 같았다.
쿠우웅!
리메르는 검계로 강화된 육체와 오러를 믿고 시프와의 거리를 좁혔다.
쩌어어어엉!
검을 다 휘두르기도 어려운 좁은 간격에서 손목을 비틀며 시프를 향해 벼락과 바람의 검을 찔러넣었다.
“근접전이라고 네가 유리하지는 않을 텐데?”
시프는 초월자답게 허리를 틀어서 뇌전의 검을 피해냈지만, 짜증이 난 듯 눈매를 찌푸렸다.
“하지만 네 장점을 조금이라도 죽일 수 있잖아?”
리메르는 시프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검술과 보법만이 아니라, 감각을 극대화한 찰나의 몸놀림까지 동원하여 놈의 숨통을 노렸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상대해주마.”
시프는 물러나는 게 자존심이 상하다는 듯 리메르와 같은 거리에 선 채로 근접 거리의 공간검을 그었다.
벼락과 바람의 참격이 수없이 떨어져도 그의 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큭.”
시프가 리메르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확실히 광검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바람을 탄 듯한 표홀한 움직임과 벼락을 두른 날카로운 검격. 그리고 칼날 위에 서 있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까지.
누구나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무인이었다.
하지만 싸움이 지속될수록 리메르의 움직임이 눈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이쪽이로군.”
시프가 입맛을 다시며 검을 휘두르자, 바람이 갈라지고, 리메르의 허벅지가 얇게 뜯겨나갔다.
“좀 더 빨리 움직여 봐. 다 보이니까.”
그는 리메르를 조롱하며 공간의 참격을 연달아 쏟아냈다.
첫 번째 공간검이 뻗어나가기 전에 두 번째 검격을 쏘아내는 사슬의 참격이었다.
피이이익!
리메르는 다섯 개의 검격을 튕겨냈지만, 결국 여섯 번째 공간검을 막지 못하고, 허리를 내주었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밀리기 시작한다는 지표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리메르는 거친 숨을 내쉬고서 오히려 시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힘, 속도, 육체 능력, 오러 모든 것이 밀리지만, 의지만큼은 꺾일 수 없었다.
치이이잉!
한 끗만 어긋나도 사지가 뜯겨나갈 수도 있는 죽음의 구렁텅이 속에 발을 내딛고 있다는 섬뜩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
라온이 대신 싸워줄 수도, 가주님이 와줄 수도 없다. 도리안과 아리스를 지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이런 싸움이 얼마 만이지?’
압도적인 열세. 손끝 하나만 잘못 움직여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살벌한 전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두렵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아리스가 전에 했던 말대로 라온을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편안하군.’
마음이 자유롭게 풀리자, 무거워졌던 몸도 날개를 단 듯 가벼워졌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 하나로 이어지며 자신의 정신이 하늘과 연결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치이이이잉!
전력을 다해도 피하기 힘들었던 시프의 검격이 읽히기 시작한다. 아니, 이 공동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흐름이 눈에 스며들었다.
우우우우웅!
리메르가 시프의 좌측으로 파고들어 바람과 벼락을 일으켰다. 붉은 벼락과 푸른 바람이 한 손에 모여들며 극강의 파장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앙!
시프가 처음으로 밀려 나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이게 뭐….”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하.”
리메르가 웃었다. 전신의 마나회로에 순수한 자연의 마나가 차오른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하늘에 오를 듯 성장하고 있었다.
쿠웅! 쿠우웅!
평생을 쌓아 올렸던 격이 자신의 길을 막고 있던 초월의 벽을 부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치이이잉!
시프의 참격을 피하고, 놈의 어깨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이전이라면 속도와 힘이 느려서 막혔겠지만, 벼락과 바람이 스며들며 놈의 어깨를 벨 수 있었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시프가 미간을 구긴 채 연달아 참격을 내지른다.
어디를 베여도 죽게 될 정도로 날카로운 검격이었지만, 바람은 여전히 자신의 편이었다.
우우우웅!
리메르는 본래의 보법이 아니라, 녹색 바람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시프의 심장을 향해 뇌전의 칼날을 쏘아냈다.
파아아아앙!
시프의 흑검과 나뭇잎 검이 정면에서 격돌하며 공동 전체로 검녹색 스파크가 번져나갔다.
치이이잉!
리메르는 광풍류의 바람을 전신에 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상을 입었지만, 그 이상으로 육체의 성장이 빠르다. 무적의 육체로 진화하는 것 같았다.
‘초월.’
그토록 바라던 초월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즐거워.’
5연무장의 교관, 광풍단의 단주, 광풍대의 대주. 그 모든 거죽을 벗어던지고 리메르라는 자유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다.
스스로가 바람과 벼락이 된 것처럼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쿠우우우우웅!
리메르는 또 한 번 시프와 정면에서 부딪쳤다.
여전히 힘과 속도에서는 밀렸지만, 이전처럼 압도적인 열세는 아니었다.
세 개의 단전에서 차오르는 힘이 있으니, 놈의 몸에 검을 박아 넣기에는 충분했다.
콰과과과과!
리메르의 검격이 강해질수록 시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초월에 오른다고? 너 따위가?”
시프가 전신이 검은 기운으로 물들었다. 대지의 어둠이 일어나는 듯한 강대한 기파가 공간검의 묘리를 담은 채 뻗어나갔다. 그도 이제는 전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
‘이걸 막기는 무리야.’
리메르가 입술을 깨물며 나뭇잎의 검을 사선으로 비틀었다.
쩌저저저저적!
시프의 참격을 천장과 바닥으로 흘려보내려고 했는데, 그 안에 담겨 있던 힘이 너무 강해서 제대로 다 받아낼 수가 없었다.
쿠구구구!
공간을 찢어발기는 참격이 나뭇잎 검의 칼날을 벗어나 뒤편으로 넘어갔다.
‘잠깐! 저기는!’
리메르가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자신이 흘려낸 공간검이 도리안과 아리스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아….’
지금의 자신이라면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가깝기에 싸움에 영향이 갈 정도로 큰 충격을 받게 될 게 분명했다.
물론 자신의 몸은 그런 고민을 하기도 전에 먼저 도리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찌지지지직!
리메르가 대지를 부수며 나아가 쇄도해오는 공간검을 향해 몸을 던졌다.
쿠와아아아앙!
나뭇잎의 검으로 최대한 방어를 했음에도 지금까지 중 가장 강대한 충격이 전신을 덮쳤다.
“커헉!”
리메르가 검게 죽은 피를 토하며 허리를 굽혔다.
“부, 부대주님!”
도리안이 악을 지르며 리메르를 붙잡았다.
“어이가 없군.”
시프가 리메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싸웠다면 초월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 버러지들을 위해 몸을 던져?”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우리 대주가….”
리메르가 피에 젖은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망나니와 약속을 했거든. 뒤를 지켜주겠다고.”
그는 후회가 없다는 듯 잔잔하게 웃었다.
“수하로서 대주가 약속을 어기게 할 수는 없잖아.”
리메르는 그게 전부라고 말하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멍청한 놈이로군.”
“제 부모를 찌르는 패륜아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인간의 도리를 말하고 있는 거니까.”
자유를 느끼며 초월에 오를 뻔 했지만,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책임의 굴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정말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좋지 않군.’
몸이 무겁다. 바람과 벼락이 된듯한 자유는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고 패배를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끝까지 싸워야 할 때였다.
“그래. 인간으로 죽거라. 나는 천족으로서 살아가마.”
시프가 리메르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의 검에서 이 던전 자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아리스는 혼자서라도 이곳을 벗어나라며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내 힘이 더 빠져나가고 있어….”
그녀는 시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며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말했잖아.”
리메르가 아리스의 눈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너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어. 이제야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된 제자 녀석에게 슬픔을 줄 수는 없지.”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죽어라.”
시프의 손아귀에서 검고 푸른 빛줄기가 하나로 이어진다. 어둠을 그리는 초월의 참격이 공간을 뛰어넘어 쇄도해왔다.
쿠구구구구!
리메르는 흔들리는 두 손으로 검을 말아쥔 채 새까만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암흑을 지우는 벼락과 바람. 그의 영혼을 담아낸 참격이 어둠의 가르는 광대한 빛을 이뤘다.
“내가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