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힘의 조건 (4)
-후우웅
수건으로 피를 닦아내는 동안 방안의 안개가 모두 회수되었다·
이 방은 그 미친 여자가 들어왔던 시점부터 내 제한 결계로 감싸져 있었다·
마나가 아닌 안개의 힘을 이용한 만큼 일반인으로선 눈치챌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일을 끝마치고 나니 내 시선은 자연스레 발밑으로 향했다·
맡겨 달라 해서 맡겨주긴 했다만 왠지 불안하군·
나는 또 다른 작업이 행해지고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다·
세상에·
웃음이 나오다 못해 급히 코를 막았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느 지하실 문 앞·
그 변태 상인을 처리했던 방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곳이다·
잠겨있는 건 아니지만 들어갈 순 없었다·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생성해낸 제한 결계가 문을 막고 있으니·
이 말은 즉 안에서 뭔 짓이 벌어지던 간에 밖에선 알 도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허나 지금 이 문틈 사이로 풍겨오는 진한 피 냄새는 뭘까?
대체 뭔 짓을 했으면 피 냄새가 결계를 뚫고 새어 나오는 거지?
결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제되었고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
한없이 순박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는 케이람·
사실 그녀보다는 주변 광경에 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뭐 마수의 식탁 위라 해도 무방하군·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뭐긴? 엄연한 정화 작업이지!]
어느 순간부터 정화 작업의 의미가 잘못 변질된 것 같다·
일단 있어야 할 그 미친 여자의 시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없는 건 아닐 거다·
아마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주먹만 한 살덩이들과 흰 조각들이 그나마 남은 그녀의 일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오죽하면 피 냄새를 밥 냄새보다 많이 맡아온 내가 코를 막을 지경이다·
[할 땐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어중간하면 안 하는 것만 못하잖아?]
케이람은 해맑게 웃으며 입술에 묻은 피를 요염하게 핥았다·
뻔뻔한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 아니니? 얼마나 두들겨 팼으면 손이 다 까져있네· 내가 그렇게 소중했던 모양이지?]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엔 대꾸를 안 하는 게 답이다·
케이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나니 그제 서야 벽에 붙은 시체들에게 눈길이 갔다·
한둘이 아닌 거의 벽면 전체를 채울 만큼의 수·
뭘 표현하려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자세들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나같이 나와 비슷한 연배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도 모를
이미 죽었지만 썩지도 못한 채 이 자리에서 영원히 고통만 받을
허나 이런 꼴을 당한다 해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할
그 담배 팔이 꼬마랑 전혀 다를 게 없는 그런 아이들이겠지·
계속 보고 있자니 기분만 잡친다·
어차피 그냥 둬봐야 좋은 것도 아닐 터·
나는 손에서 작은 화염구를 만들어내 곧바로 벽을 향해 던졌다·
-화르륵
불은 겹겹이 붙은 시체를 타며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치솟은 불길은 머지않아 벽 전체를 휩싸았다·
나도 참 예전 같지 않다·
미스트의 임무든 제국의 명령이든 상관없이 항상 주어진 지령만 해결하고 떠났던 나이지 않았던가?
대체 언제부터 남에 대해 이렇게 오지랖이 많아진 걸까?
[저 병아리들이 꽤나 안쓰러웠던 모양이네? 직접 성불까지 시켜주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할 수 있으니까 해줄 뿐이야· 다른 마음은 없어·”
할 수 있는데도 안 해서 후회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 *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흥분을 주체 못 한 리사는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군터의 시체를 보고 온 지 불과 몇 시간 전·
차마 사람이 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흉물스러웠던 충격에 벗어날 시간도 없이 바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델키아의 구역인 유흥 골목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
가드의 얼굴이 꽤 심각한 거로 보아 단순 화재는 아닌 듯했다·
“이 일단 유흥 골목 쪽에선 화재를 진압하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 같습니다만···· 좀 이상한 말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말? 그게 뭔데?”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델키아와 만난 자가 있었다는데····”
가드는 말하기를 다소 주저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누구랑 만나고 있었는데?”
“그 시온이란 소년과 만나고 있었답니다!”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누 누구라고?”
분명히 들었음에도 반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고작 이름 하나를 들은 것뿐인데 온몸의 신경이 찌릿하게 반응한 느낌이었다·
“시 시온?”
리사의 얼굴은 반쯤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허나 그 모습이 오래가진 않았다·
뭔가가 퍼뜩 떠오르기라도 한 듯 리사는 급히 케이지를 뛰쳐나갔다·
“리 리사님!”
가드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여 있었다·
-벌컥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마음으로 도착한 이곳·
늘 그렇듯 한 여인이 도도하게 앉아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리 린제님· 지금 유흥골목에서 화재가! 아무래도 그 소년이····”
“진정하렴· 말 안 해도 알고 있으니·”
여인의 표정은 이전과 다르게 매우 진지했다·
“분명 작업 대상은 나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뭔가 의문에 휩싸이기라도 한 듯 여인은 손으로 입술을 쓰다듬었다·
고민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사?”
“네 린제님····”
“준비하렴·”
준비라는 말에 리사의 눈빛이 돌연 혈기가 번뜩였다·
“그 소년이 조만간 이쪽으로 올 것 같으니····”
여인의 입술은 어느샌가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와 함께 그녀들이 있는 주위로 알 수 없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끼익
안은 생각보다 허전했다·
있는 거라곤 낡은 탁상과 의자뿐·
결계는커녕 어떤 마나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뭐 비밀 공간이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군·
다만 사람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단발머리의 여인이 나를 향해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서 오렴· 이곳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것도 오랜만이네·”
일단 안면은 없다·
스쳐 지나가다 본 적도 없는 완전 생초면이다·
근데 낯설진 않다·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굴 통해서 온 거니? 모리스 아니면? 델키아? 설마하니 군터가 가르쳐줬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데····”
“군터·”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정말? 순순히 가르쳐줄 망나니는 아닐 텐데? 하긴 고문 앞에 장사 없다고 걔도 별수 없었겠지· 이미 죽은 놈이지만 어째 좀 불쌍해지려 하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는가?
바로 꾸준하게 웃는 표정을 짓는 거다·
기분 좋아서 웃는 게 아닌 상대를 비아냥대듯 웃는 거·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딱 좋은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맘에 안 든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인간상 중에 하나이니·
“당신이 린제 니할로프인가?”
“뭐 여기선 그렇게 불리고 있지· 네가 찾는 그 린제 니할로프 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이지?”
-지직
순간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양 손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영혼도 아니고서야 멀쩡한 인간의 몸이 저리 흐릿해 질린 없겠지·
즉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녀는 멀쩡한 인간의 몸이 아니란 뜻이었다·
“당신 실체가 아니로군·”
“아무리 그래도 날 죽이러 온 암살자에게 온전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내 목적도 이미 알고 있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너도 마찬가지지 않니? 아마 이 도시에서 네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사람은 없을 거라 보는데?”
나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가 뭐지?”
“아직 어린 친구라 그런지 예의가 없구나· 남이 누군지 묻기 전에 자신이 누군지 먼저 소개하라고 그년이 안 가르쳐줬니?”
그년?
“시리카 니그리티···· 걔지? 날 죽이라고 시킨 게·”
“····”
근 10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잠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암살이라는 목적을 알고 있고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어떤 능력을 쓰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 치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저 정체 모를 여인으로부터 당주의 이름이 나왔다는 거다·
이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겠지·
이 여자 미스트와 관련이 있다·
-스스스
낯설면서도 익숙한 검은 안개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펼쳐졌다·
“이래서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지· 그 고리타분한 여자가 미스트를 이끄는 당주가 됐다니 여태 유지하고 있는 게 기적일 정도구나·”
기분이 급격하게 더러워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저 정체 모를 여자의 눈빛이었다·
저 가증스러운 미소에도 숨길 수 없는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
그것이 내 눈에 뻔히 보이고 있으니·
“생각해보니 조금 이해가 안 되는구나· 군터를 통해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찾아왔으면 될 텐데 혹시 네 작업 대상에 그들도 포함되어 있던 거니?”
“아니 당신 혼자였어·”
딱히 감출 건 아니라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급기야 박장대소하는 그녀였다·
“아 간만에 크게 웃었구나· 그럼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죽인 거니? 재밌구나· 암살자라는 아이가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낸다니 말이야·”
“난 아직 그들을 죽였다고 말한 적 없는데?”
“시치미를 뗄 거면 다음부턴 피 냄새라도 좀 지우고 하렴· 뭔 짓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네 몸에서 그들의 비명 섞인 냄새가 진동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말하는 어투로 보나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나
미스트를 어쭙잖게 아는 말단 수준이 아니다·
못해도 간부급 이상·
어쩌면 당주와 비빌지도 모르겠다·
당주는 이걸 알면서도 날 보낸 건가?
그녀는 내 얼굴을 무슨 그림 감상이라도 하듯 아예 턱을 괴며 바라보았다·
“참 보면 볼수록 흥미롭구나· 분명 살생에 아무런 거리감 없는 악독한 눈을 가졌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주저하는 감정이 있어·”
주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도 안 나왔다·
이 여자가 조직이랑 관련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이
내 임무는 결국 그녀를 죽이는 데 있다·
“그래서 당신이 언제까지 안개 속에 숨어 있을 작정이지? 혓바닥도 어지간히 놀려야 하지 않겠어? 아님 내가 끝까지 당신을 찾아주길 바라는 건가?”
“물론 아니야· 그냥 확인을 좀 해보고 싶었거든! 시리카의 아이가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을지 말이야· 더불어····”
그녀의 입가로부터 살의를 머금은 야릇한 미소가 서렸다·
“내 아이와 비교했을 땐 또 어떨지 말이야····”
“···!”
순간 그녀가 앉은 탁상 바로 아래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치솟았다·
-쾅!
재빨리 몸을 뒤로 내빼니 탁상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파동이 발생했다·
이와 함께 내 시야가 부서진 탁상에 가려져 버렸다·
-챙!
또다시 갈라진 탁상 사이로 단검이 튀어나오는 것을 케이람을 꺼내 막았다·
“하?!”
검의 주인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움츠렸다·
얼굴 자체는 익숙하긴 하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라졌기에·
마치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
<리사>
오른쪽 가슴에 달린 금색의 이름표가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