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힘의 조건 (1)
군터의 요구는 간단했다·
그 로이라는 꼬맹이를 살리고 싶다면 제시한 시간까지 폐기물 장으로 와라·
오지 않을 시 뒷일은 알아서 생각해라·
의도는 뻔히 보였다·
투기장의 일을 복수하려는 것·
허나 정상적으론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린 것이다·
참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오네·
“불안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이런 짓을 군터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정작 제일 흥분한 건 매니저였다·
“죄송해요 손님! 이 일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손님께선 걱정 마시고····”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문 쪽으로 나갔다·
“지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거길 가시려는···?”
“꼬맹이 쪽은 맡기도록 하지·”
깜짝 놀란 그녀가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미치셨어요? 지금 이거 누가 봐도 함정이잖아요! 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구요!”
함정 함정이라····
굳이 정의하자면 남을 어려움에 빠트리려는 계략을 비유한다지?
확실히 간다 해서 좋은 꼴을 보진 않을 것이다·
근데 달리 말하면 내가 간다 해서 어떤 어려움에 빠질 거란 생각도 안 든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폐기물 장으로 향했다·
* * *
전생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때는 우시프 제국과 가람 왕국 간의 전쟁이 한창 지속되던 무렵
다소 수세에 몰렸던 가람 왕국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한 계책을 실행한 적이 있었다·
바로 베르트가의 장자인 라르쉘 베르트를 납치하는 것·
베르트가의 장자라면 뭘 뜻하겠는가?
바로 당시 가주였던 에쉘의 아들임을 의미했다·
황실의 혈육은 아니지만 제국 실세의 자식이었던 만큼 볼모로 잡을 가치는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제국 내에선 그를 구할지 말지에 대한 여러 설전이 오갔지만 정작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에쉘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잠자코 기다렸을 뿐·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는 오히려 내게 길을 물었다·
자기가 어찌하면 좋겠냐고·
난 말했다·
나를 보내만 준다면 라르쉘을 구하는 것은 물론 작당한 이들까지 모두 괴멸시키고 오겠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난 그때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감히 같잖은 수작을 부려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났고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놈의 아들을 구하는 것보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든 참 한심했던 일이지·
근데 인생은 돌고 돈다고 지금 내 앞에 또 비슷한 상황이 찾아와 버렸다·
담배 팔이 꼬마?
솔직히 아무 상관없다·
이번 임무와 연관도 없을뿐더러 죽는다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의 부랑아 중 한 명이 우연히 나와 마주쳤을 뿐·
조금의 도움은 줬을지언정 거기서 끝이다·
더 이상 내가 뭘 해줄 의무는 없다·
그래 없지 없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내 감정은
그때 느꼈던 감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유고 상관이고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난 그 같잖은 폐기물 장의 버러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
한걸음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냄새가 풍겨온다·
정확히 두 종류의 냄새다·
하나는 버려진 폐기물들의 역한 쓰레기 냄새·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인간의 피 냄새·
다만 비릿한 느낌이 평소와 다르게 매우 진했다·
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내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니·
의식은 안 했지만 지나오는 동안 꽤 많은 인간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인지했다·
허나 섣불리 나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참 아이러니하단 말이지·
저런 하찮은 잡배들도 두려움이란 걸 느끼고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정작 팔까지 하나 잃은 놈이 아직 제 주제도 파악 못 한 채 깝죽거리는 꼴이라니·
의미 없는 잡생각을 하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초대받은 공간에 이르렀다·
“왔네?”
폐기물 위에 거만하게 앉아 나를 지켜보던 군터가 만족스런 미소를 보였다·
“솔직히 좀 놀랐어! 오라고 말은 했다지만 정말 그 꼬맹이 하나 때문에 이곳까지 와줄 줄은! 보기보다 정이 많네?”
정작 놈은 둘째 치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 폐기물들이 산을 이룬 공간·
희한한 건 폐기물은 아닌데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하얀 조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뼈·
한둘이 아닌 족히 수백은 넘을 듯한 양이었다·
공동묘지도 아닌데 왜 사람의 뼈가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선 아마 저놈이 알고 있겠지·
“눈을 보니 벌써 알았나 보네? 왜 여기 인간의 뼈가 있는지 궁금한 거지?”
나는 지껄여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폐기의 뜻이 뭔 줄 아냐? 간단해! 못 쓰게 된 걸 버린다는 의미야· 이곳은 그런 못 쓰게 된 걸 처분하는 장소지·”
녀석은 아직 남아있는 한쪽 팔을 자랑스럽게 펼쳐냈다·
“전에 말한 대로 난 램버스타 케이지를 제패했지만 경기 도중 사람을 죽인 일로 인해 그곳에서 쫓겨났다· 미련은 없었어· 딱 즐길 만큼 즐겼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나올 때도 기쁜 마음으로 나왔지!”
그의 눈빛이 악랄하게 빛났다·
“근데 나오자마자 낯선 놈들이 날 반겨주더라고! 한 놈은 한쪽 팔이 없고 한 놈은 한쪽 무릎이 뭉개진 데다가 또 한 놈은 아예 얼굴이 찌그러져 있는! 기억은 안 나는데 전부 내가 그랬다 하더라고?”
하기야 저렇게 살면서 적이 없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러면서 나한테 복수를 하겠다더군! 나 때문에 지들 인생이 쓸모가 없어졌다나 뭐라나? 그걸 들은 난 이런 생각을 했지! 쓸모가 없어지면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 폐기물들처럼 말이야? 인간이라고 다를 게 뭔데?”
그는 손에든 백골을 폐기물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마치 저들과 다를 게 없다는 듯이·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도 들더군· 이놈들 외에도 쓸모없어진 인간들을 폐기하는 건 어떨까? 어차피 계속 살아봐야 아무 의미 없잖아? 어찌 보면 내가 좋은 일을 해주는 거 아니겠어?”
계속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 한마디 던졌다·
“그건 네놈 기준 아닌가?”
“그럼 물어보지! 애초에 그런 기준은 누가 세우는 거냐? 있는지도 모르는 신들이 세우는 건가? 그렇게 따지면 이 폐기물장 안에선 내가 신인데?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인간을 폐기시키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어? 안 그래?”
대충 투기장에서 잡소리 할 때부터 예상은 했다·
쓸모없어진 쓰레기는 폐기해야 한다·
그러니 쓸모없어진 인간들도 이 세상에서 폐기해야 한다·
참 단순하면서도 같잖은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네 말에 따르면 한쪽 팔이 없어진 너도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거로군· 그럼 너 역시 똑같이 폐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한쪽 팔이 없어? 누가? 내가? 무슨 소리야!”
-우우웅
그는 남아있는 손으로 마나를 발현해 텅 빈 반대쪽 어깨로 가져다 대었다·
“창조: 자연의 손(Hands of Nature)!”
-꾸득꾸득
주문과 함께 생성된 마법진에서 고운 흙이 나타났다·
마치 흙인형을 빚어내듯 점차 형태가 갖춰져 새로운 팔을 만들어나갔다·
어이가 없군·
쓸모없어진 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놈이 창조 마법을 자연스레 구사하다니·
고개를 젓는 것조차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네게 악감정은 없었다· 그냥 쓰레기에 찌든 날 깨워줄 좋은 상대가 될 거라 보았지! 하지만 네놈의 눈빛을 보고선 생각이 바뀌었다! 상대를 능멸하다 못해 하찮게 여기는 듯한 그 눈빛! 그 지랄 맞은 여편네랑 아주 똑같아!”
그는 새로이 창조된 팔을 내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팔 좀 새로 만든 거로 날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물론 아니지! 나도 인정하긴 싫은데 넌 내가 본 남자 중 가히 최강인 건 맞아! 차마 어떻게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은 안 들더라!”
그걸 아는 놈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근데 그거 아냐? 싸움의 끝은 결국 누가 살고 누가 죽었냐에 따라 달렸다는 걸! 내가 살고 네가 죽는다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되는 거라고!”
-까딱
그가 손짓으로 뭔가 신호를 보내니 주위에 숨어있던 잡배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손엔 각각 의도를 알 수 없는 금속의 장치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주저할 것 없이 그 장치를 바로 실행시켰다·
-기이잉
“···!”
갑자기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나 싶더니 이내 몸을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마법이 아닌 ‘중력 존(Gravity Zone)’이라는 아티팩트의 능력이다·
일정 공간의 중력을 높여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시키는 효과·
사실 보통 인간이라면 서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야? 꽤 잘 버티네? 사실 널 위해 쓰려했던 건 아닌데 너한테 써도 아깝진 않을 것 같아·”
인정은 해야겠네·
나를 위해 꽤 괜찮은 함정을 준비해 놨어·
“난 지금부터 멀쩡한 네놈을 쓸모없는 폐기물로 만들 거야! 그럼 너 또한 여기 쌓여있는 백골들처럼 고이 잠들게 되겠지! 그래도 쉽게 끝나는 건 싫으니까 어디 한 번 전력으로 버텨봐!”
전력?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부터 최선이니 전력이니 하는 이상한 말들로 날 강요하는데
참 웃기지 않은가?
고작 이런 놈들을 상대로 내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게?
애초에 이곳은 벨리아스도 아니고 아카데미도 아니다·
녀석조차 나를 시온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이곳에서 내가 시안 베르트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 한 명을 빼고선·
[도와줄까?]
케이람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굳이 그녀를 쓸 필요도 없지·
전력을 다하라 했나?
아쉽지만 이 땅에서 내가 전력을 다해 상대하고 싶은 이는 한 명 밖에 없다·
대신 최선을 다할 순 있겠지·
최선을 다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악의 고통을 그에게 선사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탓
마침내 준비를 마친 그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들었다·
확실히 투기장에서 보여줬던 움직임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은 빠른 속도였다·
몸은 곰 만한데 속도는 화살과도 같으니 가히 파괴적인 움직임이라 할 수 있지·
그럼 뭐하겠는가?
내 앞에선 굼벵이가 움직일 뿐인데·
나는 손바닥에서 생성된 마나 구체를 움켜쥐고선 뒤로 빼 들었다·
-스윽
내가 취할 것은 별거 없다·
인간이 몸을 단련할 때 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 정권 지르기·
파죽지세로 달려오는 녀석을 향해 나는 평온한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쾅!
자연스레 맞닿은 두 개의 주먹·
강한 충격음과 함께 사방으로 거센 파장이 일었지만 그 파장은 머지않아 한쪽으로 기울었다·
“···!”
-콰직
균열이 일어날 것도 없었다·
녀석의 팔은 내 주먹에 닿은 순간 바로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파동을 버티지 못한 그의 신체는 곧바로 폐기물들 속으로 튕겨 나갔다·
-쿵
교육은 끝났다·
폐기물 속에 처박힌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으니·
불과 5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야말로 절망에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말이 돼?”
사람은 본디 한계를 맞닥트리면 그 누구보다도 쉽게 절망하는 동물이다·
아마 녀석도 그걸 알고 내게 전력을 다하란 것이 아닐까 싶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의 한계를 보여주고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감을 안겨줄 요량이었겠지·
보다시피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이건 경지 자체가 다르잖아!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한다는 게 말이 돼?”
절망과 의문이 교차한 부정의 얼굴·
내가 정화 작업을 하면서 봐왔던 이들은 하나같이 다 저런 표정을 지었다·
비록 내가 당주로부터 지시받은 대상에 이놈은 없었지만 하나 추가한다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몇 명이었어?”
“····”
그는 말이 없었다·
“네가 여태 폐기했다던 인간들 말이야· 몇 명이나 됐냐고?”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님 그사이에 벙어리가 된 건진 몰라도
대충 주위에 널린 백골들의 수를 보자니 천 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우우웅
나는 품에서 케이람을 꺼내들며 말했다·
“딱 천 조각으로 나누어줄게·”
그런 다음 쓰레기 속에 던져버리면 알아서 폐기되겠지·
머지않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남자의 비명이 폐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