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램버스타 케이지 (4)
녹슨 철골들이 어우러져 마치 커다란 새장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
한눈에 봐도 ‘케이지’란 단어가 어울릴법한 외형이었다·
현재 이곳은 좀처럼 보기 드문 웅성거림으로 인해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진 상태였다·
오늘 예정된 경기들은 모두 끝났지만 주최 측에서 새로운 경기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일명 데뷔전·
허나 긍정적인 반응보단 대체로 불신과 욕설 같은 부정적인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 하다하다 이젠 애새끼를 선수로 갖다 놓네?”
“램버스타 케이지도 한물 갔나 보군· 아니 선수들이 그렇게 없나?”
귀빈석에 앉은 부호들부터 일반석에 앉은 관중들까지 좀처럼 심드렁한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지 안의 소년은 그저 팔짱만 낀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쟤 아까 배팅장에서 소란 벌였던 그 꼬마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그 양아치 놈을 아주 피떡으로 만든 놈이잖아? 혹시 쟤가 그 소문의 주역은 아닐까?”
“자길 건들면 불구로 만들어 주겠다던 그 당돌한 놈? 아서라· 안 그래도 지금 델키아 패거리에서 그 꼬맹이 찾겠다고 아주 난리란다·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하필이면 델키아의 직원을 건드려서는····”
“하기야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미 여기를 떠났어야겠지· 안 그럼 잡히는 순간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힐 테니까· 킥킥·”
수위 높은 농담과 조롱이 오가면서도 소년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저 경기가 빨리 시작되기만을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후 마주한 소년의 앞으로 거구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데뷔전이 아니라 이벤트 전이었어?”
“호· 간만에 꽤 수위 높은 장면 좀 보겠구먼!”
별로 탐탁지 않아 했던 관중들의 반응이 한 선수의 등장으로 180도 달라져 버렸다·
선수의 이름은 젤버드·
압도적인 무력과 잔혹성을 겸비한 이곳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였다·
“와 주최 측도 진짜 잔인하네· 이 정도면 꼬맹이가 불쌍해질 정돈데?”
“누가 아니래? 하필이면 첫 상대로 젤버드를 붙여주다니· 저 꼬마 오늘 살아나가긴 글렀네·”
일각에선 연민의 반응마저 나오고 있었다·
배팅은 단연 젤버드에게 몰렸으며 관중들은 이미 승패는 상관없이 저 소년이 얼마나 호되게 당할지를 잔뜩 기대하는 중이었다·
-부우우
거센 호각 소리가 울리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젤버드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바로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뭉개버려 젤버드!”
“꼬맹이 놈을 짓밟아 버리라고!”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본래 관중들의 기대로라면 시원시원한 구타 소리가 연이어 울렸어야 했지만 첫 타격음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쿵!
대신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관중들의 눈이 전부 동그랗게 떠졌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쓰러진 것이다·
소년이 아닌 젤버드가·
그것도 단 한방에·
* * *
“뭐 뭐야?”
단 1초 만에 벌어진 믿지 못할 상황·
경기를 지켜보던 군터는 눈을 의심하였다·
상대의 주먹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한 뒤 스텝을 밟아 자연스레 턴 동작으로 이어간다·
균형을 잃은 상대가 잠시 흔들리는 그 순간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발을 휘두르니 안면을 가격당한 젤버드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실로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동작·
군터처럼 주먹에 대한 자신감이 극에 달해 있는 자에겐 실로 혈기가 끓어오르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어디서 싸움 좀 배웠다 해서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다년간의 수련과 고행의 시간을 갖지 않고서야 이뤄질 수 없는 그야말로 완성된 자의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였어?”
군터는 알 수 있었다·
실로 완벽한 동작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실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라고·
저 소년이 주먹을 쓰면 어떻게 싸울지 검을 들면 어떤 검술을 보여줄지 또 마법을 쓰며 어떤 속성의 마법을 구사할지 등·
그의 머릿속은 오직 소년이 어떤 능력을 갖췄을 지에 대한 생각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그러고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달려 나가니 다름 아닌 배팅장이었다·
“구 군터?!”
그의 얼굴을 본 안내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순히 아는 것을 떠나 뭔가 굉장히 꺼리는 듯한 눈빛·
그로선 오늘이 참 다사다난한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쟤 이름이 뭐야?”
“예?!”
“지금 케이지 안에 있는 저 소년의 이름이 뭐냐고!”
당황한 안내인은 탁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급히 뒤져보며 소년의 신상정보가 담긴 문서를 확인해 보았다·
“시 시온! 시온이라고 합니다!”
* * *
예정되었던 경기가 모두 끝나고 찾아온 케이지의 밤·
평소라면 관람을 마친 관객들이 다른 곳으로 빠지는 시간대인 만큼 매우 한가해야 할 시간이었다·
허나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한적했던 건물 앞에 다수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내 정문을 대차게 열어버렸다·
“어 어서 오세····”
로비를 지키고 있던 종업원 리사의 얼굴이 싹 굳어져 버렸다·
마치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마주한 것처럼·
이에 치렁치렁한 장신구로 온몸을 사치스럽게 꾸민 여성이 그녀 앞으로 도도하게 다가섰다·
뒤에는 화장이라도 한 듯 중성적인 외모의 남성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리사는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오래 있긴 싫으니까 용건만 말할게· 너희 손님 중에 어린 병아리 하나 있었지? 걔 여기로 불러내! 지금 당장!”
협박성 짙은 호통에도 리사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까지 내고 있었다·
“하! 기별도 없이 찾아오고선 이게 무슨 짓이세요? 다짜고짜 저희 측 손님을 이유도 없이 불러 달라니 상도의는 밥 말아 드셨어요?”
“상도의? 네년이 지금 내 앞에서 상도의를 운운해? 아 됐고! 여기 깽판 나는 꼴 보기 싫으면 당장 부르기나 해!”
난데없이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
상황을 전해 받은 케이지의 가드들도 대거 몰려들었지만 그럴수록 살벌한 분위기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혹시 낮에 발생했던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참 체통도 없으시네요· 고작 말단 직원 하나 때문에 이 난리라니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너 한 마디만 더해라? 그랬다간 네 주둥이부터 찢는 수가 있어?”
두 여인은 한 치의 물러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경고야! 셋 셀 동안 그 꼬맹이 놈 내 앞에 갖다 놓지 않으면 니들은 오늘 잠 다 잔줄 알아!”
“하! 해보시죠· 한 번! 자기 손으로 자멸하겠다는데 굳이 말리진 않아요!”
여인은 아랑곳 않고 손가락을 펼쳤다·
리사 역시 쌍심지 켠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하나···!”
“날 찾나?”
“···?”
셋은커녕 하나조차 제대로 못 센 상황·
두 여인의 시선이 즉각 한 곳으로 향했다·
긴장감이 웃돌고 있는 무리사이에서 덤덤한 얼굴로 서 있는 한 명의 소년·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몰라도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뭐 뭐야? 대체 어느 틈에?’
로비에 있던 그 누구도 소년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
* * *
꽤나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알고 보니까 내가 원흉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날 찾았다 하니 나타나 주긴 했는데 어째 꿀 먹은 벙어리들 마냥 다들 말이 없다·
딱히 할 말도 없으니 먼저 입을 열기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소 손님? 대체 어느 틈에?”
“아마 마지막 경고를 운운했을 시점부터였을걸?”
나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문 쪽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 당신! 그 그러니까 성함이····”
곁에 있던 수하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꼴을 보니 내 이름을 말해준 듯하다·
“시온님···· 맞으신가요?”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짜 네이밍 센스하고는····]
어차피 쓰다 버릴 가명인데 뭘 바라겠는가?
선수로 참가하기 위해선 가짜로라도 이름을 적어야 한 대서 급하게 써낸 이름이었다·
근데 이 여자 어째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하도 누굴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뭐 매혹이라도 걸린 것 마냥 나를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손님! 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하고 계세요! 얼른 손님을 방으로 모셔드릴···!”
“처음 뵙겠습니다· 시온님·”
태세가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생각보다 수려하신 외모에 많이 놀랐습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램버스타에서 작게 유흥사업을 하고 있는 델키아 브리짓드 라고 합니다·”
나한테 할법한 인사는 아니라고 보는데?
확실한 건 이 여자 정상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왠지 모를 집착이 가득 서려 있었다·
“날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한결같은 어조로 물었다·
“네 맞아요! 사실 저희 측 말단 직원이 근본도 없는 어린 소년한테 짓밟혔다 해서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 시설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지요·”
“당신 쪽 사람인진 모르겠지만 오는 길에 누구 한 명을 짓밟은 건 맞아· 오해는 말아줬음 좋겠어· 먼저 시비를 건건 그쪽이었거든·”
“네 알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저희 쪽 잘못인 것도 인정합니다·”
그럼 왜 찾아온 거야?
설마하니 사과를 하러 왔을 린 없고 좀 전의 분위기로 봤을 땐 분명 보복을 목적으로 찾아왔을 텐데
지금은 그 목적이 온데 간데 사라진 것 같다·
“시간 날 때 한 번 저희 쪽에 놀러 오세요· 시온님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것들이 많이 있거든요· 혹여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 답해드릴게요!”
그녀는 야릇한 미소와 함께 내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본 나는 생각했다·
미친 건가?
내 아무리 속은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라지만
이제 막 털이 났을까 싶은 꼬맹이한테 업소 명함을 줘?
미쳤다고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듯 했다·
“델키아 당신 미쳤어요? 지금 손님에게 뭘 주시는 거예요? 영업 대상이 잘못됐잖아!”
“영업 아닌데? 난 지금 정식적으로 초대를 한 거라고!”
종업원을 이를 갈며 노려보다가도 다시 내 앞에선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혹여 찾아오시려거든 몸만 오시면 됩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몸만 오라는 말에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럼 조만간 뵐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시온님~!”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패거리들이 떠난 뒤 명함을 보고 있는 내게 의문투성이의 종업원이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많이 불쾌하셨죠?”
불쾌했다기보단 좀 어이가 없었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유흥 골목 쪽은 얼씬도 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지금이야 갈 마음이 1도 없다지만
이 종업원 단순히 유흥 골목이라는 점을 떠나 그 여자에 대해 뭔가 꺼려하는 것이 있는 듯 보였다·
“왜 가면 안 된다는 거지?”
“그 그러니까 손님은 아직 어려서 모르실 수 있는데···· 아 암튼 그런 게 있어요! 저 여자의 취향이 굉장히 이상한····”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주시지?”
그녀는 급기야 에라 모르겠다는 듯 소리쳤다·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