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루나브 레인리버 (4)
도합 여섯 명·
따로 도망쳤다거나 어딘가에 숨어 있는 기운도 없다·
일단 처리보다 확인이 먼저인 만큼 급히 마차로 다가갔다·
[난 또 한 명 정도는 살려 둘 줄 알았지· 다 죽일 거였으면 가면은 뭐 하러 쓴 거니?]
나라고 쓰고 싶어서 썼을까?
비록 수면 마법에 걸렸다고 하나 지금쯤이면 깨어있을 거라 생각해 급한 대로 쓰고 온 거다·
한데
“···?”
설마하니 아직까지 자고 있을 줄은 몰랐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얼굴 위로 손을 얹어보았다·
“····”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아주 곤히 잠들었다·
이건 뭐 애초부터 며칠 밤을 새웠다고 봐도 무방한데?
마치 이전까지 취하지 못한 숙면을 몰아서 자는 것만 같았다·
손발의 포박과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줬음에도 그녀는 끝까지 미동조차 없었다·
“후····”
이에 가면을 벗어던지고 묵혔던 숨을 내쉬었다·
허나 한가롭게 앉아 그녀의 잠든 얼굴 따위를 구경할 시간은 없다·
빨리할 일만 하고 돌아가자·
나는 루나브의 몸을 들어 가지런히 눕혀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의 가슴골이 드러나도록 위쪽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쳤다·
그러곤 그 위에 손가락을 얹은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우우웅
6성급 일반 마법인 ‘탐색(Searching)’을 시전 했다·
상대의 몸속으로 마나를 주입하여 대상의 신체 상태를 확인하는 마법·
그녀가 내 신체 등급을 확인할 때 사용했던 능력의 업그레이드 된 마법이라고 보면 된다·
나로선 참으로 오랜만에 쓰는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
느껴진다·
피와 함께 그녀의 전신에 흐르고 있는 마나의 기운이·
다만 활발하게 흐르고 있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꺼림칙한 기운의 무언가가 온전한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마치 혈관 위에 사슬이라도 칭칭 감아 놓은 것 마냥·
“이거였네·”
이런 게 몸뚱아리에 떡하고 있으니 당연히 제 명에 못 살지·
기운의 정체를 확인하고선 바로 눈을 떴다·
[왜? 뭐가 있었는데?]
“하트 커브····”
[하트 뭐?]
케이람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를 수밖에 없겠지·
이건 마법에 미친 인간들의 긍지 높은 연구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
“쉽게 말해 인간의 성장을 억제시키는 장치야·”
대상의 심장과 동일한 크기의 마력 덩어리를 주입해 마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아티팩트·
마치 넝쿨이 얽히기라도 한 듯 그녀의 뛰고 있는 심장에 칙칙한 검은 줄기들이 어지러이 얽혀져 있었다·
[성장을 억제시킨다고?]
아마 그녀로선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분명 리겐스 학회장은 자신의 손녀를 마법의 정점에 올린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그녀를 실험체 다루듯 각종 실험에 투입 시켜 마법 능력을 성장시키는데 박차를 가해왔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난데없는 억제 장치라니·
무슨 개소리냐고 욕을 해도 무방하겠지·
웃긴 건 이 아티팩트를 쑤셔놓은 주체가 다름 아닌 가람 학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걸 누가 심어놓은 건데?]
“당연히 학회겠지·”
[뭐 땜에?]
그들은 아마도 이걸 억제가 아닌 저장의 용도로 쓰려 했다고 본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계속 흐르게 하면 문제가 없다·
허나 어느 순간 그 흐름을 막아내고 억제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의 흐름 자체를 막아낼 순 없는 만큼 흐르지 못한 강물은 점차 쌓이고 불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풀리면?
폭발하듯이 불어나겠지·
한순간의 여파로 인해 주변은 난리가 날 것이다·
가람 학회는 아마 이걸 원했을 것이다·
하트 커브라는 아티팩트로 그녀의 마나의 흐름과 성장을 억제시킨다·
이런 불안정한 신체에 계속해서 마력을 주입한다·
그 상태가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억제 장치를 해제하여 여태 쌓아놓았던 잠재력을 폭발하게 만든다·
가능한 거냐고?
글쎄? 난 안 해봐서 모르지·
다만 이걸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이 뭔 짓을 했을 지에 대해선 똑똑히 알고있다·
수십 수백 번의 인체실험을 거쳐 가장 적합한 루트를 그녀에게 적용시키려 했을 거다·
아마 전생의 루나브는 이걸 버티지 못해 죽은 거겠지·
이건 엄연히 말해 그릇을 키우려는 게 아닌 그릇을 깨트리는 짓이었다·
케이람은 꽤나 이해하기 힘든 듯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이걸 계속 놔두면 얜 결국 죽는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넌 이걸 어찌해줄 건데?]
그걸 아직 못 정했다·
사실 케이람이 말해준 정신감응의 내용은 이것과는 무관했다·
그저 가람 학회를 반대하는 분파 세력이 그녀의 무단 외출 소식을 듣고 학회원으로 위장하여 그녀를 납치하려 했다는 것·
가람 왕국 어딘가에 있는 자신들의 은신처로 데려가 지들 입맛대로 또 실험시키겠다는 일종의 작당 모의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진짜 학회원들이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달려오고 있을 거라 본다·
그럼 루나브를 도와준 이유가 뭐냐고?
별거 없다·
이걸 알면서도 방관했을 때 몰려올 후폭풍이 상당히 귀찮았을 뿐이다·
어쨌든 날 만난 직후 납치를 당한 건데 화살이 나에게 돌아오는 건 당연하겠지·
이대로 적당히 뒤처리만 한 뒤 안전하게만 놔둔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한 손에 다시 한번 마나를 발현시켰다·
-기이잉
왼쪽 가슴 아래 흉골과 척추 사이·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듯
마나를 머금은 내 손이 그녀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투두둑
생각보다 엄청 질기네·
나무에 엉킨 넝쿨을 뜯어내듯 심장을 감싸고 있는 검은 줄기를 거칠게 뜯어냈다·
-화륵
뜯어낸 잔해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태워 없애버렸다·
끝까지 붙어있던 아티팩트의 핵도 완전히 떼어내서 부숴버리니 활기를 되찾은 심장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구원자 아니라던 분 어디 가셨나 몰라?]
케이람은 그런 나를 조롱하면서 꽤나 흥겨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길만 내줬을 뿐이야· 딴 건 없어·”
하트 커브가 없어진 이상 그녀의 수명은 크게 연장되었다·
당장은 모르겠지만 점차 스스로도 느끼겠지 자신의 몸이 변했다는 걸·
그럼 자연스레 마음의 변화도 이뤄질 것이다·
늘어진 수명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회라는 울타리에 갇혀 계속해서 자신을 깎아 먹을 건지 아니면 울타리를 부수고 나와 다른 길을 나아갈지
남은 건 전적으로 그녀에게 달렸다·
혹시 모르지·
본인이 가진 가능성을 스스로 개척한다면 마법의 정점이라는 학회장의 바람을 정말로 이루어 줄 수 있을지도·
새싹이 폈다 해서 그게 꽃이 될지 나무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 * *
“···!”
잠에서 깨어난 루나브는 악몽이라도 꾼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댄 심장·
하지만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잠들기 전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홀가분해진 기분·
짧은 멍 때림의 시간이 끝나고 루나브는 그제 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짐들이 어지러이 쌓여 있고 한쪽에선 싸늘한 바깥바람이 불어왔다·
단번에 마차 안이라 추정하고선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음?”
급기야 바깥쪽 공간의 일부가 물방울 떨어진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결계?”
마법으로 생성된 제한 결계였다·
루나브는 마치 끌리기라도 하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결계를 가볍게 쳐보았다·
-띠잉
결계는 파도처럼 출렁거림과 동시에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루나브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찾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향한 다급한 외침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움츠려 자세히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의 학회원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루나브님?”
그들은 다짜고짜 그녀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루나브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일단 당장은 그래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기억은 나십니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얼굴도 모르는 감시자들이 자신에게 수면 마법을 시전 해 재운 것이었다·
그 사이엔 아무런 기억도 없었고 말 그대로 눈을 떠보니 낯선 마차 안에서 깨어난 상황이었기에 딱히 뭐가 있었다고 말해줄 만한 게 없었다·
“암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설명은 가면서 해드릴 터이니 일단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학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잠들기 전과 같은 상황이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학회원들의 호송을 받으며 마차에 오르는 동안 루나브는 줄곧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속을 얽매이고 있던 무언가가 싹 사라진 기분·
평소엔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할 정도의 개운함·
이와 함께 또 다른 낯선 무언가가 내면에 자리한 것만 같았다·
이는 억제하거나 갉아먹는 느낌이 아닌 자신을 지켜주는 일종의 보호수단 같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많이 화나셨나요?”
루나브의 물음에 학회원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외 외출하신 이유에 대해 잘 말씀하신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단 무사하신 게 중요한 것이니····”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아는 그녀였다·
돌아가면 엄한 꾸지람을 받아야 하겠지만 별로 두렵진 않았다·
이전까진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가 그녀를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으니····
이것은 해탈이 아닌 안심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 * *
현장은 깔끔하게 정리했고 환영 마법을 통해 내 알리바이도 분명하게 남겨 놨다·
만약의 일을 대비해 마차 주변에 제한 결계도 설치해 놨으니 뭐 모래 폭풍이라도 지나가지 않는 이상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즉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다·
허나 귀신도 못 속일 어느 한 분께서 복귀하자마자 방에 쳐들어와 나를 심문하고 있다·
“나 없는 사이에 몸이 그렇게도 근질거렸나 보구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리카 당주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루나브의 일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화장실 갖다 왔더니 없어졌더군요· 설마하니 납치당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정색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납치 사건에 대해선 이미 아카데미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퍼진 상태였다·
“넬라 아로니스 라고 하는 아카데미의 마법 교관이 실종됐어·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가람 왕국 출신의 여성이지· 최근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가람 학회를 지지하지 않는 반대파의 간부였다고 하는 구나·”
아마도 내가 가장 먼저 죽였던 그 회색 로브의 여성을 말하는 듯 했다·
“그럼 그녀가 루나브의 정보를 자기 세력에 뿌린 모양이로군요· 급히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습니다·”
내 태도는 시종일관 한결같았다·
“너 정말 이 일과 관련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니?”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뭘 걸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
케이람은 그런 나와 당주를 꽤나 불쾌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 딴지는 걸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은 없어서 매우 불만스러운 사람마냥·
애초에 자기도 공범이니 뭐라 할 말은 없겠지·
“그래도 연회 사건 때문에 매우 피곤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구나· 네 얼굴을 보아하니 몸이 매우 근질근질 해보여·”
전혀 아닙니다만·
“어차피 다음 학기 개강까지 시간 좀 남았으니 너에게 단독 작업을 주마·”
나는 귀를 의심했다·
“단독 작업 말입니까?”
그녀는 말없이 품에서 검은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하하····”
봉투를 펼친 나로선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