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피의 연회 (6)
사람은 익숙함에 속다 보면 자연스레 안일해지는 동물이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동안 감당할 수 있다는 익숙함에 속아 그녀의 본성을 잠시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케이람은 마검이다·
소유주의 온전한 성취와 바람을 도와주는 착한 성검이 아닌
혼란과 파멸로 인도해 그를 잡아먹으려 하는 성향을 가진 한마디로 주인 좋은 일을 시켜주진 않는 악독한 무구다·
주인에게 고난을 주면 줬지 결코 편한 길을 내어줄 존재가 아니란 거다·
도청방지 결계로 인해 난 황자와 에쉘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즉 전적으로 케이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야만 했고 이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녀가 말한 황자의 계획을 정리하자면 대강 이렇다·
금단의 소환술 ‘마리오네트’를 이용한 분대급의 암살자들 생성
처음엔 단순한 음악가들로 잠입한 뒤 이후 연회장에 미리 심어둔 추가 암살자들과 함께 작전을 개시
거기에 헬하운드와 유사한 소환수들까지 가세하여 황궁에 분란을 일으키고 사전에 배치해둔 ‘데이즈 스톤’을 이용해 설정한 타깃들을 제거한다·
놀랐다기보단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정녕 제국의 차기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황자와 대륙의 두 번째 수호자라 불리는 공자님께서 꾸민 일이라면 사람들은 믿을까?
데이즈 스톤은 제국 마법학회에서 이용은 물론 생성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된 아티팩트다·
물론 그 금지가 모두에게 적용된 것은 아니다·
데이즈 스톤의 성능과 용도 어찌 활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설사 발각이 된다 해도 그것을 커버할 수 있는 신분까지 보장된다면
결국 금지가 아닌 사용 가능한 하나의 아티팩트가 된다·
우리 전능하신 제국의 1황자님이라면 이런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봐야겠지·
일단 다 떠나서 일단 의문이 들었다·
루이넬 황자와 에쉘은 대체 왜 뭐 때문에 황궁에서 그런 난리를 사서 벌이려는 것일까?
황궁의 혼란은 둘째 치고 굳이 나와 아린 황녀에게 그 돌을 줘서 고난에 빠트리게 하려는 이유가 뭘까?
우리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서?
그렇다기엔 너무 뜬금없다·
다소 의심의 여지는 있었을지언정 난 아직 에쉘에게 확실한 위협을 줄 만한 짓은 안 했다·
루이넬 황자와는 아직 일면식도 없으며 아린 황녀는 끽해야 아카데미를 열심히 다닌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그럼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뭔가 다른 꿍꿍이를 꾸미려는 생각이었을까?
이거라면 꽤 가능성이 있을 듯싶다·
황실가의 막내와 공작가의 막내·
힘이나 세력이 있는 건 아니어도 어쨌든 신분의 타이틀은 가지고 있는 존재다·
다시 말해 뭔가를 하기 위한 구실로 써먹긴 딱 좋다는 거지·
혼란 속에서 우리를 암살한 뒤 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할 생각이었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뭐 이것도 추측일 뿐 확실하진 않다·
결국 지금 상황에 저들의 정확한 속내를 파악하긴 무리일 테지·
그런데·
실수한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난 그 녀석들의 속내가 아닌 내 옆에 있는 마검의 속내를 먼저 파악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무슨 꿍꿍이야 케이람?”
쌍심지를 추어올리며 물으니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었다·
[야 누가 보면 내가 거짓 정보라도 알려준 줄 알겠다? 내가 말했잖아· 그녀들은 자신들이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제 삼자를 통해 데이즈 스톤을 전달하기로 했다고· 하나는 그 어린 황녀님에게 하나는 너에게!]
그래 맞다·
실제로 아린 황녀는 목에 차고 있던 펜던트에 데이즈 스톤이 있었다·
케이람의 말대로라면 황자 쪽에서 그녀에게 선물을 빙자해 보낸 거겠지·
그럼 내 경우는?
공교롭게도 난 받은 게 없었다·
정확힌 못 받았다고 해야겠지만·
저 말을 처음 들은 순간 난 내게 데이즈 스톤을 전할 사람이 누구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는 에밀리다·
허나 데이즈 스톤은커녕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일부러 안 준 거 아니냐고?
내가 볼 땐 까먹은 거다·
태어나서 한 번은 올까 싶은 황궁에 발을 들였다 보니 황홀에 젖은 나머지 내게 전해주는 걸 잊은 거겠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그녀니까·
아니나 다를까 에밀리의 주머니 속에 나비넥타이로 위장한 데이즈 스톤이 있었고 난 그걸 그 자리에서 바로 부숴버렸다·
만약 지들 입맛대로 일이 성공했다면 그들은 화살을 에밀리에게 돌리려 했을 것이다·
내 얼굴을 겸사겸사 보면서 그걸 전해주라고 할 생각이었나?
역시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그녀를 데려온 것이 확실했다·
이렇게 어리숙하고 덜떨어진 시녀일 줄은 예상 못 했겠지만····
암튼 난 케이람의 말을 잘못 듣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말을 하지 않은 거겠지·
황녀와 나 둘 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 삼자를 통해 그 스톤을····
잠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쌔 하게 파고들었다·
“제 삼자?”
앞서 말했듯 데이즈 스톤은 제국에서 법으로 금지돼 생성 자체가 불가한 아티팩트다·
설사 황자가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들 이미 상용화가 오래전에 금지된 물건인 만큼 제국 내엔 그 돌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그 돌이 있는 곳에서 가져오거나 전달받으면 된다·
이 대륙에서 아직 데이즈 스톤을 만들고 쓰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단 하나의 집단에서 말이다·
마법에 관해선 아무런 제약과 제한이 없는 놈들·
가람 왕국 마법학회·
그곳이라면 데이즈 스톤을 한두 개쯤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다·
그럼 현재 황궁 내에서 그들과 관련된 제 삼자라 한다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루나브 레인리버?”
[우리 주인이 이제야 좀 눈치를 챈 모양이네?]
케이람은 참을 수 없는 악마의 미소를 띠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주범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연회 전에 나를 찾아왔던 켈린이 분명히 말했지·
루나브와 관련된 황제와 에쉘이 꾸미고 있는 모종의 계략이 있다고·
즉 데이즈 스톤을 이용한 타깃은 나와 아린 황녀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루나브·
그녀 역시 타깃에 포함되어 있었다·
* * *
검은 가면의 남성이 괴한들을 모조리 섬멸한 후 곧 황궁 안쪽에서 지원 병력이 오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입니다! 황실 일원 중 유일하게 쉘터에 못 오신 분이 황녀님이었던 터라 황제 폐하께서 매우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아바마마께선 괜찮으신 건가요?”
“도주 중에 잠깐 지병이 도지셔 발작을 일으키긴 했지만 지금은 무사히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럼 시리카 선생님은요?”
“아 니그리티 가문의 장녀님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분도 무사하십니다·”
시리카가 무사하다는 말에 엘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다행이라 하진 못하겠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사상자는 생각 외로 매우 적습니다·”
이에 엘리스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정말인가요?”
“예· 황궁의 병력이 그레이트 체임버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가면의 괴한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리오네트’라고 하는 마력으로 만든 병력들인지라 시간이 지나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흔적을 조사해본 결과 대부분 상해를 입고 소멸되었습니다·”
그 말은 즉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괴한과 소환수들을 처리했다는 얘기였다·
이에 세 여인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한 존재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니 황녀님께서도 쉘터로 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저희도 모셔드릴 터이니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아린은 흔쾌히 호위를 허락했다·
모두가 행복해야 할 연회 속에서 벌어진 괴한들의 소동·
일단 상황 자체는 끝났다 해도 아린과 엘리스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대체 누가 어떤 연유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진행한 걸까?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본 사건과 관련해 이후에 처리할 일들을 생각하자면 결코 순탄해 보이진 않았다·
“····”
두 여인과 다르게 루나브의 시선은 아까부터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린의 목에 있던 부서진 펜던트였다·
붉은 가루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미약한 마나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에 루나브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갖가지 보석이 박힌 화려한 은팔찌였다·
“뭐 하고 있어요 루나브? 지금 안 가면····”
그녀에게 다가오던 아린이 순간 눈을 멈칫했다·
팔찌 중앙엔 어른 손톱만 한 크기의 붉은 보석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아린의 펜던트에 박혀있던 것과 매우 유사한 보석이었다·
“그 그거 제거랑 굉장히 비슷해 보이는데? 어디서 났어요?”
“저 저랑 황성에 동행한 협회인으로부터 받은 거긴 한데····”
그녀 역시 주변인으로부터 연회에 착용하면 좋을 것 같다며 전해 받았지만 자신에겐 안 어울린다 생각해 그냥 주머니에 넣어뒀던 물품이었다·
아린과의 첫 만남에도 그녀의 얼굴만 봤던 터라 펜던트에는 같은 보석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루나브는 깨달았다·
이건 결코 단순한 보석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 학회에 있을 때 심심치 않게 접했던 마력의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려던 그 순간
“···?”
꽃밭 속을 헤치며 달려오고 있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드니 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히 달려오고 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시안 선배?”
두 여인이 연회 내내 그토록 찾았던 남자·
시안이었다·
그는 마치 비극을 막으려 하는 한 명의 초능력자마냥 그녀들에게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보니 거리가 좁혀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해 루나브!”
다소 얼떨떨한 상황이었던 나머지 루나브는 시안이 소리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피하라고!!”
분명 피하라는 말이었다·
그가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갸우뚱하는 것도 잠시
루나브는 곧 자신의 뒤에서 살기가 솟고 있음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
아직까지 처리되지 못한 흰 가면의 괴한이었다·
괴한은 금방이라도 루나브의 몸을 베어 가르려는 듯 흉측한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루나브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쐐액!
“꺄악!”
묵직한 흉기가 엄청난 속도와 함께 휘둘러졌다·
허나 검이 가른 것은 무지한 공기뿐 제대로 베어낸 것은 없었다·
“크윽····”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루나브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흥건한 땀과 열기가 맞닿은 피부를 통해 온몸으로 느껴졌다·
“서 선배···?”
루나브는 눈을 뜬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괴한이 검을 가르기 직전 시안이 몸을 날려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을·
그녀의 몸은 시안의 두 팔에 감싸져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주르륵
손등을 타고 한줄기의 피가 흘러내렸다·
물론 그녀의 것은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올려 바라보니 시안의 한쪽 어깨에 흉기에 베인 듯 선명하게 나타난 굵은 칼자국이 보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