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황성으로 (2)
애들은 커가는 만큼 식성도 늘어난다고 했던가?
벌써 식탁을 네 번이나 새로 차렸다·
“냠냠·”
키도 두 배로 커지더니 식성도 두 배로 불어난 모양이다·
‘급성장’이라고 해야 할까?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라는 것이 아닌 일정 시기에 다다르면 급격하게 성장하는 현상·
순혈 용도 과연 이러는지 내가 안 봐서 모르겠다만 일단은 그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 보였다·
뭐 내가 여자 옷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우선 내 제복을 입혀놓긴 했는데
저래놓고 보니 꽤 귀티가 나긴 한다·
저 상태로 여기 입학시키면 딱이긴 하겠네·
“브라이언?”
“예 도련님·”
“빠르면 내일쯤에 황성으로 갈 거야· 출발할 수 있게 준비 좀 해줘·”
“결국 가시는군요? 알겠습니다!”
브라이언은 여정 준비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마차 정비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할 게 많을 것이다·
[저 꼬맹이 아니 꼬마 아가씨는 어쩌려고?]
케이람이 뚱한 얼굴의 나를 보며 물었다·
“베르트 가의 새로운 막내라고 하면 믿어줄까?”
[왜? 그냥 진짜 네 딸이라고 하지?]
좋은 수가 안 떠오르니 영양가 없는 말들만 나온다·
저리 커버린 마당에 품에 안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 모습이라면 시녀로 위장시킬 수 있긴 한데····”
물론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다·
저 뿔이랑 저 날개랑 저 꼬리가 있는데 누가 평범한 인간 시녀로 보겠는가?
하다못해 저걸 숨길 수라도 있다면····
“푸아! 배부르다!”
식사를 마친 나나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배를 문질렀다·
-슈숙
그 순간 마치 새가 날개를 접듯 나나의 뿔과 날개가 거짓말같이 모습을 감춰버렸다·
“···?”
나와 케이람은 두 눈을 의심했다·
[뭐야 꼬맹이? 너 뿔이랑 날개 어디 갔어?]
“어 그러게?”
그녀가 기지개를 켜듯 몸을 꿈틀거리니 숨겨졌던 뿔과 날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너 그거 숨길 수 있는 거였니?”
“응? 그런가 봐? 갑자기 되던데?”
나나는 보란 듯이 뿔과 날개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이것도 급성장의 여파인가?
다소 어이없긴 해도 이건 지금 우리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꼬리는? 꼬리도 숨길 수 있어?”
“꼬리? 잠깐만 한 번 해볼게·”
두 손을 앙증맞게 쥔 그녀가 기합과 함께 힘을 끌어올리니·
-쏘옥
무슨 뱀이 굴속으로 빠르게 숨어들 듯 그녀의 꼬리가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본 순간 바로 나나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나나야?”
“응?”
“나들이 한 번 갔다 오자·”
* * *
-콰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차게 열린 저택의 문·
열렸다기보단 부서졌다는 게 맞을 듯 보였다·
대기하고 있던 상급 기사들이 모두 몰려들었지만 그 누구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쓸쓸한 찬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남색 빛의 머리카락·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심을 자극할 만큼 살벌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마저도 아름답게 보이는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기사들은 서로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머니 아니 공작부인 어디 있어?”
살기가 담긴 듯한 섬뜩한 어조에 기사들 중 일부는 몸을 움츠렸다·
“이 이 층에 계십니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저택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이윽고 2층으로 올라간 그녀가 공작부인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히니
당황을 금치 못한 공작부인 마가렛 에르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 엘리스?”
3년간 소식이 감감했던 가문의 둘째 엘리스 베르트였다·
그녀의 눈엔 이유 모를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이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아무런 기별도 없이 대체 어디 있었던 거니?”
마가렛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지만 엘리스는 아무 말 없이 마가렛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둘만 있는 방에는 어색한 적막만이 흘렀다·
“그동안 잘 계셨어요· 어머니?”
이내 엘리스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는 동안 어머니 생각이 참 많이 나던걸요?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그 그랬니? 그냥 오면 되지 뭘 또 선물까지····”
관계상 모녀지간이긴 해도 둘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마가렛은 생각 외로 달갑게 나오는 엘리스가 이상하면서도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내심 기대를 했다·
-짝!
청량한 파열음이 울렸다·
마가렛으로선 차마 상상도 못 한 선물·
얼굴 한쪽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분노에 잠식된 엘리스의 눈은 이와 반대로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네 네년이! 기어코 미친 것이냐!?”
뺨을 감싸 쥔 마가렛이 엘리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미쳐요? 내가? 미친 건 당신이겠죠· 마가렛 공작부인·”
“뭐?”
엘리스의 어조에는 이미 그녀에 대한 존중은 사라져 있었다·
“당신을 이해 못 한 건 아니에요· 순수 귀족 신분인 당신에겐 나와 시안은 눈엣가시만도 못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난 당신을 어머니로 대하려 했어! 최소한 예의와 존중은 지키려 했다고!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여?”
“내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짓은 지금 네년이···!”
“시안을 죽이려 했잖아!!”
엘리스는 그동안의 감정을 담아 폭발하듯 소리쳤다·
이에 마가렛은 순식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잘 클 수 있는 아이인데! 그 어린 것이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죽이려 한 거냐고!”
“즈 증거를 대라 증거를! 내가 시안을 죽이려 했다던 증거가 있느냐!”
엘리스의 눈은 확고했다·
“브라이언 켄드릭!”
“···!”
“2년 전 당신의 사주를 받고 시안의 암살을 지시하라 했던 벨리아스의 정식기사였죠? 지금은 시안의 수호 기사로 활동하고 있더군요·”
마가렛의 손이 미칠 듯이 떨리고 있었다·
“시안이 아무런 말도 안 하니까 그냥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나요? 어떻게 지금까지 이리 뻔뻔하게 살아오신 거죠? 아버지가 알면 가만히 계실 것 같나요?”
초조한 마음에 온몸을 떨던 것도 잠시
이를 아득바득 갈던 마가렛이 급기야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이게 다 너희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이 날뛰어서 그런 거다! 출신도 불분명한 것들이 공작가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면 곧이곧대로 살 것이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쳐? 애초에 시안 그놈은 이 집에서 필요 없는 존재였다!”
-빠직!
뭔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스의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커헉!”
멱살을 잡힌 마가렛은 순식간에 이끌리더니 엘리스의 얼굴과 맞닿아 버렸다·
“필요 없는 존재라 하셨나요? 재밌네요! 우리도 한 번 판가름해볼까요?”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서로를 죽일 정도로 싸웠다고 하면 아버지는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요? 부인인 당신과 딸인 나 둘 중 과연 누구의 편을 더 들어 주실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공작부인께선 본인의 말을 더 들어주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으신가요?”
“다 당연하지! 난 엄연히 이 집안의 정실인···!”
엘리스의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착각하지 마 공작부인! 이 집안이 어떤 곳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가문의 유지만 이을 수 있으면 그게 딸이든 부인이든 아님 근본도 없는 아들이든 아무 상관없다고!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흑!”
잡은 멱살을 맥없이 풀어버리니 균형을 잃은 마가렛이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엘리스의 눈에는 여전히 살벌한 기운들로 가득했다·
“경고하는데 다시는 시안 건드리지 마세요! 또다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뺨 한 대가 아닌 더한 선물을 받게 될 테니까요!”
진심이 담긴 경고와 함께 엘리스는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마가렛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하! 어디서 되도 않는 것들이 감히····”
그녀는 좌절이 아닌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필요 없는 존재? 어차피 그 아이 앞에선 다 무가치할 뿐이지! 네놈들이 암만 잘났다고 발악해봐야 그 아이에겐····”
의미 불명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모습은 실로 기괴하여 마치 악마의 흐느낌을 보는 것만 같았다·
* * *
공작부인과의 담판을 끝내고 저택 밖으로 나온 엘리스에게 한 여기사가 다가왔다·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엘리스 님·”
축하라는 단어를 쓰기엔 조금 애매한 상황·
엘리스는 개의치 않고 답했다·
“오랜만의 만남인데 상황이 좀 그렇네? 잘 있었어 세실리아?”
“저야 뭐 항상 똑같았죠·”
빛의 기사단 소속의 상급 기사 ‘세실리아 리엔’·
과거 엘리스를 보살폈던 전속 시녀로 그녀와는 시녀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이 상황을 예상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공작님께서 엘리스 님을 찾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이제 막 영지에 도착한 그녀에게는 다소 이른 호출 명령이었다·
조금 놀라긴 했어도 난감해할 이유는 없기에·
엘리스는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알겠어· 바로 가자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함께 엘리스를 경계문으로 인도했다·
인간계의 분계 지점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윽고 베르트 공작이 있는 후방 캠프 막사에 도착하니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
엘리스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은 집무를 보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그녀를 위한 자리는 만들어져 있었다·
“어서 오거라· 엘리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몇 년 만에 상봉하는 부녀치곤 다소 딱딱한 분위기·
음산한 전선의 공기가 그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여정은 잘 마친 것이냐?”
“네 잘 마쳤어요·”
여정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그 뒤가 문제여서 그렇지·
“그런 것 치곤 어째 얼굴에 화가 넘쳐 보이는구나·”
“이미 제가 저택에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알고 계시는 건 아니고요?”
공작은 침묵으로 답했다·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여쭐게요· 공작님 아니 아버지!”
심지어 사적인 자리도 아닌 전선 안에서 그를 공작이 아닌 아버지로 부른 것·
그것만으로도 지금 엘리스가 얼마나 분노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시안을 암살하려 했다는 거 아버지도 알고 계셨나요?”
“····”
공작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엘리스는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아무리 대륙의 평화가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자기 자식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변명할 생각은 없다· 엘리스·”
공작의 어조는 차갑고 무거웠다·
“난 이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마족으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것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해 왔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베르트 가문의 유지란 그런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시안을 알면서도 방관한 이유? 별거 없다· 그 아이가 고작 그런 일로 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그 어린아이가 6명의 기사를 죽이고 아카데미까지 홀로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마음을 바꾼 수호 기사 한 명 덕분에? 정말로 그랬을까?”
천재 소리를 밥 먹듯이 들었던 엘리스도 지금만큼은 공작의 말을 깨닫는 데 다소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지금 아버지께선 ‘시안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암살자들을 모두 자기 손으로 죽였다’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공작의 눈은 덤덤하면서도 확고했다·
“네 동생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할지 모른다·”
“하 하지만 그 아이는 아직····”
공작은 더듬거리는 그녀에게 말없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황실에서 온 연회 초대장이다· 늘 그렇듯 난 갈 수가 없으니 네가 가줬으면 하는구나· 가서 머리라도 좀 식히고 오거라·”
용무를 끝낸 공작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진영 캠프로 복귀하겠다· 조심히 돌아가거라· 엘리스·”
딸을 놔두고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3초도 되지 않았다·
막사에 홀로 남은 엘리스에게 세실리아가 다가왔다·
“본의 아니게 공작님으로부터 휴가를 받았습니다· 당분간 엘리스 님의 곁을 지켜 달라 하더군요·”
엘리스는 굳은 시선으로 공작이 남기곤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세실리아·”
“네· 엘리스 님·”
“나 말고 또 이 연회에 참가하는 형제가 있을까?”
“에쉘 도련님이 참가하심과 더불어 들리는 얘기로는 5황녀인 아린 세벨러스 님께서 막내 도련님께 개인적으로 초대장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린 황녀님이?”
그녀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리면서도 뭔가 결심이 선 듯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황성으로 가자· 세실리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