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엘리스 베르트 (1)
희미한 먼동이 트고 있는 이른 새벽·
어둑한 새벽빛과 어우러진 한 여인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곱게 휘날리고 있었다·
“떠나는 거니?”
불현듯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주먹만 한 크기의 정령이 투명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배웅해주러 나오신 거예요?”
“오해하지 말렴· 그저 새벽 공기를 마시러 나오다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니·”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여인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아쉽긴 하지만 그냥 떠난다는 편지 하나만 두고 조용히 나왔어요·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요·”
“민폐라···· 그 아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여태 보여줬던 것과 달리 이상한 곳에서 부끄럼을 타는구나?”
“그런가요?”
속에 묻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2년 동안 낯선 외지인 돌봐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곳에서의 일들은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남겨둘게요·”
“딱히 좋은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을진 모르겠구나· 그나마 가져갈 좋은 추억이라도 있으면 다행인 거지·”
정령의 말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고향으로 가는 거니?”
“그렇긴 한데 일단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요· 지금의 시간이 있기까지 저를 이끌어 주신 분을 만나야 하거든요·”
“그렇구나· 알겠다· 조심해서 돌아가렴·”
“네! 마리안 님도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오래오래 살라는 말에 정령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었다·
암만 그래도 인간의 수십 배는 넘는 수명을 가진 존재보고 오래 오래 살라니 참 어찌 반응해야 모를 묘한 기분이었다·
여인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몸을 돌린 뒤 곧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정령은 한동안 그녀가 떠난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그것을 다 펼치지도 못한 채 일찍 요절할 상을 가졌으니····”
정령은 못내 아쉬움이 남은 듯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바엔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한 번 잘 살아 보거라 엘리스 베르트····”
허나 할 수 있는 건 무의미한 동정 밖에 없기에
정령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빛이 들지 않는 숲속으로 되돌아갔다·
정령이 머물렀던 자리엔 미약한 신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 *
“신분 확인하겠습니다·”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성문 앞·
출입 수속을 위해 신분증을 요구하니 여인은 품에서 문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
각기 다른 세 개의 검이 교차되어 있는 금색의 문장·
이것은 우시프 제국의 유력 가문중 하나인 베르트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즉 이걸 가지고 있단 것 자체가 베르트 공작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셈·
경비병은 급히 눈을 크게 뜨고 문장을 건넨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에····”
깊은 바다의 깨끗함이 느껴지는 남색의 머리카락·
악의 한 점 보이지 않는 순수한 은빛의 눈동자·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자극시키는 매력적인 몸매까지·
이 모습에 이 문장을 갖고 있을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에 엘리스 베르트 님?”
통칭 신의 아이·
베르트 공작가의 둘째이자 로열 아카데미의 졸업생 엘리스 베르트였다·
“졸업하긴 했지만 아직 출입 자격은 있는 거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저 미소를 보고서 출입을 허가하지 않을 위인은 없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만큼 그녀는 간단한 수속 절차를 마친 뒤 바로 도시 안으로 진입하였다·
졸업 이후 무려 3년 만의 방문·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주변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돌아갔다·
여신을 연상케 하는 매력적인 용모에 가슴이 안 뛰는 이가 없었고
전신에서 뿜어지는 진한 마력의 향기에 땀을 안 흘릴 이가 없었다·
허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스는 평온한 얼굴을 한 채 금색 도로를 따라 아카데미로 나아갈 뿐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발자취를 따라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 본관의 최상층 총장실이었다·
“····”
집무를 보던 총장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딱 3년 만이구나·”
마치 예정된 손님을 맞이하는 것 마냥 쿤델 총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혹여 쫓겨나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요·”
16살 신의 아이로 칭송받았던 소녀는 3년이 지난 지금 그냥 여신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매력적인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엘리스는 소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3년 동안 대륙을 탐방해본 소감은 어떠하더냐?”
“사실 대륙 탐방이랄 것도 없었어요· 2년 동안 쭉 ‘프루이나’에 머물렀었거든요·”
“화이트 엘프의 영지 말이냐?”
총장은 놀랍다는 듯 눈썹을 추어 올렸다·
“인간이 환영받을 만한 땅은 아니었을 텐데?”
“총장님께서 말씀하셨던 화합의 의미를 가장 잘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불신과 거부가 가득한 집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과연 얼마만큼 빛을 발휘할 수 있을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들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대륙 북부의 하얀 대지 프루이나·
그곳의 거주민인 화이트 엘프는 수백 년간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며 인간의 접근을 극도로 거부하는 이종족이었다·
사실상 발을 딛는 즉시 벌거숭이가 되어 쫓겨나도 모자랄 판에 무려 2년을 거주하며 마치 현지인인 것처럼 동화되었다고 하니
총장은 진정 그녀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총장님께선 딱 3년 전 졸업을 앞둔 제게 여러 말씀을 해주셨었죠? 혹시 기억하시나요?”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는 조언이란 것 자체를 아무에게나 해주지 않기에·
‘너는 결국 어디에 있든 간에 네가 속해 있는 조직과 집단은 크게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너란 존재가 과연 어디에 존속해 있을지에 대해선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신의 아이라고 불리며 천의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던 만큼 졸업 후 그녀가 있을 곳이 곧 대륙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총장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서 총장은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행의 시간을 가지라고·
특별한 저의는 없었다·
그저 총장이기 전에 한 명의 교육자로서 학생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제시했을 뿐·
이에 엘리스는 총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이전보다 한층 더 또렷해진 결의가 돋보이고 있었다·
“그 눈을 보아하니 결심이 선 모양이로구나·”
“네· 더 고민해봐야 어차피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걸 느꼈거든요·”
엘리스의 말에는 다소 씁쓸한 감정이 동반되어 있었다·
총장은 애써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먼저 말하길 기다려주었다·
“빛의 기사단으로 갈 겁니다·”
“···!”
총장의 눈이 이번에는 조금 찌푸려졌다·
빛의 기사단·
빛의 신 루멘델을 신봉하는 교리에 따라 대륙의 평화를 추구하는 제국의 고위급 기사단이었다·
소속 기사들 대부분이 무인으로서 최고 경지에 오른 상급 기사들로 대륙의 수호자인 베르트 공작의 지휘하에 마수들로부터 대륙을 수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다·
사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엘리스를 알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졸업 후 당연히 빛의 기사단으로 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6세의 나이에 다다른 6성급의 경지·
물 속성 88%라는 경이로운 속성 수치·
숙련된 아카데미의 검술 교관들조차 가볍게 꺾어버리는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이가 아버지이기도 하니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최적의 집단이었다·
총장은 엘리스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결코 모르지 않았다·
“즉 네 가문의 유지를 잇겠다는 거구나·”
아버지인 베르트 공작을 따라 대륙을 수호해야한다는 가문의 유지를 이으려는 것·
허나 총장은 그녀가 빛의 기사단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유는 설명하기 난감했다·
아끼는 학생에 대한 애정?
늙어빠진 노인의 헛된 촉감?
왠지 그녀가 빛의 기사단으로 간다면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것만 같았기에
총장은 여행의 시간을 제시하며 그녀의 마음이 혹시라도 변할 수 있기를 무척이나 바라고 있었다·
“결국 제 마음이 그러더라고요·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이 일· 제가 할 수 있고 제가 짊어질 수 있으니 제가 해야겠죠· 적어도 지금 이곳을 다니고 있는 동생들이 편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죠····”
동생이라는 말에 쿤델 총장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동생들이라 했느냐?”
“네 맞아요! 총장님도 아시죠? 크란츠랑 시안이라고! 걔들은 말썽 없이 잘 지내고 있나요?”
총장은 쉽사리 답을 내지 못했다·
“총장님?”
“넌 네 동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대신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엘리스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이 일단 크란츠의 경우는 조금 악독한 구석이 있지만 지도만 잘해주면 분명 좋은 남자로 자랄 수 있을 것 같고····”
크란츠에 대해선 딱히 반문하지 않았다·
“시안의 경우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배울 게 많은 아이라고 생각하고요! 단지 조금 소심한 게 단점인··· 왜 그러세요 총장님?”
총장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다르게 심히 굳어져 있었다·
이에 엘리스가 놀란 얼굴로 물으니 근 10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엘리스····”
“네?”
“넌 네 동생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느냐?”
급격하게 바뀌어 버린 분위기에 엘리스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3년 전 난 네게 이런 말도 했을 거다· 난 내 손을 거쳐 갔던 학생들 중 속을 파악하지 못한 학생이 딱 한 명 있었다고····”
물론 그 한 명이 엘리스는 아니었다·
“허나 이제는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너와 관련된 인물이지·”
“도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똑똑
별안간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
문 쪽을 보던 총장은 작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 한 사람이 지금 막 도착했구나·”
“···?”
“들어오거라·”
-끼익
문이 열리면서 엘리스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황혼의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진한 흑발과 날카로운 눈·
키는 그녀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작은 160후반·
허나 얼굴은 앳된 느낌이 다분한 소년이었다·
조금 인상이 바뀌긴 했어도 엘리스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시안?”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이자 그녀의 동생 시안 베르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