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연결고리 (2)
로열관은 총 6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 방이 위치한 곳은 2층 왼쪽 끝
그리고 현재 나와 브라이언이 위치한 곳은 3층 복도 오른쪽 방향·
그곳에 누가 사냐고 물어본다면 방금 전 나와 체력 단련장에 마주쳤던 어느 나라의 황녀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 그것까진 상관없는데····
“파파!”
대체 왜 네가 거기 있는 거니?
나를 발견한 나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그대로 복도를 질주하였다·
“파파···?”
파파라는 말에 두 여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 제발 그 말만은 안 하길 바랐는데····
나는 달려오는 나나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해 보았다·
곱게 둘러져 있는 망토·
접혀 있는 날개·
옷 속으로 교묘하게 숨은 꼬리까지·
누가 봐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전형적인 어린 아이의 모습·
다행까진 아니어도 어쨌든 불행은 넘겼다고 해야 하나?
일단 용의 모습을 들킨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나는 급히 옆에 있는 브라이언에게 신호를 보냈다·
“···!”
신호를 받아들인 브라이언은 달려오는 나나를 그대로 번쩍 들어 안았다·
“자 나나야 이제 그만 방으로 가자!”
“왜? 나 아직 더 놀고 싶어!”
나나를 확보한 그는 황녀에게 고개를 숙인 뒤 황급히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린 황녀 또한 기다리지 않고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시안?”
뜬금없이 나나를 데려간 것에 다소 화가 난 듯 보였다·
“잘 놀고 있는 아이를 왜 갑자기··· 설마 네 아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사촌 동생입니다·”
덩달아 달려온 레시무스도 내게 물었다·
“하지만 시안님을 보고 파파라 하던데····”
“어디까지나 애칭일 뿐이야·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곧잘 파파라 불러·”
애초에 열한 살인 내가 저 애의 아빠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녀들도 이제 열한 살에 불과한 나이·
아직 그쪽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박히지 않았을 나이니 그다지 무리는 아닌 것 같기도···?
쓸데없는 생각이란 것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촌 동생이라고···?”
“예· 사촌 일가가 루웬에서 볼일이 있다 하여 잠시 그녀를 맡아두고 있었습니다· 혹 저 아이를 어디서 발견하셨는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러니까··· 네가 단련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나타났어· 파파를 찾고 있다길래 가족을 잃은 아이인가 싶어서 우리가 데리고 있었지····”
이 꼬맹이가 벌써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배웠나?
뭐 어쨌든 딱히 다른 사람이랑 접촉하진 않았다는 거군·
반응을 보니 용인의 신체를 본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적당히 돌봐줬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 뭐 어쨌든 가족을 찾아서 다행이네· 설마하니 시안의 가족일 줄은 몰랐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아이를 굉장히 좋아하나 보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나가 네 자랑을 꽤 많이 하더라고! 자길 굉장히 예뻐해주고 잘 챙겨준다던걸? 파파라고 하길래 당연히 아빠 얘길 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시안 네 얘길 한 거겠지?”
난 또 뭐라고····
나는 있는 대로만 챙겨줬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럼 저 아이 아니 나나는 언제 가는 거야?”
“오늘 떠납니다· 안 그래도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떠난다는 말에 서운함이라도 느낀 걸까·
그녀의 눈빛에서 아쉬운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래? 왠지 인사도 없이 가는 것 같아 아쉽네· 혹시 마지막 인사라도 할 수 있을까?”
사촌 동생이라고 둘러놓고 이제와 인사하는 것도 막는다면 더한 의심을 살 수도 있을 터·
뭐 적당히 얼굴만 보여준 다음에 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대답하려는 순간
“파파!”
불현듯 계단 밑에서 치고 올라온 앙증맞은 목소리가 내 귀를 강타했다·
이에 순간적으로 번쩍 뜨인 내 눈이 계단 밑으로 향했다·
돌아간 시선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망토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검붉은 날개였다·
“···!”
두 팔을 쫙 편 상태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니 나를 향해 날아오는 당돌한 꼬맹이·
그 뒤론 온갖 처절함이 느껴지는 얼굴의 브라이언이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차마 대처방안을 생각할 틈도 없이 나나의 해맑은 얼굴은 이내 내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귀신이 바람이라도 분 듯
나나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후드가 살며시 벗겨져나갔다·
-스르륵
연한 분홍색 머릿결 사이 앙증맞게 튀어나온 두 개의 뿔·
그것은 인간으로선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위치한 신체부위였다·
나는 황급히 손을 올려 표적의 목을 끊어낼 듯한 빠른 움직임으로 나나의 후드를 다시 씌워냈다·
이윽고 다시 3층으로 올라온 브라이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나나가 갑자기 도련님께 가겠다면서 뛰어나가서는···!”
지금 이 순간 브라이언의 말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있어서도 안 되고 보아서도 안 될 이 광경을 몇 명이나 봤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살며시 시선을 들어 아린 황녀와 레시무스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도 저런 표정은 안 짓겠네·
그녀들의 벌어진 눈과 입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말없이 정적만 흐르고 있는 네 명의 남녀·
그 사이에 있던 나나는 뭔가 문제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 * *
“그 그러니까··· 시안이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아이고 그저 아카데미로 오기 전에 우연히 발견했었단 거지?”
“예· 사실 알일때까지만 해도 정말 깨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천역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저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것 같아·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이라니 딴것만 봐서 우리랑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똑같은 방 똑같은 가구 똑같은 구조·
내가 생활하는 공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로열관 기숙사·
허나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로열관 3층 오른쪽 끝 방·
우시프 제국의 5황녀가 어느 평민 출신 명예 귀족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
즉 아린 황녀의 방이었다·
상황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왔다지만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와중에 브라이언은 마치 마네킹이라도 된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제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뭐 나름 평민으로서 황실 일가의 방에 들어선 거니 긴장이 될 만도 하겠지·
허나 그런 브라이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린과 레시무스는 아직도 현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나나의 귀와 꼬리를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나는 그 와중에 기력이 다했는지 소파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 그럼 이 아이는 지금 시안 네가 방에서 키우고 있는 거야?”
“예 뭐 그렇습니다· 주인 없는 아이이기도 하고 넓은 방에 혼자 있는 것도 적적해서 제 기사와 함께 키우고 있습니다·”
“어쩐지 네가 수업에 좀처럼 안 나왔던 이유도 나나를 돌보기 위해서였구나·”
뭐 딱히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지만 그렇게 생각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으니 그냥 긍정하기로 했다·
“안타까운 아이네·”
못내 안쓰러운 마음이 든 듯 아린은 자고 있는 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드래곤과 인간···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아이인 거지?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테니까····”
그녀에게서 자신의 처지가 투영되기라도 한 것일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나가 가지게 될 비애를 아린 황녀는 이미 예상한 듯 했다·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시안은····”
글쎄 이걸 좋은 일이라 해야 할진 모르겠다·
난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할진 각자의 몫이겠지만····
“시안은 이 아이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 알려지길 원치 않는 거지?”
“그렇습니다·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는 아이니까요·”
“그래 그럼 나도 황녀의 이름을 걸고 나나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레시무스도 그럴 거지?”
“물론이에요 아린님! 전 굳이 말할 사람도 없는걸요·”
잠시 뜸을 들인 뒤 나지막이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불행해진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나나가 불행해지는 건 나도 원치 않아····”
그 잠깐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다는 건가?
뭐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다른 꿍꿍이가 있을 여자도 아니지·
“그 그 대신····”
“···?”
“그 그냥 이따금 네 방에 놀러가도 될까?”
“예?”
순간 잘못 들은 것 같아 바로 되물었다·
“오해하지 마! 아무런 악의 없으니까! 그저 가끔씩 나나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뿐이야!”
가지런히 모인 양 손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
조심스레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뭐 그 정도라면 딱히 문제될 건 없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신 잦은 출입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녀님께서 다른 귀족의 방에 출입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일 테니까요·”
“응 명심할게····”
그녀는 곤히 자는 나나의 얼굴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를 여자란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 * *
대화를 끝낸 시안은 나나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창밖의 해는 어느덧 서쪽 하늘 너머로 저물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네? 오늘 단련은 방에서 해야겠다·”
아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레시무스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기분 좋으신가 보네요?”
“음? 그 그래 보여?”
조금 당황한 듯 아린은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에 미소가 한 가득이신걸요? 시안님과 대화를 나누신 게 그리도 좋으신 거예요?”
레시무스는 이미 꽤 예전부터 시안에 대한 아린의 마음을 적잖이 눈치 채고 있었다·
“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레시무스!”
정작 당사자는 스스로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냥··· 지금은 그나마 작은 연결고리라도 생긴 것 같으니까 그게 좋을 뿐이야····”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들만 알고 있는 비밀의 연결고리·
그것을 시안과 공유하고 있다 생각하니 둘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은 가까워진 거겠지···?’
그 거리가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아린은 마음속으로 소망하였다·
* * *
[뭐야? 나 자는 사이에 그런 재밌는 일들이 있었던 거야?]
재미는 개뿔·
아카데미 전체를 안 뒤져서 그나마 다행인거지·
[요 꼬맹이 기특하네? 벌써부터 기고 먹고 나는 것도 모자라 탈출까지 하고? 지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아주 크게 자라겠어?]
그 아빠란 거 설마 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근데 입막음의 대가치곤 너무 속보이는데? 그 어린 황녀님이 과연 이 꼬맹이나 보려고 네 방에 오겠다는 걸까? 왜 이참에 매혹적인 마검도 같이 산다고 말하지?]
“너 네 입으로 그런 말하면 부끄럽지도 않냐?”
케이람은 뭐가 문제냐는 듯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암튼 이러나저러나 운이 좋았다는 건 알고 있지? 이 꼬맹이 앞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자랄 거야· 그 말은 즉 들킬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진다는 거지·]
알고 있다·
나나의 빠른 성장 속도는 이미 내 예상 범주를 벗어났기에
이대로 가다간 그녀의 신기가 로열관 밖까지 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얘를 진짜 어찌해야 하지?
이런 내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나는 그저 브라이언이 사온 간식에만 푹 빠져있었다·
“차라리 지금 같은 때에 산책을 시켜주는 건 어떨지요?”
고뇌에 빠진 내게 브라이언이 말했다·
“산책?”
“무작정 안에서만 지내기엔 나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처럼 모두가 잠들 시간에 바깥으로 데려가 구경을 시켜주는 게 어떠신지요?”
나는 잠시 브라이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또 이럴 때 보면 똑똑한 것 같단 말이야?”
“···?”
브라이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