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My People (3)
피로 얼룩진 두 눈과 흐릿해진 시야·
그 속에 담겨 있는 낯설지 않은 존재·
브라이언은 급기야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칠흑의 밤보다 어두운 흑발 일직선을 그리는 무신경한 눈·
앳된 얼굴과는 상반된 살벌한 기운까지·
이런 느낌을 가진 사람은 그가 알기로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도 도련님···?’
그가 모든 걸 바치기로 맹세했던 주군 시안 베르트가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감기기 일보직전이었던 눈이 번뜩 떠진 순간·
‘뭐하냐’는 질문에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은데 다친 목에선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끄아아악!”
반면 주위에선 성대가 끊어질 정도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브라이언을 구타하고 고문했던 용병들이 저마다 잘려나간 신체부위를 붙잡으며 고통을 남발하고 있었다·
시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브라이언의 목을 쓰다듬었다·
“성대 다쳤구나? 그러니까 말을 못 하지· 말도 못 할 정도로 처맞은 거야 아님 맞다 보니 말을 못 하게 된 거야?”
‘후자입니다’ 라며 말하고 싶어도 그것마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내가 주변에 까마귀들 서성이는 거 모를 줄 알았냐?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그냥 냅다 달려오면 되지· 이건 뭐 나를 위해서 모든 걸 바치겠다더니 되도 않는 같잖은 곳에 목을 내주고 있네? 너 종자 맞냐?”
그야말로 유구무언이 아닌 무구유언(?)의 상황이었다·
분명 혼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멋쩍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기쁜 마음이었다·
급기야 브라이언은 시안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기가 찬 시안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됐다 됐어· 여태 실컷 두들겨 맞은 얘한테 뭔 말을 더 하겠냐? 상태 보니까 죽을 지경까진 아니네· 그냥 상황 끝날 때까지 잠이나 자고 있어·”
시안은 피로 얼룩진 브라이언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
분명 가볍게 스쳤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잠이 솔솔 오며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살려 달라는 비명소리가 연신 들린 것 같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기분·
이내 브라이언은 얼마 못 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 *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했던가?
내가 옛말을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 말 하나만큼은 진짜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뭐? 누가 누구한테 뭘 해서 어떻게 하겠다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게 과연 열한 살 애새끼 입에서 나올 말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떡잎이라서 안 뽑고 어린 애라서 봐준다?
그런 같잖은 정신은 기사 놈들이나 챙기라지·
떡잎이 자라 나무가 되는 거 금방이고 악동이 자라 악인이 되는 거 금방이다·
그러니 그 떡잎이 올바르게 자라도록 잘 다듬어 주는 게 중요한 것이다·
“너 너 대체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주저앉은 배럿은 포효하듯 소리쳤다·
누가 보면 벌써 모진 고문이라도 한 줄 알 터·
허나 배럿의 사지는 아직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그 말은 즉 난 녀석한테 아무런 짓도 안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놈은 필사적으로 물러났다·
“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시안 공자! 난 당신의 기사를 해하려 했던 게 아니에요! 그 그래 저놈이 수상한 꿍꿍이를 꾸미는 것 같아서 심문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듣자하니 당신을 죽이려고 해서 그래서···!”
태세 전환이 아주 협곡에 사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같잖은 혀 놀림을 오래 들어줄 생각은 없기에 계속해서 뒷걸음치는 놈의 왼발을 콱 하고 밟았다·
-콰직!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끄아아악!”
뼈가 부러진 고통에 배럿은 크게 울부짖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살포시 몸을 숙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뭐 어쩌겠다고?”
녀석은 쌍심지를 치켜 올린 증오의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나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나 배럿 루이밀이야! 내가 화나면 아무도 날 못 말린다고! 지금 느끼는 아픔의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아무래도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질문을 했으면 답을 해야지 무슨 되도 않는 딴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녀석의 한쪽 손을 살며시 부여잡았다·
“뭐 뭐하는 거야···?”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고 투박한 느낌·
중간 중간 상처 자국도 있는 것이 차마 귀족의 손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지경이다·
혹여 남들이 보면 노역이나 수련을 많이 해서 그런 건 아닐지 착각할 지도 모르지·
한데 이건 그렇게 해서 생긴 상처들이 아니다·
“어지간히도 쥐어 팼네····”
이른바 구타의 흔적들·
맞아서 생긴 게 아닌 스스로의 가학 행위들로 인해 생긴 상처인 것이다·
즉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폭력을 일삼았다는 거지·
정말 크게 성장할 재목이 아닐 수 없다·
“무능한 주인을 만나면 아랫놈들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뭐 맞는 말이라고 봐···”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내 안일함으로 인해 결국 브라이언이 화를 입었으니까·
“근데 생각해 보면 그거 굉장히 불공평하지 않아? 무능력한 주인 때문에 피해는 아랫사람이 보는데 주인이라는 놈은 아무런 책임도 안 지잖아· 너도 그렇고?”
주변에 널린 이 시체들을 봐라·
무능력한 주인으로 인해 방금 전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 녀석의 수하들이다·
주인 잘못 만나서 결국 좋은 꼴을 못 본 놈들이지·
이 되도 않는 자식 하나 때문에·
“무 무슨 말을 하는··· 아아악!”
품속에서 꺼낸 케이람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배럿의 몸은 마치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크게 팔딱였다·
남에게 고통을 선사할 생각이라면 그만큼 자신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는 해야 한다·
이런 도신이 살을 파고드는 아픔쯤이야 사실 고통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난 아직 녀석에게 제대로 된 고통을 가하지 않았다·
그런 놈의 머리를 잡아 올리며 강제로 눈을 마주쳤다·
“내가 재수 없을 수 있어· 아니꼬웠을 수도 있지· 그런 걸로 뒤에서 뭐라 하든 난 신경 쓰지 않아·”
어차피 능력 없는 놈들의 자격지심일 뿐이니까·
“근데 쟨 왜 건드렸어?”
“흐으윽····”
배럿은 대답도 못한 채 눈물만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내가 꼴 보기 싫었으면 나랑 담판을 지었어야지 쟤는 왜 건드렸냐고?”
“제 제가 잘못했어요 시안 공자! 앞으론 당신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을게요! 황녀를 비롯해 그 평민한테도 가까이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방금 전 포효하듯 소리치던 놈은 어디가고 비굴하게 싹싹 비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뭐 이리 싱겁냐 얘는?]
곁에서 이를 지켜본 케이람이 김 샌 듯이 말했다·
“동감하는 부분이야·”
그래도 전엔 내게 아득 바득 이를 갈며 대들었던 놈인데
이래서 떡잎 치기가 중요하다니까?
근데 내가 말로만 지껄이는 놈들을 잘 안 믿어서 말이야····
나는 케이람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뒤 까딱하고 손을 움직였다·
“···!”
자신의 미래를 직감이라도 한 듯 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뭐 뭐하려는 거예요?!”
이윽고 펴진 한 손으로 고도의 마나가 응집된 검은 구체가 나타났다·
구체는 금방이라도 배럿을 잡아먹을 듯 어두운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번에 못다 한 거 해야지? 서로의 마나 구체를 입안으로 집어넣는 놀이 말이야·”
“그 그런 놀이가 어딨어요? 그거 잘 못 넣다간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고요!”
“안심해· 마나 구체를 넣었다 해서 죽진 않으니까·”
그나마 귀족이라는 꼬리표라고 네놈을 살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닌 게 아니라 널 죽임으로 인해 내가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거든·
다만 네놈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겠지만·
“그러니 똑똑히 새겨둬· 한 번 더 나를 비롯해 내 종자에 눈에 띄면 그때는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될 거란 걸···· 내 말 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명심해야 할 거야·”
훗날 더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손에든 구체를 녀석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으아아악!”
쓸쓸한 숲속에 퍼지는 처절한 비명소리·
배럿은 물에서 나온 고기마냥 온몸을 팔딱거렸다·
식고문도 이런 식고문이 없지·
“우웨에엑!”
욱여넣은 마나를 뱉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래 봐야 아픔만 배가 될 뿐이다·
하기야 마나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저럴 기운도 없을 테지만·
볼일을 끝낸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떡잎 손질은 끝났다·
만약 이후에도 삐뚤어지게 자랄 기미가 보인다면
그땐 뿌리째로 뽑아 태워 버릴 것이다·
티끌조차 남지 않도록 모조리····
* * *
“윽!”
정신을 차린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린다·
“깼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눈을 뜬 것도 잠시 고운 목소리의 주인이 짧은 환호성을 질렀다·
“잘 잤어 브라이언?”
살랑살랑 귀엽게 흔들리고 있는 작은 꼬리·
꼬리의 주인은 침대 위에 앉아 순수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나···?”
브라이언은 황급히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스며든 평화로운 기숙사·
욱신거리는 고통에 머리를 매만져 보니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얘기 들었어! 나나 간식 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기절했었다며? 브라이언 완전 바보구나! 거리에 쓰러져 있던 브라이언을 발견하고 파파가 여기까지 데려 왔대!”
그녀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브라이언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돌부리에 넘어져 이런 심한 상처를 입겠는가?
브라이언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전날의 기억을 상기해 보았다·
분명 자신은 마지막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숲속 한가운데에 있었다·
배럿 일당에게 붙잡혀 갖은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있던 상황에서 시안이 나타났고 바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도 도련님은···?”
-끼익
찾기가 무섭게 시안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깼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매우 무덤덤한 얼굴·
허나 그 모습에 브라이언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나가서 밥 먹어 나나·”
“응 알겠어 파파!”
밥 먹으라는 말에 나나는 문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방안에 남은 건 시안과 브라이언 단 둘뿐이었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브라이언은 멋쩍게 웃으며 얼굴을 긁적였다·
그런 질문은 차라리 거울을 보며 하는 것이 더 옳을 듯싶었다·
“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주제도 모르고 일을 해결해 보겠다고 나서서는··· 괜히 도련님만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에 시안이 팔짱을 말했다·
“솔직히 내가 나선 걸로 뭐라 하고 싶진 않거든? 근데 너 걔들을 정말 네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브라이언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사 사실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뒤따랐을 때부터 기세들이 워낙 사나웠던지라 대충 어떤 자들인지만 파악한 뒤에 바로 도망치려 했었죠· 근데 설마 대화도 없이 바로 달려들 줄은 몰랐던지라····”
“그 말은 즉 애초부터 놈들이 살기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단 거네?”
“예····”
시안의 싸늘한 눈초리가 브라이언의 신경을 옥죄였다·
말은 안했어도 자신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뭐 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놈이 자기 한 몸 건사도 못해서야···· 너 그 부상 완치되면 바로 교육 시작할 테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시안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브라이언에게 건넨 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십니까?”
“마실·”
늘 그렇듯 어딘지 모를 곳으로 마실을 가는 시안이었다·
“···?”
홀로 남겨진 브라이언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시안이 주고 간 물건을 바라보았다·
짧은 길이에 비해 제법 묵직한 느낌의 단검·
칼집을 잡고 조심스레 뽑아보니 날카롭게 버려진 양날의 도신이 음산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