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My People (2)
환한 보름달과 어두운 밤 구름이 공존한 하늘·
우리의 꼬꼬마 친구들이 꿈나라로 가야할 시간이다·
침대에 웅크린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는 나나·
꿈속에서 사탕이라도 먹는지 한쪽 손가락을 하염없이 빨고 있었다·
평소라면 늘 하던 대로 밤일을 보러 나갔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이 꼬맹이를 돌봐줄 보모가 없기 때문이지·
그렇다·
지금 이 기숙사 안에 브라이언이 없다·
매일 일정시간 나나의 간식거리를 사러 나갔다 해질녘쯤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던 그가 오늘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야반도주를 했을 린 없을 테고
어디 이상한 놈들한테 기습당해서 납치라도 당한 건가?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잠든 나나의 옆으로 케이람이 나타났다·
[요즘 들어 계속 주위에 있던 까마귀들 처리하고 다녔잖아? 그 아이한테 뭔가 일이 생겼다면 당연히 그놈들 짓 아니겠어?]
케이람은 현 상황이 꽤나 즐거운 듯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까마귀들이라····
더 정확히 말하면 감시자들이라 해야겠지·
나와 브라이언이 루웬에 도착해 짐을 풀었던 그 다음날부터
미리 대기라도 한 듯 내 주위에 낯선 감시자들이 붙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붙었으면 모를까 도착 직후부터 바로 붙었다는 것은 이미 사전에 대기했음을 의미했다·
이걸 바꿔 말하면 날 죽이라고 지시했던 공작부인 쪽은 아니라는 얘기·
오히려 공작부인은 지금까지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 여자 성격상 일을 그르쳤다는 걸 안 순간 언제 들킬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뭐 사실 감시자가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범인은 이미 예상이 갔다·
그래서 애먼 추측으로 시간낭비 할 것 없이 그날 바로 놈들을 잡아 족쳤다·
정신 교육을 꽤나 단단히 받았는지 입들이 꽤 무겁긴 했어도 고문이라는 잔혹한 유혹을 견딜 순 없는 법·
손가락 마디마디부터 차례차례 도려내는 고통에 놈들은 결국 모든 걸 실토했다·
‘케 켈린! 켈린 디에고입니다!’
익숙하다 못해 반갑기 까지 했던 그 이름· 켈린 디에고·
직위는 벨리아스 소속의 정식 기사로 되어 있겠지만 실제로 기사단에서 근무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저택에 있는 그놈의 곁에 꼭 붙어 온갖 뒤처리를 다 하고 있을 터·
허나 현생의 난 아직 그와 일면식도 없다·
그 말은 즉 그의 독단적인 의사로 내게 감시자를 보낸 건 아니라는 뜻·
결국 그 위에 있는 어떤 의심암귀(疑心暗鬼)가 지시한 것임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럼 이후에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오는 족족 죽이면 그만·
무소식이 희소식?
한 줌의 정보가 소중한 그들이다·
감감 무소식은 애먼 불안감만 가중시킬 뿐이지·
정보가 끊기면 결국 똥줄 탈 놈이 알아서 오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추가로 오는 감시자들을 밤마다 모두 색출해 죽여 버렸으며 벨리아스로 가는 정보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럼 최후엔 켈린 본인이 직접 찾아오려 하겠지·
나 역시 그걸 원하는 일이고·
근데 이건 좀 이상하다·
누가 의심암귀 밑에 있는 놈 아니랄까봐 켈린도 확실치 않은 도박은 절대 안 하는 놈이다·
암만 보내져야 할 정보가 계속 끊긴다 해서 내 주위 사람을 기습하는 엄한 짓을 저지를 놈은 아니란 거다·
사방에 보는 눈이 깔린 아카데미에선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고는 있지? 원래 있던 놈들 말고 최근에 한 쪽이 더 붙었다는 거· 암튼 우리 주인도 참 대단해? 이리 인기가 많아서야 어디 제 명에 죽을 수 있겠어?]
말 그대로 사생(死生)팬이라 이건가?
피식 새어나온 웃음과 함께 내 시선은 잠들어있는 나나 쪽으로 향했다·
“····”
새근새근 곤히 잠든 걸 보니 당분간 깨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보호자가 없을 때 깨면 곤란하니 최대한 빨리 다녀와야겠지·
나는 케이람을 챙겨 품에 넣은 뒤 바로 밖으로 나갔다·
로열관 주변은 굳이 아카데미가 아니더라도 제국과 왕국을 비롯한 각국의 수호기사들이 몰려 있는 터라 사실상 그들이 경비병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 암만 뛰어난 감시자들이라 해도 이 근방에 기거하긴 무리일 터·
일단 기숙사 근처를 벗어나 보았다·
-찌르르르
고요한 주변 속에서 음침하게 들려오는 새소리·
감시자들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대게 아카데미를 벗어날 때 쯤 되면 하나 둘 몰려들던 까마귀들이 오늘 따라 감감 무소식이다·
일단은 발길이 이끄는 대로 좀 더 나아가 보았다·
어느 샌가 도달한 아카데미 앞 루웬의 상점 거리·
시간이 시간인 만큼 불이 켜진 곳은 있을지언정 문이 열린 곳은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쓸쓸함이 더 배가 된 듯하다·
근데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째 사람 냄새는 하나도 안 나는데··· 왜 피 냄새만큼은 선명하게 전해오는 걸까?
내 몸은 자연스레 익숙한 냄새가 전해지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윽고 나타난 막다른 골목·
냄새의 근원을 찾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내 바로 앞에 흘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진득한 핏자국들이 흩뿌려져 있었으니·
“하····”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건 뭐 굳이 상황을 추리해 볼 필요도 없겠네? 바로 답 나온 거 아니야?]
케이람의 시선은 핏자국이 아닌 핏자국 주변 다른 것에 향해 있었다·
사탕 빵 초콜릿 등 딱 그 꼬맹이가 좋아할 법한 간식들·
거친 흙바닥에서 주인도 잃은 채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뭘까?
상황이 너무 딱딱 맞다 보니 뭐 추측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안 보인다·
이 물건들 두말 할 것 없이 브라이언이 산 거다·
그럼 이 피는?
물어 뭐 할까 단연 브라이언의 피다·
문제는 그의 피와 그가 산 간식들이 왜 이런 외진 곳에서 발견됐냐는 거다·
브라이언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온 게 아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이곳에 온 거다·
아마 그 녀석도 느낀 거겠지·
최근 나를 비롯한 내 주위에 심상치 않은 까마귀들이 붙었다는 것을·
그래서 놈들을 유인한 거다·
자기 손으로 때려죽이려 했던 건지 아님 비장의 수라도 써서 동귀어진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참 같잖다·
꼴에 자기도 감각 있는 놈이라고 뭐 위기의식이라도 느꼈다는 건가?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참 좋은 종자를 뒀네?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걸 바치니 말이야· 그런 종자 어디 가서 찾기 쉽지 않다?]
언뜻 비아냥처럼 들릴지언정 케이람은 꽤나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거 알아 케이람?”
[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난 종자를 둬 본 적이 없어· 그 말은 즉 날 위해 사는 누군갈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다는 거야·”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오직 그놈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생각도 했어· 날 위해 살기로 한 인생· 그럼 날 위한 사람들도 만들면 좋지 않을까? 전생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나의 종자를 곁에 두는 거· 꽤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갑자기 왜 고해성사를 하고 있대?]
조금 뜬금없었는지 케이람이 눈썹이 아래로 기울었다·
“비록 능력도 없고 자질도 미약한 놈이긴 해도 브라이언은 엄연히 내 첫 종자고 내 사람이야· 근데 그런 그가 지금 어느 같잖은 놈들로 인해 위기에 빠진 것 같네? 그걸 안 내 기분은 지금 어떨 것 같아?”
이런 내 질문에 케이람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런 눈을 하고 물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 눈? 솔직히 난 지금 내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야·
이런 감정 사실 처음이거든·
내가 아닌 날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던 누군가가 위기에 빠져 버린 순간·
이건 정말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엿 같다·
[죽일 거지?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악독한 마검의 영혼이 나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나를 건드렸어도 시원찮을 판에 감히 내 손으로 거둔 내 사람을 건드려?
제어하기 힘들 정도의 분노가 내면으로부터 솟구친다·
* * *
-퍽!
거센 타격음과 함께 놈들의 악다구니 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렸다·
“이런 미친 또라이 새끼! 성대를 어디 굴 밑에 숨기기라도 했나···?”
사정없는 구타행진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힘없는 종이인형마냥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사실 뭐라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조금 전 마구잡이로 맞다가 성대 쪽까지 맞은 터라 이제껏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놈들은 그것도 모른 채 빨리 실토하라며 협박과 폭행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브라이언으로선 참 속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연이은 구타행위로 전신의 뼈는 이미 아작 난지 오래·
이제와 성대가 돌아온다 해도 아파서 말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를 정말 최악의 기분이었다·
‘그냥 객기 부리지 말고 도련님께 알릴걸····’
맞는 동안 이 생각만 수백 번은 한 것 같다·
솔직히 이 정도면 대놓고 유인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느 정도 대화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었을까?
본인 입으로 나오라곤 했다지만 아무런 대화여지 없이 떼거지로 달려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놈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도통 불 생각을 하지 않아요!”
급기야 고문관은 포기를 선언했다·
이에 의자에 앉아 잠자코 지켜보던 남성이 브라이언 앞으로 다가갔다·
“후우··· 후우····”
브라이언은 힘겨운 숨소리만 간신히 내뱉고 있었다·
“유일한 수호 기사라길래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이건 뭐 말도 못 끌 만한 놈을 데리고 다녔네?”
굵직한 성인의 목소리가 아닌 얇고 가벼운 어린 남성의 목소리였다·
브라이언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짙은 자줏빛의 머리와 잡티한 점 없는 여린 피부·
딱 시안 또래의 나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브라이언을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가 지금 왜 이 꼴을 당한 지는 혹시 알고 있어?”
얼굴도 초면인 마당에 자신과 무슨 마찰이 있었겠는가?
자연스레 시안과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원래 무능한 주인을 만나면 그 아래에 있는 놈들이 고생하는 법이래· 정말 맞는 말이지 않아? 아 그러고 보니 넌 네 주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겠구나?”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말이지· 누군가한테 설교당하거나 하대당하는 걸 정말 미칠 듯이 싫어해·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정말 주위에 있는 모든 걸 다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살기가 차오르거든! 내가 한 번 나사가 풀리면 그땐 누구도 못 막아· 심지어 우리 아버지조차도···”
소년의 어조에서 점차 광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근데 네 주인이 날 건드렸다? 시안 베르트 그놈이 이 배럿 루이밀님을 되도 않는 하대의 눈빛으로 바라봤다고! 그 보잘 것 없는 제국의 5황녀랑 쌍으로 말이야! 정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압도적인 굴욕감이었어! 내게 그런 짓을 벌이고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안 되지!”
그의 광기로 얼룩졌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내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를 얼굴을 지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널 어떻게 할지 말해줄까? 일단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도려내서 정성스럽게 포장해줄 거야 마치 깜짝 선물처럼! 그런 다음엔 네 주인한테 바로 보내줄 거야! 그럼 내 선물을 받고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디서 이런 걸 보냈는지 몰라 노심초사하겠지? 하루하루를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된 채 벌벌 떨면서 살 거라고! 그럼 난 그걸 보면서 즐길 거야! 그리고 그 공포심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이 오면 황녀와 함께 죽여 버리는 거지!”
브라이언은 대뜸 가끔씩 시안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같잖다고·
같잖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
솔직히 시안에게 무슨 굴욕을 당했는진 몰라도 그를 잘못 건드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본인이 제일 잘 아는 바였다·
누가 누구한테 뭘 한다고?
확실한 건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저들은 아마 자신보다 더한 고통의 순간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체념이라도 한 듯 브라이언은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자신의 생은 이미 벨리아스 근교에서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지금의 죽음은 생각보다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조금은 아쉬울 뿐·
나름 평생 모실 주군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조금은 더 도움을 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 점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허나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저들도 곧 나와 함께 저승의 문을 두드릴····
“끄아아악!”
귓가에 울리는 잔혹한 고통의 신음·
신음은 멈추지 않고 하나 둘씩 연이어 터져 나왔다·
“흐이이익!”
왠지 모르게 익숙한 상황이었다·
다시금 눈을 뜬 브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자리한 낯익은 남자가 그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뭐하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