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공작가의 무능아 (4)
면담이 끝난 뒤 공작은 바로 전선에 복귀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설득하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결국 여지를 남기는 데엔 성공했다·
처음 전선에 가고 싶다 했을 땐 공작으로 부터 아예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뭐 무리는 아니겠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괴상망측한 괴수들이 남발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하니·
오히려 미친놈 선에서 끝난 게 다행일 정도였다·
제국의 서부 영지 벨리아스·
이곳은 현시점에서 대륙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전선’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타왕국이나 이민족 등 같은 인간의 구역과 접해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이종족들의 서식지 통칭 마계·
태생부터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악의 종족 마족들이 서식하는 대륙으로 벨리아스는 그런 험악한 땅과 가장 가까이 인접해 있는 영지였다·
그 중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레메아 골짜기’는 수백 년 동안 마족들과의 전투가 지속되어 왔던 격전지로 지금도 날마다 거센 혈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왜 넘어오는지 반대로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현 시점에선 그곳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만 빼고·
“도려어어니이임!”
허겁지겁 달려온 에밀리가 대차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다·
나는 개의치 않고 하던 근력 운동을 계속했다·
“사 사실이세요?!”
“뭐가?”
“뭐긴요! 공작님께 최전선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소문 참 빠르네·
퍼트릴 사람도 없을 텐데 대체 누가 얘기하고 다니는 거야?
“어 했어· 아직 완전한 허락은 못 받았지만····”
에밀리는 급기야 아연실색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미 미치셨어요 도련님?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신다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마족들이 잔뜩 있는 곳이라니까요?!”
정확히는 마‘족’이 아니라 마‘수’들만 우글거리는 곳이다·
착각하는 사실이 있는데 레메아 골짜기에 서식하는 생물 중에 지성체는 없다·
즉 여기로 따지면 사람이 아닌 짐승들만 산다는 거다·
뭐 지금이야 아직 제대로 알려진 것도 없기에 별 구분 없이 쓰고 있긴 하다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아닌 말로 저 너머에 있는 이종족들이 우리를 짐승이랑 동 취급을 하면 좋겠는가?
같은 맥락이다·
내가 최전선으로 가려는 이유 또한 마족이 아닌 마수들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그 그럼 어떻게 되신 거예요? 완전한 허락이 아니라면 공작님께서 무슨 조건이라도 거신 거셨어요?”
아무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군·
그녀의 말마따나 아버지는 내게 한 가지 조건을 거셨다·
한 달·
주어진 한 달의 시간 동안 레메아 골짜기로 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출 것·
그렇게만 하면 최전선으로의 동행을 허락한다고 하셨다·
그 자격이 무엇인지는 아직 얘기하지는 않으셨지만····
“후····”
목표 횟수를 다 채운 순간 그대로 퍼져버렸다·
진짜 내 몸이지만 이때의 내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또 한 번 느낀다·
대체 이딴 몸으로 어떻게 살았던 거지?
바닥에 퍼질러진 내게 에밀리가 물을 갖다 주었다·
“운동하시는 도련님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세요·”
차라리 말을 말았으면····
안 그래도 이 빈약한 몸을 어떡하면 단숨에 끌어올릴지 고민이 태산이다·
공작의 성격이라면 필시 또 다른 대련을 준비시킬 거라 본다·
내가 최전선에서 마수들을 마주쳤을 때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것을 확인해 볼 심산이겠지·
아마 율켄 같은 상급 기사에게 패널티를 주고 대련을 시킬 것 같긴 한데····
가능하냐고?
솔직히 허풍이 아니라 한 명이 아닌 상급기사 열 명 까지도 가능하다·
이래 뵈도 난 대륙 최고 살수집단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당시에 체득했던 비술과 비기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쓸 수 있는 힘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아직 여러모로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이 구닥다리 몸으로 전생의 힘을 쓰기엔 패널티가 너무 크다·
비기라도 한 번 썼다간 몸이 그대로 아작 날 것이다·
그렇다고 마법을 쓸 수도 없는 노릇·
이제 막 마나를 생성할까 말까한 나이에 상급 기사들을 제압할 만한 마법을 구사한다는 것도 웃기지·
이미 어젯밤 마나 감응을 통해 전생에 갈고닦았던 마나와 마력들이 몸 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이들이 확인할 수 없도록 기운을 감춰놓은 상태·
사실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암튼 최소 아카데미에 입학해 적합 속성이 뭔지 파악되기 전까진 남들에게 함부로 보여줄 순 없었다·
즉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건 결국 검술뿐이란 얘기겠지·
꽃병조차도 못 드는 근력으로 상급기사를 이겨야 한다니·
뭐 그것도 솔직히 못할 건 없긴 한데···
암튼 좀 더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근력을 상승시켜야 한다·
나는 다시금 푸쉬 업 자세를 잡으며 운동을 재개했다·
-웅성웅성
“밖이 소란스러운데요? 누구라도 온 것일까요?”
끽해야 영지 내 병사들이 근무 교대라도 하나보지 그딴 건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운동을 지속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에밀리는 기어이 확인해 보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야 좀 조용히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복도 저 끝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운동중이긴 하나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묵직하지 않은 것이 기사의 발걸음은 아니고
폭이 얇고 가벼운 걸로 보아 여성의 발걸음 같긴 한데 또 조신하진 않단 말이지?
이 정도면 공작부인 같은 귀족의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에밀리 정도 밖에 없는데 뭐 이리 급하게 뛰어오는 거지?
키는 170정도에 몸무게는 55정도····
이 정도면 시녀의 발걸음도 아닌데?
에밀리는 그거보다 훨씬 땅딸보여서 이런 걸음을 못 낸다·
누구지?
이건 마치 기세 있는 여장부 같은····
“시안!”
대차게 열린 방문에 그만 자세가 무너져버렸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여인·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가버렸다·
“에 엘리스 누님?”
넋 나간 것 도 잠시 그녀는 급기야 내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너 미쳤어? 아버지께 전선으로 가고 싶다 했다며? 너 거기가 어딘 줄은 알아?”
“누 누님 일단 이거 좀 놓고····”
너무도 갑작스런 만남이라 기분이 매우 얼떨떨했다·
“크란츠를 이겼다 싶어서 웬일인가 싶더니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뒤로 흔들리니 뭐라 대처할 여지도 없었다·
이 이거 뭔 상황이지?
엘리스 누나가 여긴 왜?
다양한 감정이 서린 푸른 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따스한 감촉은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누나와 다시 만나는 날이 오다니····
분명 혼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누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너 어디 아프니 시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반가워서요····”
잠시 갸웃한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반가울만도 하지· 한동안 졸업준비 한다고 바빠서 못 왔으니까· 그래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
1년이라·
그녀에겐 1년이었을지언정 나에겐 수십 년만의 재회였다·
공작가의 두 번째 자식이자 장남 에쉘과 함께 차세대 가주로 평가받던 여인·
무능아였던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가족·
내가 전생에서 유일하게 지키고 싶었던 여인이기도 했다·
“저택엔 언제 오신 겁니까?”
“방금 전에· 졸업 하고 나면 집에 오기는 더욱 힘들어 질 테니까· 그전에 한 번 찾아 온 거야·”
누나의 현재 나이는 열일곱·
6년간의 아카데미 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가문에서 아니 세간에선 누나를 두고 이렇게 불렀다·
신의 아이·
검술 마법 학문 등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귀재들이 모인 로얄 아카데미에서 전무후무한 전 과목 S등급의 달성자·
무능아였던 나와 달리 그녀는 뭐든 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귀재였으며
거기에 외모 또한 여신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 가히 신의 아이라고 불리기에 아깝지 않았다·
장남 에쉘과는 두 살 정도 차이가 있지만 가문 내에선 그와 더불어 가문을 이끌 차세대 가주 후보로까지 여겨지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아 그보다 너 전선에 가고 싶다 한 얘긴 어떻게 된 거야? 진짜 아버지께 그리 부탁했어?”
“예 일단 그렇긴 한데··· 대체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그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누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문 사이에서 엿보고 있는 에밀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가 범인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진짜 저 눈치 없는 시녀 같으니····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중 가장 가까우면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전선이라고 생각했고요·”
베르트가의 저택이 위치한 곳은 영지의 최동부·
최전선인 레메아 골짜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단연 공작의 명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어쨌든 가족들을 영지 내에 거주하게 하면서도 최전선이 뚫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면 바로 후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단 나로선 공작과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하였다·
허나 대답을 들은 누나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안 너 설마 가문의 유지를 잇고 싶은 거니?”
* * *
해는 저물고 달이 떠오른 야심한 밤·
밤안개가 자욱해지면서 대련장에 스산한 한기가 웃돌고 있었다·
“꼭 이렇게 까지 해야겠습니까?”
“불평 하지 마 시안! 다 너를 시험하기 위함이야!”
달밤에 조깅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크란츠와의 대련이 불과 한나절 전이건만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것도 손에 검까지 쥔 채로·
“가문의 유지를 잇는다는 너의 마음은 기특하다고 봐· 하지만 마음만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이건 아버지의 시련을 넘어서기 위한 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해·”
가문의 유지·
즉 마족들로부터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누누이 말하는데 난 그딴 헛짓거리 다시 할 생각 죽어도 없다·
내가 전선에 가고자 하는 것도 그거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허나 사실대로 얘기할 수도 없는 마당에 그냥 ‘예’라고 했을 뿐·
설마하니 저렇게 두 팔 벌리고 나와 대련을 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시련은 간단해· 지금부터 3분간 내 검을 버티거나 아님 그전에 내 목에 검을 겨누거나· 둘 중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널 전선으로 보내줄게·”
간단은 무슨 그냥 절대 안 보내주겠단 소리구만·
일단 얼떨결에 나오긴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로얄 아카데미 전 과목 S등급 신의 아이를 상대로 검술 대련을 버틴다?
이제 막 근력운동을 시작한 나로서는····
굉장히 쉬운 일이다·
솔직히 시작과 동시에 끝낼 수도 있다·
어떻게 파고들지 동선도 훤히 보일뿐더러 가뜩이나 몸도 작아져서 움직임이 더 가벼워진 것도 있다·
근데 그랬다간 어찌되겠는가?
크란츠야 동년배의 나이고 하니 이기고 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지만 무려 일곱 살 차이가 나는 성인이다·
로얄 아카데미의 전문적인 교육마저 모두 이수한 그녀를 한 번에 이긴다?
이건 상정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가능성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질 수 밖에 없는 거다·
만약 생각 없이 이겼다간 그때부턴 재능으로 커버할 수준이 안 된다·
“자 검 뽑은 순간 바로 시작하는 거다! 얼른 뽑아 시안!”
하····
뭐 그래 엘리스 누나도 설마하니 진심으로 덤벼들 생각은 없겠지·
내 실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봐주면서 할 것이다·
그걸 적잖게 받아치면서 시간을 끈다면 어영부영 넘어갈 순 있으리라 본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검을 뽑은 순간
“···!”
쏜살처럼 파고든 그녀의 검 끝이 순식간에 내 목을 노렸다·
-챙!
문제없이 막긴 했어도 첫 일격을 경험한 순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누나 봐줄 생각이 1도 없는 진심이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