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정화 작업 (3)
“에잇! 떨어져! 떨어지라고!”
지하 전체에 울려는 격렬한 구타 소리·
지커만은 함에 달라붙은 여인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이런 노예로도 못 쓸 더러운 년이! 어디서 내 앞길을···!”
“아흑··· 아악!”
뼈가 아스러지고 내장이 파열되는 고통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발로도 때려보고 사슬로도 후려쳐봤지만 도무지 함에서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헉 헉···”
힘이 겨운 듯 숨을 몰아쉬던 지커만은 이윽고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이래서 너희 같은 놈들이 안 된다는 거야! 분수에나 맞게 살 것이지!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하니까 명을 재촉하는 거라고!”
-스릉
구타로는 떼어낼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지커만은 빼든 단도를 여인의 목덜미 쪽으로 겨눴다·
“그나마 다행 아니냐? 너 같은 년들 손에서 볼품없이 클 바에야 내가 좋은 곳에서 좋게 키워주도록 도와주는 거잖아? 네년은 저승 가서도 나한테 감사해야 할 거다!”
지커만은 광기의 웃음을 남발하며 가차 없이 검을 내려찍었다·
-서걱
-땡그랑
허나 단도의 검첨이 맞닿은 것은 여인이 아닌 무뎌진 쇠바닥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지커만은 떨리는 눈빛으로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흐이이익···!”
잘려진 손목에서 솟구치는 다량의 피·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둔탁한 무언가가 그의 성대를 가격했다·
“커걱!”
이에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커만 알바스· 대륙의 3대 부호이자 우시프 제국의 대상인····”
어디선가 들려오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
분명 그의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살해 및 협박을 통해 제국의 상권을 독점 이를 입막음하기 위해 제국 관리들에게 부정청탁 감행 거기에 제국에서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노예 시장의 운영까지····”
그동안 저질러왔던 지커만의 악행들이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먹먹한 신음소리 뿐이었다·
“죽을 이유 충분하지?”
지커만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허나 의문의 목소리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1분 줄게····”
“···?”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야· 그 시간동안 네가 저지른 악행과 과오에 대한 참회의 시간을 가져· 1분 후엔 지금 느끼는 고통은 말끔히 사라질 거야····”
지커만은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 1분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이겠단 소리 아닌가?
“대신 그 1분 동안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아· 물론 지금 느끼는 아픔보다 더한 고통들이 가해질 순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지커만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간신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
한없이 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의문의 소년·
허나 결코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걸 지커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미 미스트···?’
모든 희망이 꺼져버린 절망의 순간·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질 최악의 1분뿐이었다·
* * *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설마하니 그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타깃을 눈앞에 두고 굳이 시간 낭비를 할 필욘 없을 터·
마지막 참회의 시간만 갖게 한 뒤 곧바로 놈의 심장을 갈라 숨통을 끊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흐으으····”
상태를 보니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애절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함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토록 애타게 부르던 아이가 저 함 안에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일단 그녀에게 다가가 보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가녀린 목소리와 쓰린 눈물에서 그녀의 애절한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인지한 것이다·
불쌍하냐고?
글쎄?
솔직히 무덤덤해진 지 오래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추악하게 보일 정도로 분노하긴 했지·
공작가라는 울타리 속에선 알지 못했던 세상의 처절한 법칙·
그것에 익숙해지고 무뎌진 순간 내 눈과 입술은 어느 샌가 일직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만큼 이 세상엔 저 여인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
지금 저 여인도 어쩌다보니 내 눈에 들어왔을 뿐 결국 내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 제 아이를····”
“···?”
조금 놀랐다·
벼락이 떨어져도 절대 안 놓을 것 같던 함을 그녀가 내게 들이밀었다·
순간 무슨 의미인지 몰라 여인의 눈을 쳐다 본 순간
-툭
그녀의 얼굴이 맥없이 땅에 박혔다·
숨을 거둔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둬봤자 그녀의 시체를 신경써줄 사람도 없을 터·
나는 여인의 머리 위로 살며시 손을 올렸다·
-스스스
손에서 퍼져나간 안개가 여인의 몸을 휘감았다·
안개는 여인의 몸을 포근히 감싸주었고 머지않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왜 성불하라고 기도라도 해주지?]
“거기까진 아닌 것 같고····”
그쪽 세상이 이쪽보다 더 좋을 거라 장담은 못하겠다·
정화 작업도 끝냈겠다 이제는 당주에게 보고 후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건 두고 갈 거니?]
전리품이라 하기엔 살짝 애매한 물건·
[아까 밖에서부터 느꼈던 그 기운 이 함에서 아주 선명하게 느껴져· 그 머저리가 말한 특별한 물건이 이건가 본데?]
타깃인 지커만의 손에 있었고 여인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뺏으려 했다·
게다가 케이람은 선명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하니
이 함 안에 있는 물건이 오늘 경매에 나온다는 그 특별한 상품이 아닐까 싶은데····
일단 확인은 해보고자 손을 대보려는 순간·
-꿈틀
“···?!”
갑자기 함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뭐 뭐야 이거?”
함이 들썩일 정도의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뭐지? 진짜 애라도 들은 건가?
뭔가 함부로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이거 설마···?]
놀란 건 케이람도 마찬가지·
방금 전 움직임으로 인해 좀 더 확실한 기운을 감지한 듯 보였다·
[뭐해? 빨리 안 까보고?]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케이람은 어서 열어 볼 것을 재촉했다·
그래 일단 까보긴 해보겠다만 이런 숨구멍도 없는 함 속에 진짜 아이가 들어있을 것 같진 않고 대체 뭐가 든 거지?
-덜컥
금색의 뚜껑을 얼어보니 오색의 천으로 고이 덮인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크기는 사람 머리보다 조금 더 큰 정도·
혹 데스 나이트의 머리라도 든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천을 들춘 순간····
“···?”
[···?]
말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함 속의 내용물이 내가 생각했던 그 어떤 물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
알이었다·
문제는 이게 그냥 알이 아니라는 거다·
선명한 광채를 내뿜고 있는 백색의 알·
이 정도 신기를 내뿜는 알이라면 이건 필시····
[드래곤의 알인데?]
* * *
전생에 딱 한 번 드래곤의 알을 본 적이 있었다·
별로 특별한 감상이 있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냥 좀 크고 신비로운 알이구나 싶은 정도·
그 우람하고 거대한 드래곤도 결국 인간의 태아와 비슷한 크기에서 시작하는구나 하는 일반적인 감흥만 있었을 뿐·
그럼 두 번째로 본 감흥은 어떠냐고?
딴 거 다 제쳐두고 그냥 이 생각밖에 안 든다·
이게 왜 여깄지?
“우리가 지커만이란 남자를 너무 얕본 것 같구나· 설마하니 드래곤의 알을 경매에 내놓으려 했을 줄이야·”
당주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알 외에 다른 건 없었니?”
“일단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걸 제쳐두고 다른 게 보일 리도 없겠지만·
“흠····”
알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눈이 대뜸 내 쪽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덤덤해 보이는 구나·”
“알에 대해서 말입니까?”
“아니 지커만을 죽인 거에 대해서· 적어도 이 미스트에 들어오고 나서 네 손으로 죽인 첫 인간일 텐데 마치 늘 있었던 일마냥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야·”
그녀는 의문일지 만족일지 모르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딱히 반문하지 않았다·
“뭐 일단 타깃인 지커만은 죽었고 다른 곳에 있던 노예들은 우리가 전부 풀어줬어· 거기에 아에르 님께서 말씀하신 특별한 물건도 우연찮게 탈취했으니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친 것 같구나· 수고했다 시안·”
미스트의 임무는 딱 거기까지·
목표를 암살한 순간 정화 작업은 끝난 것이며 풀어진 노예들의 삶까지 책임져 주지 않는다·
우리는 암살자지 구원자가 아니다·
“그럼 이 알은 어떡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예?”
“네가 얻은 전리품인데 당연히 네가 책임져야지· 우린 권한이 없단다!”
“····”
뭔가 당한 느낌이다·
어디까지나 확인만 하라 했지 탈취까지 하라 한 적은 없다 이건가?
[왜 이렇게 된 거 한번 키워보지?]
이 변태 마검이 이제는 하다못해 막말을 던진다·
애초에 부화는 시킬 수 있는 건가?
태초부터 긴 생명력이 주어진 드래곤에겐 알에서 부화하는 시간조차 인간의 수명을 훨씬 뛰어넘는다·
못해도 50년에서 100년 사이·
게다가 난 이 알이 언제 세상에 나타났는지조차 전혀 모른다·
재수 없으면 부화는커녕 아마 알의 균열도 못 보고 죽을 것이다·
암만 신성하고 고귀한 드래곤의 알이라 해도 결국 지금은 무의미한 돌덩이에 불과했다·
“세상일 모르는 거란다? 우연히 부화 시기가 맞아서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날 수도 있지 않겠니?”
[그래 한 100살 정도 되면 볼 수 있을지도? 깔깔깔!]
“····”
이쯤 되면 그냥 내가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이 알도 결국은 드래곤의 신기와 피가 담겨있을 텐데 이걸 먹으면 드래곤의 피를 먹는 것과 같지 않을까?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단 생각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반짝
내 시선을 끌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순백의 알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롱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 * *
“도 도련님· 이게 뭡니까?”
“드래곤의 알·”
“예?”
자기가 잘못 들었다 생각했는지 브라이언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적당히 아무데나 놔둬· 아마 깨질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알을 브라이언에게 건넸다·
“욱!”
그는 예상 밖의 무게에 놀란 것인지 몸을 휘청거렸다·
“이 이걸 대체 어디서···?”
“마실 나갔다가 주웠어·”
어차피 이번 생에 저 알이 부화하는 모습은 못 볼 터·
그냥 관심 끄고 다른 일에나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단 흐르는 땀부터 씻고자 샤워실로 향했다·
시원한 물로 상쾌하게 샤워를 마친 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나오던 그 순간
“도 도련니이이이임!”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찾아갈 필요도 없이 곧바로 나에게 달려왔다·
“왜?!”
“부 부화하고 있습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알이 부화하고 있어요! 갑자기 균열이 났나 싶더니 쩌적쩌적 갈라져서는···!”
“알이 부화한다고?!”
뭐야? 아직 부화까진 한참 남은 거 아니었어?
일단 두 눈으로 확인은 해보고자 브라이언과 함께 황급히 거실로 달려 나갔다·
-쩌적 쩌저적
진짜다!
단순히 균열만 난 게 아닌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부림까지 치고 있었다·
[이거 뭐야? 진짜 부화하는 거야?]
급기야 케이람까지 급히 실체화하여 나타났다·
그녀 또한 이렇게 빨리 부화가 일어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모두가 숨을 죽이며 알을 지켜보는 상황·
차마 건드릴 생각은 못하겠는지 전부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쩌적··· 펑!
[깨졌다!]
마침내 껍질을 깨고 나타난 신성한 생명체·
알이 깨짐과 동시에 밝은 빛이 일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정말 회귀하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군·
살다 살다 드래곤의 부화 모습을 보게 되····
“···?”
순간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 도련님···· 이게 드래곤입니까?”
이마 위로 솟아난 두 개의 뿔·
등 사이로 뻗은 한 쌍의 날개·
엉덩이 아래로 자라난 기다란 꼬리까지·
여기까진 분명 영락없는 드래곤의 신체이긴 한데····
[이게 무슨 드래곤이야? 사람이라 해도 믿겠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케이람이 그대로 해주었다·
비늘 하나 없는 하얀 살결·
아기자기 하게 오므려진 손과 발·
사람이라 해도 전혀 이질감 없는 얼굴까지·
이건 아무리 봐도 드래곤이 아니라···
“용인(龍人)?”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