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대륙제일검 (3)
“외상은 어느 정도 치유됐지만 내상을 회복하기 위해선 안정을 취해야 한대 그러니 오늘은 움직이지 말고 여기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저 정말 감사드려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감사하다고 인사는 하는데 어째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곳은 루웬 한가운데에 위치한 치유소·
배럿 일당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레시무스를 치유하기 위해 아린 황녀가 데려온 곳이었다·
그 금발 미치광이는 기껏 마나 구체를 꺼내 놀아주려 했더니 다음에 하자며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사실 잡아서 억지로 처넣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그녀의 치유가 우선인 것 같아 아린 황녀와 함께 치유소로 동행하였다·
골절을 비롯해 내장 파열 미미하지만 뇌진탕까지·
솔직히 그녀의 상태를 봤을 땐 하루 이틀 치료를 받는다고 나아질 상황은 아니었다·
저렇게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사실 용한 건데·
역시 대륙제일검의 정신이라 이건가?
“혹시 괜찮다면 그들이 언제부터 괴롭혔던 건지 물어봐도 될까?”
황녀의 질문에 레시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처음 왔을 때부터요· 그냥 절 의도적으로 노렸던 것 같아요·”
결국 괴롭힘 당했다는 걸 그녀 스스로도 인정했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설마하니 그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줄은 몰랐거든· 세상에 자신의 마나 구체를 다른 사람의 입안으로 넣으려 하다니····”
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긴 했다·
만약 그 순간 아린 황녀가 나타나 상황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지금쯤 레시무스는 일반병실에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중환자실에서 대수술을 받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들의 괴롭힘이 반복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레시무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표정은 줄곧 좋지 않았다·
“저 저기 아까부터 궁금했었는데····”
눈치를 보던 레시무스의 눈이 대뜸 내 쪽으로 향했다·
“절 아시나요?”
“음?”
“아니 아까부터 절 계속 쳐다 보시 길래····”
알지·
대륙제일검 레시무스 클라인·
한 번의 검격으로 수백 명의 목을 베어버렸던 검으론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추앙받던 기사·
마왕군 토벌 이후 발발한 대륙 통일 전쟁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람 왕국을 지킨 최후의 수호자·
허나 앞서 말했듯 그녀는 내가 죽였다·
원래 그녀의 국적은 우시프 제국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졸업 후 가람 왕국의 무인 가문이었던 클라인 백작가로 들어간 뒤 성을 바꾸었으며 이후엔 국적까지 바꿨다·
당시 제국은 가람 왕국의 모든 성을 함락하고 마지막으로 클라인 가의 영지만을 남겨두고 있던 상황·
대륙의 온전한 통일을 위해 될 수 있으면 그녀가 투항하도록 유도했지만 레시무스는 볼품없던 자신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왕국을 버릴 수 없다며 끝끝내 투항을 거부했었다·
결국 그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제국은 내게 그녀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제국의 명령은 암살이었지만 정작 성으로 잠입했던 난 그녀에게 정식적인 일기토를 신청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암살자이기 전에 같은 검사로서 대륙 제일의 검을 그렇게 허무하고 죽이고 싶진 않았거든·
사실 암살을 한다 해서 쉽게 당해줄 여자도 아니었다·
마왕과의 혈전 이후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패배의 기운을 또 한 번 느끼게 해줬던 강자였었으니·
참고로 그녀는 마법을 쓰지 않는 검사로도 유명했다·
보통 검의 일가견이 있는 기사들도 대부분 마나와 마법을 활용해 검식에 응용시켰지만
그녀는 순수 자신의 고유 검술만을 구사해 정점에 오른 검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법을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였네·
그 금발 미치광이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마나 흐름 자체가 파괴되었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제일검에 오른 거였다니·
만약 그녀가 검에 마법까지 접목시켰으면 어디까지 성장했을까?
못해도 그때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아에르가 말한 주변을 둘러보란 의미가 이런 거였나?
일단 그녀에겐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그냥 내가 알던 사람이랑 좀 닮았던 거 같아서· 근데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 네····”
대화가 끊김과 동시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린 황녀는 분위기를 개선해보고자 주제를 바꿔보았다·
“그 그러고 보니 레시무스 넌 여기 로열 아카데미에 어떻게 들어 온 거야? 듣기론 평민들 중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데려다가 교관님들이 특별채용을 한다고 하던데 너도 그랬던 거니?”
“네 맞아요· 본 아카데미에 검술 교관이셨던 제이드 교관님께 검술 특채로 채용해주셔서 이후에도 제 후원을 약속해주시긴 했는데··· 제 입학 하루 전날에 갑자기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하신 터라····”
후원을 봐주려던 교관의 갑작스런 퇴출이라·
선 넘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우연일 거란 생각은 안 드는군·
“그 그랬었구나···· 그럼 지금 지내는 곳은?”
뻔하지 뭐·
그녀처럼 왕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들이 쓸 수 있는 숙소는 오직 한 곳밖에 없었다·
“커머널관이요····”
아카데미의 재학생 중 약 5% 정도가 거주하는 평민 전용 기숙사·
평민들이 쓴다 해서 시설이 노후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다른 기숙사들에 비해 차이가 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이게 아카데미에서도 관리를 안 하려던 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 지고하신 귀족님들께서 어떻게 저급한 평민들이 자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냐며 극구 항의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일 뿐·
수호 기사들은커녕 아마 청소부들도 한 달에 한 번 일을 할까 말까한 곳이었다·
“딱한 상황이구나· 돌아가 봐야 그 사람들이 또 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런 와중에 후원을 봐주기로 한 교관님까지 퇴출당했다고 하니 그 금발 미치광이들이 언제 다시 와서 행패를 부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황녀는 뭔가 좋은 생각이 없을지 입술을 어루만지며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럼 황녀님이 데려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음?”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데려가셔서 종자로 삼으시죠? 어차피 아카데미에선 자신의 거처가 아닌 다른 이의 거처에서 지내면 안 된다는 규율도 없습니다·”
어디 하찮은 평민이 감히 귀족이랑 한 방을 쓸 수 있냐며 다들 거부해서 그렇지·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오늘 처음 본 남자애랑 한방을 쓰기엔····”
“저 친구 여잡니다·”
“···?”
아린 황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레시무스를 쳐다보았다·
“그··· 황녀님을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닌데····”
부끄러운 듯 홍조 띤 얼굴과 가지런히 모인 양손·
딱 열한 살 소녀를 연상케 하는 다소곳한 모습이었다·
이에 황녀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 네가 머리도 짧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남자라고 생각했나 봐!”
“사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잘못한 건데····”
사실 잘못한 건 아니지·
신분상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평민이 후견인 하나 없이 아카데미를 다닌다?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로?
이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발가벗은 변사체로 발견돼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남장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실제로 제국에서도 성별을 위장하고 기사단에 입단한 여성 기사들도 꽤 존재하기에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린은 더욱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었겠네····”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투영되기라도 한 것일까? 황녀에게선 연민의 감정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검술 특채로 채용됐을 정도면 확실히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단 소리겠죠· 황녀님께서 직접 거두신다면 그녀로부터 검을 배울 수 있음과 더불어 나중에 개인 수호 기사로도 삼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황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오래 고민할 것 같진 않았다·
“혹시 출신이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
“우시프 제국 남부 도시 ‘브레누’요····”
게다가 국적도 아직은 제국·
타국민도 아닌 마당에 종자로 거두기엔 명분도 충분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난 시안의 제안이 괜찮다고 보는데? 내 사람이 되면 그런 나쁜 사람들에게 괴롭힘 당할 일 없이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야·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하고 싶은 거 하는····”
레시무스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거겠지·
난데없이 황녀가 자신을 구해준 것도 신기한 마당에 자기와 함께 지내 달라니·
꿈은 아닌지 두 볼을 꼬집어보고 싶을 것이다·
“구 굳이 저한테 왜····”
“난 제국의 황녀야· 황실의 일원으로서 백성들을 구원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나도 아무런 대가 없이 널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야· 네가 검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니 나도 많은 걸 배우고 싶어·”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냥 혼자 지내기 적적해서 그래· 안 그래도 넓은 기숙사에 말 나눌 친구도 없는데 같이 지내면 재밌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레시무스는 아마 하늘에서 여신이 내려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불행할 것 같던 앞날에 불현듯 나타난 구원의 존재·
급기야 울음을 터트린 레시무스는 황녀의 품에 안겼다·
“····”
이것 참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군·
이쯤 되면 내 역할은 끝난 것 같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왔다·
나도 참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에 별짓을 다 한다·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거냐고?
전혀·
그냥 내가 직접 거두는 것보단 그녀의 곁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뿐·
뭐 지금이야 작은 새싹에 불과하겠지만·
그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고 그 나무들이 많아져 숲을 이룬다면·
그게 바로 자신의 영역이자 세력이 되는 것이다·
난 그저 미래의 대륙제일검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도록 길만 제시한 것이며 그걸 새싹으로 피워낸 것은 황녀였다·
이후엔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다만 이거 하나만큼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의 아군을 만드는 건 반대로 여러 명의 적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내 적이 아군의 적이 되듯 결국 아군의 적도 내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혹시 모르지·
지금 이 순간 황녀도 모르게 생긴 새로운 적이 그녀를 위한 칼날을 갈고 있을지·
* * *
-쾅! 쾅! 쾅!
“아아아악!”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에 배럿은 굉음을 질렀다·
항상 발밑에서 누군가를 밟아오던 그가 처음으로 기세에 밀려 물러났으니 그 감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린 세벨러스··· 껍데기에 불과한 5황녀 주제에 나한테 설교를 해?”
귀족의 자긍심은 찾아볼 수 없다니 정말 같잖아서 웃음도 안 나오는 말이었다·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그냥 남들처럼 조용히 처 지나갈 것이지!”
그녀에 대한 분노를 삭이기도 전에 떠오르는 또 한 사람·
“시안 베르트····”
그 누구도 여태껏 자신에게 그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다·
마치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하대의 눈빛·
정말 온몸이 비틀어질 정도로 엄청난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으아아!” 배럿은 급기야 손에 쥔 검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이걸론 안 돼···! 이 정도론 안 된다고!”
배럿은 부서진 잔해들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을 더 잘게 부숴 나갔다·
더 이상 나눠지지 않을 정도로 가루가 되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니들 다 똑같이 만들어 주지! 살려달라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주겠어! 감히 나 배럿 루이밀을 화나게 한 대가를 똑똑히 치를 거라고!”
배럿은 가루가 된 잔해들이 마치 그들의 미래인 것처럼 예고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