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공작가의 무능아 (3)
공작 윌리어스 베르트·
제국의 서부 영지 벨리아스를 다스리는 대제후·
단순 공작의 신분을 넘어 세간에서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대륙의 수호자’
뛰어난 마법력과 처세술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마족의 침공을 저지한 영웅·
그가 없었다면 대륙은 일찍이 마족들에게 점거 당했을 거라며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근데 그거 아는가?
세상에서 제일 고달픈 삶이 바로 영웅의 삶이라는 것을·
자고로 영웅이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고된 숙명을 가진 존재다·
자기 한 몸 지키기도 고사한 인간의 몸으로 세상 전부를 지킨다?
결국 스스로에겐 아무런 이득 없는 삶이지·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한 자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후우····”
율켄의 호위를 받아 집무실 앞에 도착한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마왕군 침공 때 전사하신 이후 못 뵈었으니 거의 15년 만에 재회였다·
-똑똑
차분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중후한 미성이 들렸다·
“들어 오거라·”
율켄은 밖에서 대기하려는 듯 보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끼익
공작은 정제된 시선으로 들어오는 나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에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베르트가의 막내 시안 아버님을 뵙습니다·”
“딱딱한 인사는 할 필요 없다· 자리에 앉거라·”
공작은 준비된 자리에 앉을 것을 지시했다·
“····”
패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난 아버지란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미련한 사람·’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영웅의 의무를 혼자 짊어지고 그 의무를 자식들도 수행해주기를 바랬던 미련한 남자·
황제조차도 건들 수 없는 대규모 세력을 가졌으면서도 작은 권력욕 하나 갖지 않은 남자·
그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 대륙의 평화뿐이었다·
사실 좋게 말해 평화지 따지고 보면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봉사에 불과하다·
강하고 능력 있는 자식을 원했던 것 역시 지금의 평화를 잇게 할 수 있는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전생의 난 그런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검술을 익혔던 것이냐?”
그의 첫 질문은 단연 대련에 관한 것이었다·
“익혔다기 보단 그저 밤마다 혼자 단련을 해왔습니다·”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순전히 혼자서만 해왔다?”
“네····”
물론 거짓말이다·
전생의 내가 검술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엄연히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던 너는 검술에 재능은커녕 관심도 없던 아이였었는데 그런 실력을 갖췄으면서 어찌하여 주위에 숨겼던 것이냐?”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펼쳐낼 수 있었다·
하물며 공작으로부터 갖은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을 터·
공작으로선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여태 무능아처럼 살았던 건지 그게 궁금한 것이다·
정작 내가 숨기고 있는 건 더 큰 것이지만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그 그냥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문에서의 제 위치도 있고 하니 여러모로 튀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냐?”
“예····”
쭈뼛쭈뼛 망설이는 내 모습에 공작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 같은 면모를 연출한 것이 다소 먹인 듯 보였다·
“그래 그렇다고 하면 그건 내 잘못이겠구나·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것이다· 검을 연마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연습하거라· 원한다면 수련관도 붙여주도록 하마· 그 누구도 네게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뜻하지 않게 내려진 호의였다·
딱히 필요한 건 아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난 오늘 대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너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대감 말입니까?”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나와 눈을 마주쳤었지?”
순간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저 지나가는 시선이 아닌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때 네 눈으로부터 무얼 봤는지 아느냐?”
“무 무엇을 보셨습니까?”
“자신감·”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크란츠를 상대하는데 있어 무조건 이기겠다는 자신감을 보았다· 그리고 넌 그 자신감을 훌륭하게 증명해 주었지·”
찰나의 순간에 그걸 캐치하다니 역시 아버지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상관없다·
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좋은 것이니·
“하지만····”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공작의 어조가 돌연 무겁게 변했다·
“이후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지 않았느냐?”
이후의 행동·
크란츠를 무참히 폭행한 행위를 말한 것이다·
“무기를 제압하고 이미 승산이 갈린 상황에서 굳이 크란츠를 그리 만들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찌 하여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냐?”
나지막이 묻는 공작의 얼굴에선 진지함이 가득했다·
그는 확인하려는 것이다·
‘나’라는 그릇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를·
지금 대답에 따라 나란 존재가 공작에게 어떻게 인지될지를 결정 짓는 것이다·
어려울 것 없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하면 된다·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족했다?”
“그때 무릎을 꿇은 크란츠에게 검을 겨누어 끝냈다면 크란츠는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공작의 미간이 다소 찌푸려졌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검술 대련의 의의는 상대와 실력을 겨루어 그 우위를 점하는데 있다고 배웠습니다· 허나 한쪽이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겠지요·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크란츠에겐 무릎 정도론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에서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크란츠는 태생부터 주변의 기대를 받으며 자라온 만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놈이었다·
그런 놈들은 대개 한 번 깨진 걸로 패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마 무릎을 꿇는 선에서 끝냈다면 크란츠는 몇 번이고계속 들이댔을 것이다·
그걸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싶다는 욕망이 발현되어 놈의 머리를 걷어 찬 것이다·
지금 크란츠가 깨어난다면 트라우마로 인해 내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겠지·
“크란츠를 굴복시키고 싶었더냐?”
공작은 내 의중을 바로 헤아렸다·
나는 절제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설사 피를 나눈 형제라 한들 그를 굴복시키고 싶었습니다·”
나도 안다·
지금 내가 한 말과 행동들이 결코 열 살의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일반적인 사람이 봐도 결코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허나 내 앞의 있는 사람이 누군가?
베르트 공작이다·
인성 같은 같잖은 것을 신경 쓸 사람이 아니란 거다·
봐라·
가려진 손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미소를····
“훌륭하다! 그래 대련의 의의는 상대에게 우위를 보여주는 데 있지· 가족애라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작은 진심으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가문의 이념을 계승할 만한 자식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매우 기쁜 것이겠지·
애초부터 그는 자식이란 존재를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답지 않은 냉철함이 돋보이는구나! 훗날 에쉘을 도울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겠어·”
“···!”
순간 망치로 머리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뭐?
누구의 지원군이 돼?
내가 누구한테 죽었는진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주먹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 역한 감정이 치솟고 있었다·
내가 공작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칭했던 또 하나의 이유·
장남 에쉘에게 정말 무섭도록 집착했기 때문이다·
에쉘은 현 공작의 정실 마가렛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죽었다고 알려진 첫 번째 부인에서 태어난 아들· 그 첫 번째 부인을 얼마나 사랑 했는진 몰라도 에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정말 도를 지나친 수준이었다·
마치 현혹술이라도 걸린 것 마냥····
하긴 남 말할게 아니군·
정작 그 놈의 뒤를 제일 많이 봐준 것이 나였으니····
그러나 이젠 끝났다·
에쉘의 검이 심장을 파고든 그 순간 내 몸 속엔 각인이 새겨진 것이다·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한 삶·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행동들이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되어줄 것이다·
“상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대련에 대한 보상은 주고 싶구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해 보거라·”
바라는 것·
생각 외로 큰 기회가 찾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선택이 나에게 가장 큰 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머리를 굴려야 했다·
현재의 내게 주어진 것은 전생의 기억과 감각뿐·
본래의 힘을 되찾기 위해선 아직 성장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전생의 나조차 넘볼 수 없는 더욱 더 강한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지·
일단 뭐든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전부터 느꼈으니까·
위험성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현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추구하면 된다·
“전선에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
* * *
빛이 스며들지 않는 지하 공간·
손에 잡힐 듯 말 듯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주변을 가득 메운다·
불빛 한 점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지형만큼은 선명하게 잘 보이는 매우 이색적인 곳이었다·
-뚜벅 뚜벅
한 여인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검은 후드로 얼굴을 감춘 여성은 복도 너머로 이어진 안개를 따라 걷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가려는 듯한 발걸음·
이윽고 복도 끝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는 탁상이 보였다·
탁상위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상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성은 늘 그래왔듯 자연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
상자 안은 먼지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이것은 분명 있어야 할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
허니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여성은 이내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때가 왔군!”
여성은 황급히 상자를 챙기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돌아온 복도 끝에 펼쳐진 광활한 지하 공간·
여성은 자신과 똑같은 후드를 뒤집어쓴 이른바 ‘대원’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술 도박 수면 등 다양한 유흥을 즐기고 있었으며 여성을 봤음에도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내색 없이 중앙으로 나아갔고 이내 들고 있던 상자를 대원들 앞으로 던져버렸다·
-땡그랑
상자는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굴렀다·
이윽고 모든 대원들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다·
“미스트 스톤이 사라졌다·”
상자 속 내용물이 사라졌음을 알리는 여성·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대원은 없었다·
“····”
요란스러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침묵의 시간이 유지되던 찰나 한 대원이 질문을 던졌다·
“계승자가 돌아온 겁니까?”
여성이 웃으며 말한다·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여성은 내던진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력이 차오름과 동시에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이내 땅에 떨어진 상자를 감싸 안았다·
-후우웅
빈 상자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연기가 새어나왔다·
연기는 위로 뻗어나갔고 점차 알 수 없는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파직!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연기의 색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잠시 후 연기는 어린 아이의 형태를 완성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확인을 끝낸 여성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계시의 날이 밝았다! 현 시간부로 미스트의 활동을 재개한다!”
지령과 동시에 모든 대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광활한 지하공간에 남겨진 것은 여성과 상자 단 둘뿐·
“····”
여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