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외전 (2): 추억의 흔적
“나와 내기 하나 해보겠느냐?”
“내기··· 말인가요?”
“그래· 어차피 엘프로서의 내 수명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길어봐야 50년에 불과하지· 하지만 너에겐 아직 몇백 년에 달하는 시간이 있다·”
서로 선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하지만 두 엘프 사이엔 그 행위를 허용할 수 없도록 날카로운 얼음 창살이 가로막고 있었다·
창살 안에는 전 화이트 엘프의 장로 엘퓨리스가 자리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하지· 네 수명이 다해 눈을 감는 그 날에!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내기보단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넌 이 세상에 왜 질서가 필요한지 아느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태초의 생명체에겐 질서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이끄는 욕망만이 가득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질서를 세웠기에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던 것이다·”
그녀는 반박하지 않고 엘퓨리스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나는 그 질서가 앞으로도 쭉 지켜지길 원했다· 그래서 루멘델님의 뜻을 따른 것이고·”
엘퓨리스는 질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런 질서가 없어진 세상엔 이제 혼란만이 가득할 것이다· 인간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욕망을 추구하겠지· 그래서야 통제할 수 없는 다크 엘프와 뭐가 다르겠느냐?
“····”
“그런 미개한 존재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오래갈 리는 없다·”
신은 떠나고 상황은 모두 종식되었지만 엘퓨리스는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마음을 그녀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세상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정말 질서 때문이었을까요?”
잠시 입을 닫고 있던 그녀가 이번엔 역으로 물음을 던졌다·
“전 질서보단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경험?”
“네· 전 우리가 과거를 통해 얻는 반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더 새롭고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넌 인간을 믿는 것이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거라· 지금은 좀 자유로울지 모르지· 하지만 질서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너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엘퓨리스의 눈은 마지막까지 확고했다·
“내 말 명심하거라 하스티아·”
“명심할게요·”
엘퓨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의사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 뜻을 인지한 하스티아는 조용히 동굴을 나왔다·
“들어갈 때와 다르게 낯빛이 어두워졌구나·”
이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리안이 하스티아를 맞이해주었다·
마리안은 1년 전 부활한 아나스타샤에게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하면서 큰 피를 입었었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몸을 정상적으로 회복했다·
“엘퓨리스가 뭐라고 하더냐?”
“제가 눈을 감는 그 날에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하셨어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하스티아는 바로 대답을 잇지 않고 살짝 머뭇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게 정답이다·”
마리안은 오히려 그게 맞는 말이라며 동조해주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거란다· 그걸 엘퓨리스도 모르진 않을 거다· 다만 믿고 싶은 거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 겠죠?”
“떠나간 신들만 봐도 그렇지· 지고의 존재를 자청했던 그분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앞날을 못 보지 않았더냐? 네가 입고 있는 그 망토의 주인이 설마 자신들을 인계에서 떠나게 할 줄은····”
그 말에 하스티아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꽉 붙잡았다·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입으면 질릴 법도 한데····”
“자 자주 빨고는 있어요!”
“딱히 망토가 좋아서 입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 그건···!”
마리안의 장난기 담긴 물음에 하스티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리안 님! 하스티아!”
난처한 와중에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구나·”
손님의 정체를 파악한 하스티아의 얼굴엔 곧 화색이 돌았다·
“엘리스 님!!”
* * *
프루이나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얼음 절벽 위·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두 여인은 그동안 못다 한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엘리스 님께선 결국 가문의 의지를 따르기로 하셨군요?”
“저 아니면 이제 와서 할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좋아요· 처음부터 원했고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이니까·”
수호자가 사라진 대륙에서 누군가는 그 의지를 이어야 할 터·
엘리스는 자신이 아버지 윌리어스를 베르트를 대신해 그 의지를 잇기로 결심했다·
일각에서는 이미 엘리스를 전선의 기사들을 대표해 총책임자로 임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허나 아직은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기에 엘리스는 황실에서 내린 작위를 전부 거절했으며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엘리스 님이라면 분명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스티아는 그런 엘리스의 뜻을 존중해주며 진심으로 응원했다·
“고마워요· 정말 이렇게 하스티아랑 맘 놓고 대화를 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왠지 어색해요·”
“사실은 저도 그래요·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발음이 어눌하기도 하고····”
신이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더는 그녀를 지킬 신의 보호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보호가 풀리는 동시에· 그녀를 억압하던 내면의 구속도 함께 풀림에 따라 하스티아는 이제 남들과 똑같이 자유자재로 말을 할 수 있었다·
“근데 그 망토는 아직도 하고 있네요? 이거 보니까 1년 전 생각난다!”
“무 무슨?!”
하스티아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물든 볼살을 푸들푸들 떨면서 ‘시안 님의 그 망토! 제게 이별 선물로 주실 수 있을까요?’ 했던 그때 그 얼굴! 얼마나 귀여웠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노 놀리지 마세요!”
부끄러움이 차오른 하스티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시안은 그 이후로 못 본 거예요?”
“네· 저야 뭐· 계속 프루이나에 있었으니까····”
“의외네요?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왔을 줄 알았는데· 하스티아는 시안 안 보고 싶어요?”
“보고 싶죠· 당연히 보고 싶긴 한데····”
하스티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안 님은 과연 절 보고 싶어 하실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안이 하스티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좋아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시안 님을 따라다니면서 피해만 드렸지 작은 도움 하나 못 드렸어요· 아무 쓸모 없이 문제만 일으키는 절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라도 싫어할 거예요·”
하스티아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시안이 기억 속에 갇혔던 일을 아직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아닐 텐데? 시안이 정말로 하스티아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 망토를 주지도 않았을 거예요·”
엘리스는 그런 하스티아의 생각을 반박해주었다·
“시안이 얼마나 칼 같은데요? 좋은 것 모르겠지만 싫으면 싫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는 아이예요·”
“그런가요?”
하스티아는 살짝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요! 시안이 아르보르 나무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이유도 결국은 제물로 바쳐질 하스티아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어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 만나러 여기까지 와주실 것 같진····”
“시안은 보기보다 정도 많은 아이예요· 한 번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정하면 끝까지 지키려고 하니까· 아마 조만간 찾아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면 정말 좋겠네요····”
엘리스 덕분에 어느 정도 위안은 받았지만 마음의 답답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하스티아는 주머니를 뒤졌다·
시안과의 추억이 담긴 또 하나의 흔적 바로 소울 스톤이었다·
“그건 소울 스톤인가요?”
“네· 예전에 시안 님께 드렸다가 다시 돌려받았던 돌이에요·”
시안은 당시에 그 소울 스톤을 그냥 돌려주지 않고 돌에 안개의 힘을 일부 넣어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었다·
이에 돌 주위로 검은 안개가 맴돌면서 이따금씩 시안의 상황을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 소울 스톤엔 더 이상 검은 안개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냥 아무 기운 없는 돌에 불과··· 어?”
힘없이 돌을 바라보던 하스티아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스스스
신이 사라진 이후 완벽히 모습을 감췄던 돌의 검은 안개가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돌에 검은 안개가?”
“검은 안개요? 그럴 리가 없어요! 검은 안개의 신은 이제 이 세상에 없을 텐데?”
엘리스 역시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안 님이 근처에 있나 봐요!”
하스티아는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지 모를 곳으로 뛰쳐나갔다·
“자 잠깐만요 하스티아!”
엘리스의 부름에도 하스티아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
“안개가 옅어졌어!”
허나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안개는 아까보다 희미해진 상태였다·
“이쪽이 아닌 건가?”
급히 몸을 돌려 방향을 바꿔보려는 순간
“···!”
발이 꼬인 나머지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소울 스톤마저 놓쳐버렸다·
“안 돼!”
데굴데굴 구르던 소울 스톤은 비탈길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하스티아?”
뒤늦게 따라온 엘리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소울 스톤이 저 아래로 떨어져 버렸어요!”
“직접 가지러 가는 건 위험해요! 길이 미끄러워서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돌아내려 가서 찾아볼게요· 정 안 되면 마리안 님께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요·”
하스티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는 바로 다른 길을 찾아 내려갔으며 졸지에 혼자 남은 하스티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비탈길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보····”
그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 줄 알면서 이리 허무하게 잃어버리다니·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꼈는지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시안 님····’
허탈한 마음에 자연스레 불러보는 그의 이름·
-저벅저벅
오죽 충격을 받았으면 자신의 뒤로 낯선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
뒤늦게 누군가가 왔음을 깨닫고선 바로 눈을 돌렸다·
“어···?”
처음엔 엘리스가 벌써 돌아왔나 싶었지만 찾아온 이는 엘리스가 아니었다·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렸던 하스티아는 곧 자신의 눈앞에 자리한 소울 스톤을 마주하게 되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에 올려진 채로 그녀를 향해 내밀고 있는
검은 안개가 잔뜩 깔린 소울 스톤을·
“혼자 뭐 하고 있어?”
“···!”
하스티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환희와 기쁨으로 물들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