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3화· 외전 (1): 나나의 일기
하루하루가 새롭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요?
아카데미 혹은 집·
매일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똑같은 밤을 맞이했던 지난날과 다르게 요즘은 하루하루가 참 특별합니다·
전 지금 여행 중이에요·
파파가 권유해줬거든요·
진짜 저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보라고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해서 저만의 인격과 가치관이 만들어지길 파파는 바란다고 했어요·
에밀리 언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를 혼자 보낼 순 없다며 말렸지만 제가 3일 밤낮을 졸라서 겨우 허락을 받았어요·
대신 조심해야 할 것들을 많이 알려줬죠·
특히 이상한 사람이 귀엽다거나 먹을 걸 준다고 따라오라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했어요·
설마 제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요?
오히려 브라이언은 제가 아닌 데려간 사람들을 걱정해야 할 거라며 식은땀을 흘렸다니까요?
지금은 뭐 하는 중이냐고요?
일기를 쓰고 있어요!
여행을 통해 보고 느낀 것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전부 기록하는 거죠·
오늘 같은 경우엔 조금 특별한 일이 있었어요·
딱히 좋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도 아닌?
저로선 굉장히 이상한 하루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 * *
새벽의 끝자락 그러니까 동쪽 하늘에서 햇빛이 새어 나올 쯤 이라고 할까요?
그 시점에 딱 우시프 제국의 남부 도시 브레누에 도착했어요·
이틀 밤낮을 꼬박 걷고 걸어서 겨우 도착했죠·
아 참고로 날개를 이용한 비행은 되도록 자제하고 있어요·
그도 그럴 게 전 인간이잖아요?
그러니 여행도 인간답게 비행이 아닌 두 발로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이 연약한 두 다리로 몇 시간 이상 걷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지금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걸어도 끄떡없을 만큼 완전 적응했어요!
여러분도 그 정도는 가능하죠?
아무튼 이곳 브레누는 저에게 특별한 도시에요·
크레페 같은 맛있는 음식도 엄청 많고 여러 사람이 다니고 해서 굉장히 시끌벅적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저와 파파가 처음 만남을 이룬 장소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도시랍니다·
일단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과일 크레페를 시작으로 브레누의 맛있는 간식들을 전부 사 먹었어요·
돈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브라이언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넉넉히 챙겨줬어요·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니까 글쎄 에밀리 언니 주머니에서 훔쳤다며 저만 알고 있으래요·
나중에 들키면 어떻게 감당하려나 몰라?
아 참고로 요즘 사람은 잘 먹지 않아요·
지난번에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긴 다크 엘프를 잘못 먹었다가 배탈이 심하게 난 적이 있었거든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기절했을 정도로요·
그래서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날 땐 쭉 따라다니면서 지켜보다가 먹어도 문제가 없겠단 판단이 들면 그때 먹는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저는 브레누에 오면 꼭 들리는 소중한 장소로 향했어요·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아 겉으로 봤을 땐 거의 폐가에 가깝긴 해도
저한텐 파파가 있는 집 그다음으로 따뜻한 곳이에요·
바로 마마의 기억이 있는 곳이죠·
나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 흔적이 있던 장소이자 파파랑 저 외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장소랍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건물에 들어갔는데
“···?”
이게 웬걸?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거 있죠?
처음엔 어느 갈 곳 없는 노숙인이 들어왔나 싶었어요·
하지만 바로 아니란 걸 깨달았죠·
왜냐면 사람의 냄새가 나진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생전 처음 맡아보는 낯선 생물의 냄새도 아니었어요·
분명 어디선가 접한 기억이 있는 무척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또 익숙한 그런 냄새였어요·
호기심이 생긴 저는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갔어요·
“···?”
건물 지하 정확히 마마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 위치·
그곳에서 전 정말 의외의 사람 아니 드래곤을 만났어요·
“···!”
그분도 절 보고선 크게 놀라셨어요·
우리는 서로가 왜 여기 있는지 몰라 한동안 말없이 쳐다만 봤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물어왔어요·
“아저씨는 그러니까 그 마계에 사시던 드래곤 분 맞죠?”
“····”
아저씨는 말이 없었어요·
아마 아저씨라는 호칭이 별로 마음에 안 드셨던 것 같아요·
“아저씨 이름이 아마····”
“나겔 안시온 데 쿠르트····”
“맞다 나겔 아저씨! 이제 생각났어요! 저희를 다짜고짜 이상한 공간으로 끌어들였던 데빌 드래곤의 우두머리 아저씨잖아요! 맞죠?”
익숙한 장소에서 의외의 존재를 만난 반가움이라고 할까요?
별로 친한 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분도 아니어서 반갑게 인사했어요·
“넌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건 제가 여쭙고 싶은 말인데요? 나겔 아저씨야말로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여긴 엄연히 인계인데?”
저야 인계에서 태어나 인계에서 자라왔으니 여기 있는 게 당연하지만 나겔 아저씨는 그렇지 않잖아요·
마계의 사시는 분이 갑자기 인계에 그것도 제 특별한 장소에 계시니 저로선 궁금함을 넘어 수상한 마음까지 들었어요·
“나와 인연이 있는 인간이 여길 다녀갔다고 해서 말이다·”
“인간이요? 아저씨 인간 친구 있으셨어요?”
나겔 아저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음~! 그래서 그때 마계에서도 친절하게 대해주신 거구나! 보통 드래곤들은 인간을 되게 멸시하고 천하게 여긴다고 파파가 그랬거든요!”
“딱히 친절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만····”
“그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지금도 살아계신대요?”
“죽었다고 들었다· 10년도 더 전에····”
“아 죄 죄송해요· 제가 실례했네요·”
“상관없다·”
제 눈치 없는 질문 때문에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어요·
저는 이 어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심히 고민했답니다·
“드래곤은 인간을 멸시하고 천박하게 본다····”
“···!”
“틀린 말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나겔 아저씨가 먼저 입을 열어주셨죠·
전 자연스럽게 나겔 아저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어요·
“나의 그 잘못된 관념을 깨준 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 보이면 계속 생각나는···· 그때 느꼈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거 좋아하는 거잖아요! 나겔 아저씨 그 인간 아니 그 여성분에게 마음이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그래 맞다· 한치의 부정할 여지 없이 난 분명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
나겔 아저씨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당시의 난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드래곤인 내가 인간에게 감정을 느끼다니· 오히려 그런 고민을 하는 내게 깊은 환멸을 느꼈지· 그래서 그녀를 버리고 매정하게 떠났다· 정분까지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제가 본 나겔 아저씨의 눈엔 슬픔과 후회가 가득했어요·
그걸 본 제 마음도 덩달아 울적해졌죠·
“만약 그분을 한 번 더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으세요?”
“글쎄· 이미 죽은 자를 데려다가 그런 가정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잠시 고민하던 나겔 아저씨는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아마 사죄를 해야겠지· 내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사죄를····”
그 말을 들은 저는 결심이 섰어요·
나겔 아저씨에게도 제 소중한 사람을 보여주자는 결심을 말이죠·
그래서 그분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어요·
“뭘 하는 것이냐?”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어··· 이렇게 하는 거였나?”
전 손에 발현한 어둠 속성의 마나를 땅에 갖다 댔어요·
그 옛날 파파가 제게 해줬던 마법과 똑같은 마법을 쓰기 위해서였죠·
-후우웅
다행히 잘 발동되었는지 땅에서 솟아오른 오라가 저와 나겔 아저씨를 감쌌어요·
곧 우리의 시야 앞으로 빛이 드리워졌고 그 빛 속에서 마마가 모습을 드러냈죠·
“···!”
그때 나겔 아저씨의 얼굴을 여러분도 봤어야 하는데!
무슨 멸망 직전의 세상이라도 본 것마냥 엄청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마마!”
전 바로 마마에게 달려가 그동안 못 나눈 교감을 나눴죠·
마마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절 따뜻하게 반겨줬어요·
“···!”
그러다 갑자기 마마의 시선이 나겔 아저씨에게 향했어요·
나겔 아저씨 또한 마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줬죠·
그렇다고 뭐 대화를 나누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서로 말없이 눈빛으로만 저로선 알 수 없는 무언의 교감을 나눈 듯했어요·
그러더니 마지막엔 서로를 보며 웃었어요·
거짓 하나 없이 진심만이 담긴 순수한 미소를 지었죠·
그렇게 마법이 끝나고 저와 나겔 아저씨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어요·
감정에 젖어있던 나겔 아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한 원래 얼굴로 돌아왔죠·
“왜 내게 이걸 보여준 것이냐?”
“그냥 저도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나겔 아저씨의 소중한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신 것처럼 저한테도 소중한 마마의 기억을요!”
나겔 아저씨는 잠시 말없이 제 눈을 바라보셨어요·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인간이요!”
“내가 봤을 때 넌 명백한 드래곤이다· 그냥 드래곤도 아닌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데빌 드래곤 말이다·”
“드래곤일 수 있고 인간일 수도 있는 거죠 뭐· 어차피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우린 다 똑같지 않나요?”
제 대답을 들은 나겔 아저씨의 멍한 반응을 보이시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인간과 드래곤은 서로 다른 게 없는 존재들이지····”
“전 그냥 나나예요! 시안 베르트의 소중한 딸 나나!”
전 다른 무엇보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으~! 마법을 썼더니 갑자기 배고파졌네요· 근처에 맛있는 식당 아는데 나겔 아저씨도 같이 가실래요?”
“난 괜찮다· 혼자 가서 많이 먹어라·”
“그래요 그럼! 잘 있어요 아저씨~!”
전 그 길로 나겔 아저씨와 헤어졌어요·
나겔 아저씨가 그 장소에서 얼마나 더 있다가 갔는진 모르겠지만 왠지 어디선가 또 마주칠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전 이미 알고 있어요·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 파파가 사실은 날 태어나게 해준 진짜 파파가 아니라는 걸·
이렇게 머리가 컸는데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가끔은 우리 마마와 정분을 나눴다는 그 진짜 파파에 관한 생각이 종종 나긴 했지만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서로 그냥 알아서 잘 살면 그만이지·
오늘 일기는 여기까지!
내일은 또 어떤 밤하늘 아래에서 일기를 쓰게 될까요?
근데 파파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또 파파가 보고 싶어지네요·
우리 파파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