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모두를 위한 구원 (1)
대체 눈 뜬 시체 상태로 며칠을 있었던 걸까?
온몸이 매우 뻐근하다·
천을 걷고 밖으로 나오니 예전엔 거들떠도 안 보던 햇빛이 나를 반겨주듯 쏟아져 내렸다·
“파파!”
“도련님!”
“시안 너 이 자식!”
거기에 반가운 얼굴로 달려오는 나의 사람들까지·
그들은 저마다 서로 반응을 보이며 나의 회복을 반겨주었다·
내심 이들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기에 적당히 받아만 주고선 바로 몸을 돌렸다·
‘···!’
갑자기 뒤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했더니 하스티아였다·
‘시안 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라는 말에 지금까지 그녀가 어떤 심정을 느끼고 있었을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라며 꽤나 자책한 듯 보였다·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나는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 한 마디만 해주었다·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뭐 어쩌겠는가?
나로 인해 시작된 일· 내가 해결해야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성검의 주인이 있는 곳을 향해 바로 나아갔다·
“깨어나자마자 또 어딜 가시려고요?”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루나브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굉장히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러곤 대뜸 말없이 달려오더니
-꽈악!
숨조차 제대로 못 쉬게 할 만큼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꼭 이렇게까지 세게 안아야겠냐?”
“닥치고 가만히 있어요· 더 한 짓도 해버리기 전에····”
나는 얌전히 그녀의 요구에 따라주었다·
그렇게 잠시 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만족감을 느낀 듯 그녀는 그제서야 내 몸을 놓아 주었다·
“가실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루나브는 미련 없이 몸을 비켜주었다·
“일어나자마자 어딜 가려는 거야 시안?”
그러자 이번엔 아린 황녀가 헐레벌떡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
“제 할 일을 하러 갑니다·”
나는 그녀의 만류를 애써 무시한 채 그대로 지나쳤다·
평소 같았으면 이대로 그냥 떠났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으려 한다·
나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몸을 돌렸다·
“····”
딱히 할 말이 있어서 돌아본 건 아니었다·
그냥 단지 내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이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다는 마음이랄까?
이런 내 마음을 저들이 알진 모르겠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그냥 이거 자체가 내가 원하는 일이니·
나는 다시 쥬른을 향해 나아갔다·
* * *
휑한 먼지 바람만 휘날리는 쥬른의 거리·
뭐 하나 남아있는 게 싶어 주변의 기운을 속속히 살펴봤지만
없다·
사람이고 다크 엘프고 마치 버려진 도시마냥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둘 중 하나겠지·
인계를 침공한 다크 엘프들이 도시에서 물러났다거나
혹은 전부 괴멸됐다거나·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어째 감으로 따지자니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볼 거 없는 곳을 서성거려봐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기에
나는 쥬른 북쪽 성문을 지나 찬 바람이 부는 프루이나 쪽으로 향했다·
뭔가 마력의 폭풍 같은 거대한 것이 한바탕 지나가기라도 한 듯
주변 곳곳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마나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나아갔을까?
갑자기 눈앞의 공간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하더니 익숙한 뭔가가 짜잔 하고 나타났다·
아공간 게이트·
안에선 보기만 해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빛의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뭐 일단 나보고 들어오라는 뜻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 것 같긴 한데
가기 전에 정산할 게 하나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따지질 못했네?”
[뭘?]
“너 내가 기억 속에 들어가면 개고생할 거란 거 알고 있었지?”
[당연히 그 고생을 떨치고 깨어난 거란 것도 알고 있었지·]
“무슨 근거로?”
[내 감으로~!]
이 뻔뻔한 여자한테 따져봐야 내 입만 아프지·
[너무 그런 눈으로 안 봤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 깨우겠답시고 저 미련한 인간들 데려다가 뭔 일을 시켰는지 알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걸?]
“분노의 눈물이 아니면 다행이지·”
[이걸 콱 그냥! 다 죽어 가던 거 살려놨더니 어디서 비아냥대고 있어!]
“아나스타샤 스펜시아·”
내 머리를 치려던 케이람의 주먹이 순간 공중에서 멈칫했다·
“너 걔랑 싸워서 졌더라?”
[진 게 아니고 마리안인지 뭔지 하는 그 망할 드래곤 때문에 승부가 안 난 거야!]
“어련하실까?”
[이게 진짜! 가서 이상한 것만 보고 와서는!]
케이람은 성난 강아지처럼 귀엽게 으르렁거렸다·
[그래도 한 번 사경을 헤매고 오더니 뭔가 달라지긴 했나 보네? 아까 니 똘마니들 보는 눈빛이 영 예사롭지 않던걸?]
뭐 확실히 달라졌다면 달라졌겠지·
‘네가 바라는 세상은 저 아이들이 만들어 줄 거야·’
당주가 남긴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바라는 세상·
솔직히 이제 와선 그 세상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지·
내가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이 아공간의 주인을 죽여야 한다는 걸 말이다·
나는 그 즉시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후웅!
분명 처음 오는 공간일 텐데 안은 어째서인지 매우 익숙했다·
사방에 눈이 내린 듯 새하얗고 역한 기분이 들 만큼 밝은 공간·
일단은 개의치 않고 이어진 길을 따라 쭉 나아갔다·
한 3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나아갔을 땐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건축물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올라가는 계단도 있는 걸 봤을 땐 무언가를 모시기 위한 제단처럼 보였다·
물론 제단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저 높이 계단 끝자락에 낯익은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단 거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은 안개의 계승자·”
“아나스타샤 스펜시아····”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하기야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겠죠· 오는 동안 다크 엘프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못 보셨을 테니·”
그녀의 말에는 왠지 모를 언짢음이 담겨 있었다·
시야를 좁혀 자세히 쳐다보니 그녀의 손에 익숙한 책 한 권이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틀림없이 루나브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가면서 그러던걸요? 마검의 주인이 곧 찾아올 테니 잡다한 것들 다 치우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그녀는 그 책을 보란 듯이 내 앞으로 던졌다·
나는 책이 눈앞에서 이른 순간 정체를 바로 확신했다·
마서 레미하람·
그 방대하던 마력과 영령의 기운은 온데 간데 사라진 채 아무 힘없는 초라한 책으로 전락해 있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그 마나의 흐름은 이 마서가 마지막으로 남기곤 마력의 흔적이란 것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케이람은 그런 마서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날을 위해 야심하게 준비한 다크 엘프 군단은 그 책이 전부 소멸시켰습니다· 덕분에 저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죠·”
그녀는 제단 꼭대기에서 일어나 계단을 타고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시안 베르트·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행적에 대해 쭉 살펴봤어요· 좀 충격적이던데요? 저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서····”
“····”
“대체 어디서 당신이란 존재가 나타났을까요? 제아무리 검은 안개의 계승자라고 해도 이 정도의 경지를 보여줬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어디 한 번 지껄여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런 말도 있죠? 싸움에 있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힘이 아닌 경험이다· 시안 베르트 혹시 당신은 남들에겐 없는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일직선을 그리던 그녀의 입꼬리가 순간 요염하게 올라갔다·
“이미 한 번 전생을 살았다든지····”
정곡을 찔리긴 했지만 이제 와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대답을 내지 않자 그녀는 대뜸 크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전생을 기억하는 인간이라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런 말도 있죠· 말도 안 되는 일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 생각으로 접근해보니 신기하게도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지던걸요?”
마침내 나와 그녀의 거리는 검을 휘두르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떤가요? 제 추리가 맞았나요?”
아나스탸사는 다시 한번 내게 답을 요구했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경지가 남들과 확연히 다른 여자다·
내가 신이라도 이런 인간이라면 안심하고 신의 무구를 하사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이 지랄 맞은 삶을 두 번 살면서 종종 희열감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어· 그때가 언제인 줄 알아?”
“···?”
“우월감·”
난데없는 내 자문자답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들은 모르는 미지의 기억을 나는 알고 있을 때 생기는 그 우월감· 그 우월감을 느꼈을 때 오는 쾌감과 희열은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어·”
직접 겪어봐야 알지·
“넌 나를 처음 보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난 이미 너를 한 번 봤고 검을 맞대었어· 그리고 결과적으론 죽음에 이르게 했지·”
“당신이··· 나를요?”
농담으로 못 쓸 말이라는 듯 그녀는 대놓고 혀를 찼다·
“너는 모르는 너에 대한 기억·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지금 얼마나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지····”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아나스타샤와 다르게 내 얼굴에 서린 미소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너는 절대로 모를 거야!”
“···!”
“무검(霧劍): 흩날리는 8개의 꽃잎!”
혼란에 휩싸인 그녀의 눈앞으로 안개를 머금은 8개의 검기를 선사했다·
-챙!
아나스탸사는 빛과 같은 속도로 성검을 뽑아 내 검기를 막아냈다·
“당신이 저에 관한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든 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전 제 기억만 믿으니까요! 저는 지고의 존재들이 인정한 인간 중의 가장 완벽한 인간! 당신 역시 인간임을 자칭한다면 당신은 절 이길 수 없습니다 시안!”
순간 마검과 맞닿은 성검의 날에서 빛이 일었다·
빛은 검을 잡은 아나스탸사의 몸으로 빠르게 전이되었으며 곧 성력을 받아들인 그녀의 등에서 큰 광채가 일었다·
광채는 머지않아 날개의 형태로 변했다·
“구원의 심판(Judgment of Salvation)!”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할 성검의 비기·
허나 지금껏 내가 봐온 그 어설픈 것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과연 진짜가 내리는 심판은 다르다 이건가?
-슉!
준비를 마친 아나스타샤는 공중으로 높이 비상했다·
어설프게 받아쳤다간 내 몸은 흔적도 없이 소멸할 것이다·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시안! 이 심판의 검에는 이전엔 없던 제 완전한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인정한다·
지금 저 힘은 내가 지금까지 접해왔던 힘 중 가장 최악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이럴 땐 보통 두 가지 상황으로 이어지겠지·
저런 건 받아칠 수 없다며 일그러진 얼굴로 절망하거나
아님 다 포기한 얼굴로 지난 삶을 회고하며 성찰하거나·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인정하는 꼴이지·
한데 난 둘 다 아니다·
지금 내 손에 거울이 있다면 한 번 확인해 보고 싶다·
저 치명적인 성검의 힘을 마주한 내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아마 감히 예상하는데
웃고 있을 것이다·
[또라이 같은 놈····]
케이람은 그런 나를 보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람을 앞으로 들이밀며 나직이 읊조렸다·
“암무 8식: 안개의 구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