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그가 만든 세상 (4)
“후욱 후욱····”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세트·
그의 우락부락한 구릿빛 피부엔 검붉은 피가 자욱이 얼룩져 있었다·
누가 봐도 지치고 힘든 상태임이 분명했지만 그의 모래 폭풍은 누그러질 기미 없이 계속 휘몰아쳤다·
“와! 이렇게 피를 흘려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졸라게 상쾌하다!”
세트는 이런 상황마저도 무척 즐거운 듯 호탕한 웃음을 남발했다·
그의 주위엔 피투성이의 다크 엘프 시체들이 즐비했다·
“근데 니들은 어째 안 그런 것 같다? 이건 뭐 마수도 아니고 엘프도 아닌 것들이 질기긴 엄청나게 질기네!”
허나 세트의 앞엔 아직 수백 마리가 넘는 다크 엘프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 동쪽 새벽하늘에 해가 뜨면서 밝은 햇살이 대지를 감쌌다·
애초에 한 번 죽은 존재나 다름없는 다크 엘프에겐 밤낮이란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잠이라고 하는 휴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허나 그들과 싸워야 하는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다·
장시간의 지속적인 전투와 방어로 인해 세 남녀의 얼굴엔 피로가 잔뜩 쌓여있었다·
-지직
거듭되는 공격에도 끄떡없던 결계에 순간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은 1초도 안 가 바로 메꿔졌지만
“쿨럭!”
루나브는 자신도 모르게 기침을 토했다·
“괜찮아요 루나브?”
놀란 엘리스가 토끼 눈을 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잠시 집중이 흐트러졌을 뿐이에요·”
루나브는 단호하게 답하며 언제 그랬냐는 결계를 더욱 단단하게 보강했다·
“저도 더 도움을···!”
이어서 힘을 보태려던 엘리스는 돌연 머리를 부여잡더니 픽하고 쓰러져 버렸다·
쓰러지는 그녀를 루나브가 냉큼 붙잡았다·
“마나가 다 소진되신 모양이네요·”
붙잡은 엘리스의 몸에선 작은 마나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계가 오긴 온 모양이에요· 저기 있는 세트 왕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모래 폭풍은 건재했지만 세트의 움직임은 초반에 비해 현저히 둔해졌음을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야 젖먹던 힘까지 짜내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긴 하겠으나 그렇다고 저 모든 다크 엘프들을 처리하는 건 무리였다·
“하루면 그래도 오래 버텼네요·”
엘리스는 말하면서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원래 계산했던 시간도 딱 하루였어요· 해가 떠오를 때쯤이면 한계가 올 거라고 예상했었죠·”
“루나브는 정말 대단하네요· 처음부터 그런 걸 다 계산했을 줄이야·”
엘리스는 그녀의 경이로운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럼 한계에 이른 그다음에 뭘 해야 할지도 구상하셨겠네요?”
루나브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버텨야죠· 저 혼자서····”
“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엘리스는 바로 루나브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우우웅
엘리스의 발밑엔 어느샌가 푸른 빛의 마법진이 나타나 있었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전이 마법진이었다·
“뭐 뭐야 이건?”
그 마법진은 세트의 발밑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루나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이미 루나브의 손엔 가공할 마력을 뽐내는 마서가 펼쳐져 있었다·
“두 분이 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예요· 나머지는 제가 다 감당합니다·”
“그만둬요 루나브! 도망칠 거면 같이 도망쳐야죠! 왜 혼자만 남겠다는 거예요?”
“자신이 없거든요·”
“네?”
“선배 없는 세상에 혼자 살 자신이····”
그 말을 들은 엘리스는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시안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루나브 당신은 대체?”
엘리스와 세트는 그렇게 마법진에서 뿜어진 빛에 사로잡혀 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그렇게 둘을 미련 없이 보낸 루나브는 천천히 결계 밖으로 나왔다·
홧김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구상했던 계획·
다크 엘프와 함께하는 마지막은 처음부터 홀로 감당할 생각이었다·
지루한 시간 벌이는 여기서 끝·
이제는 자신의 모든 힘과 마법을 끌어내 이 다크 엘프들을 몰살시키는 것만 남았다·
“키에엑!”
살기에 버무려진 수백 마리의 다크 엘프 앞에 홀로 남겨진 루나브·
“조연도 다 떠났으니 이제 제대로 놀아볼까요?”
그녀의 뒤엔 찬란한 마력을 발하는 무지갯빛의 원소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 * *
“그 무지하고 나약했던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나 발전하다니· 이걸 기뻐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언덕 위에서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아나스타샤·
의도치 않게 흥미로움을 느낀 그녀는 입술을 매만졌다·
“신의 힘을 이어받은 두 명의 계승자와 하루를 버틴 것도 모자라 단신으로 또 하루를 버티다니·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아나스탸사는 마침내 몸을 움직여 전장으로 향했다·
-콰콰쾅!
불 물 바람 빛 어둠·
그 외에 흔히 보기 힘든 여러 희귀 속성까지·
가히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마법 속성을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힘을 빛의 질서를 위해서 써줬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못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아나스타샤였다·
그녀가 현장에 도착하자 다크 엘프들은 기다렸다는 듯 길을 내주었다·
천명에 달했던 다크 엘프의 수는 불과 이틀 만에 절반 아래로 줄어버렸다·
“이미 서 있을 힘도 없어 보이는데요?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요?”
아나스탸샤는 정확히 20보 앞에 자리한 루나브는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물었다·
그녀는 처음 마법을 쓴 이후 지금껏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끝날 때가 다 돼서야 나타나네요· 구원자란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다 야비한가요?”
“달리 말하면 현명한 거죠·”
현명하단 말에 루나브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나 아나스탸사의 말대로 그녀에겐 이미 마력은커녕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결계를 유지할 힘만 간신히 남은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끽해야 몇 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참 이해가 안 되네요· 이렇게까지 해서 당신한테 남는 게 뭐죠? 아무 의미 없는 허무한 죽음에 지나지 않나요?”
“제 인생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평생을 가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누구 한 사람을 위해 전부를 바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태어났을 때부터 철저하게 학회의 목적을 위해 살아왔던 지난 삶·
그 무의미한 삶에 처음으로 의미를 부여해준 것이 시안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을 지금 제대로 느끼고 있어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걸 준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 일이라는 것까지도요· 그러니 지금 제 죽음은 절대 허무하다고 할 수 없어요····”
루나브는 아나스타샤의 앞에서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어떠한 가식이나 거짓도 없었으며 오직 진심만이 담겨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지경에 까지 이른 상황·
“이봐 숙녀님·”
그런 와중에 머릿속에서 레미하람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후회 안 해?”
“제가 뭘 후회해야 하는 거죠?”
“그 친구와 함께하고 싶었잖아· 그 친구 없이 이렇게 혼자 최후를 맞이해도 정말 괜찮은 거야?”
“그냥 좀 더 들러붙고 더 귀찮게 해서 선배와 더 많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긴 하네요·”
루나브는 그제야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레미하람은 어때요? 어리석을 정도로 일관적인 절 주인으로 만나서 후회되진 않으신가요?”
“그런 섭섭한 말을 하면 곤란하지·”
레미하람은 빛과 함께 실체화하여 루나브 앞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 얼굴 보지 말고 여길 봐·”
그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본체 마서였다·
쫙 펼쳐진 책 한 곳엔 익숙한 글귀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숙녀님이 바꾼 그 미래 아직 안 변했어·”
“···!”
당황한 루나브의 눈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마지막이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마· 숙녀님의 마지막은 여기가 아니야·”
“뭐 뭘 하려는 거예요 레미하람?”
“숙녀님 입으로도 말했잖아? 누군가를 위해 전부를 바친다는 건 정말로 기쁜 일이라고!”
레미하람은 마침내 루나브가 가지고 있던 마서를 돌려받았다·
그와 동시에 루나브의 발밑으로 또 하나의 전이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잘 가 숙녀님· 그동안 재밌었어·”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루나브는 아니었다·
그의 말 그의 미소 그의 마음·
자신과 함께했던 소중한 파트너의 진심을 모두 깨달은 루나브는 기어이 감격의 울음을 터트리며 레미하람을 끌어안았다·
노델리 유적에서부터 시작된 루나브와 레미하람의 인연은 그렇게
“고마워요· 레미하람···!”
아름다운 끝을 맺었다·
“미안 오래 기다리게 했지?”
그렇게 자신의 주인을 떠나보낸 레미하람은 만족에 겨운 얼굴로 아나스탸사를 돌아보았다·
그가 펼쳐낸 마서의 안에선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발현되고 있었다·
“···!”
그의 의도를 파악한 아나스탸사는 눈이 부릅떠졌다·
“본인의 존재 자체를 없앨 생각인가요 마서?”
“여기 적힌 우리 숙녀님의 미래를 이뤄주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레미하람은 마서에 적힌 글귀를 보란 듯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시안과 함께>
* * *
짙은 검은 안개가 자욱이 깔린 안개의 제단·
-또각또각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 주인의 귀로 익숙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팔자 좋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아에르?”
(아쿠아니스 님 얼굴엔 주름이 좀 지셨군요?)
“평소 같았으면 농담으로 넘겼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네요·”
아쿠아니스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아에르를 마주하였다·
“지금 밖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아시죠?”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란 건 압니다·)
“혹시 예상하고 계셨나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걸?”
그녀의 진중한 질문에 아에르는 그럴 리가 있겠냐며 크게 웃었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우리의 미래이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를 닮은 피조물들이 만드는 미래를 우리가 어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즉 아에르 당신은 방관만 했을 뿐이다· 이 말이네요?”
아에르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정말 당신이란 남자의 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오히려 루멘델의 속이 더 알기 편해요· 그 남자는 예전부터 한결같았으니까·”
빛의 질서가 세워진 피조물의 세상을 이대로 쭉 유지하는 것·
루멘델이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거 하나였다·
“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뭔가요 아에르? 루멘델과 마찬가지로 검은 안개가 중심이 된 세계를 만들고 싶은 건가요? 본인의 질서가 세워진?”
(신이라고 하는 직함을 처음 달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인계를 향한 제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쿠아니스의 물음을 부정하는 동시에 아에르는 긴 세월 동안 정립해온 자신의 진심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전 우리가 인계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빛도 안개의 질서도 아닌 온전히 그들에 의해 만들어질 세상· 전 그런 세상을 원합니다·)
아쿠아니스는 차마 진심이냐며 되묻지도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