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그가 만든 세상 (1)
“저 저게 뭐야?”
인간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미지의 공포를 마주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쥬른 북쪽 성벽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기사들의 감정이 딱 그러했다·
“누 누가 봐도 인간은 아니잖아? 엘프인가? 아님 마족?”
“난 둘 다 아닌 것 같은데?”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저놈들 눈을 봐! 딱 봐도 이곳을 노리고 있잖아!”
현재 쥬른엔 제국의 황녀 아린 세벨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있는 만큼 저 정체 모를 존재들의 접근을 반드시 저지해야만 했다·
-탓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성문을 향해 질주를 시작한 다크 엘프들·
“오 온다!”
기사들은 일단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창과 방패를 붙들고 수비 대열을 갖추었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다크 엘프가 갑자기 기사들을 향해 손을 뻗더니
-우우웅
마나 발현에 이어 작은 마법진을 생성하였다·
“놈들이 마법을 쓴다!”
뒤늦게 대응하려 했지만 이미 기사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얼음 운석이 나타났다·
“모 모두 피해!”
기사들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쿵!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으로 충격의 파장이 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기 직전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 기사들은 곧 살아있단 것을 인지하고선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들의 머리 위론 푸른빛의 평평한 얼음 장막이 운석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사 살았다!”
생존한 것에 안도한 것도 잠시
“다들 물러나세요!”
어디선가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기사들은 황급히 얼음 운석 밖으로 대피했다·
곧 장막이 사라지며 얼음 운석은 다시 땅 위로 낙하했다·
-쿵!
또 한 번 굉음과 함께 충격의 파장이 일었다·
다크 엘프들은 자신들의 일을 방해한 장본인이 있는 곳으로 전부 시선을 돌렸다·
“대해의 분노가 재앙을 집어삼키리라!”
허나 우렁찬 주문에 이어 그들의 눈앞으로 거대한 급류가 들이닥쳤다·
물길에 휩쓸린 다크 엘프들은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며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프로즌(Frozen)!”
연이어 빙결 마법이 시전 됨에 따라 급류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빙결의 여파는 다크 엘프들에게까지 이어졌다·
“···?”
기사들은 어찌 된 상황인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털썩
연이은 마법에 힘이 빠진 여인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황 보고해주세요!”
곧 성문 안쪽에서 급보를 듣고 아린 황녀의 군사들이 달려왔다·
허나 상황은 이미 종식되어 있었다·
“그 그게 갑자기 정체 모를 여인이 나타나서 저 기형체들을 전부 얼렸습니다!”
“여인?”
아린은 기사들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남색 머리에 한눈에 봐도 선명한 물의 마력이 느껴지는 여인·
“에 엘리스?”
바로 베르트 공작가의 장녀이자 시안의 누나인 엘리스였다·
* * *
다크 엘프의 출몰 소식은 쥬른만이 아닌 프루이나와 인접한 제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속속 전해졌다·
하나 같이 성문 앞에 나타나 위협을 가했고 이에 기사들이 나서 저지하려 했지만 쥬른을 제외한 그 어느 도시에서도 습격을 막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성문 앞에서 한바탕 일을 벌인 후엔 내부로 침공하지 않고 전부 물러났다고 했다·
다음엔 이 정도에서 끝내지 않겠다는 묘한 기세를 남긴 채·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러니까 그 다크 엘프라고 하는 대단히 위험한 종족을 엘프가 아닌 인간이 이끌고 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거죠 엘리스 님?”
“네····”
‘마리안 님은 괜찮으실까요?’
“현재로선 괜찮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아직 그분의 신기가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니 무사하실 거라고 봐요·”
엘리스는 불안해하는 하스티아를 다독여주었다·
“대체 누군가요? 그 다크 엘프란 존재들을 이끈다는 인간이?”
루나브의 물음에 엘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해 주먹을 움켜쥐며 살짝 머뭇거렸다·
“아나스타샤 스펜시아·”
“···!”
순간 루나브가 쥐고 있던 마서가 들썩이며 반응했다·
“또 다른 성검의 주인입니다····”
그 한마디에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성검의 주인이요? 에쉘 베르트 외에 성검의 주인이 또 있었단 말인가요?”
“정확히는 성검의 전 주인이라고 해야겠죠· 오라버니 아니 에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에게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두려움과 공포가 절로 솟아올랐다·
“신의 비밀을 탐했다더니 기어이 시안 그 친구가 일을 냈구만····”
이에 레미하람이 혼잣말하듯 루나브의 옆에서 속삭였다·
“누군지 아시는 모양이네요?”
“가장 완벽한 인간이지· 너무 완벽해서 신조차도 두려움을 느꼈던····”
그러면서 슬쩍 시선을 돌려 케이람의 눈치를 살폈다·
[····]
케이람은 의외로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엘리스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시안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 아공간에 있었던 에쉘과 하나가 되면서 그에게 잔재해 있던 성력까지 모두 흡수했어요·”
“몰랐어요· 설마 엘리스 님이 그 남자를 데리고 있었을 줄은····”
“시안의 손에 더는 피가 묻길 바라지 않았던 마음에 그랬던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론 제가 안일했어요·”
“엘리스 님은 시안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본인이 직접 말해준다고 했는데 아직 듣지 못했어요·”
잠시 주저하던 아린은 곧 조금 전 브라이언에게 들었던 시안의 비밀을 엘리스에게도 말해주었다·
“그럴 수가···!”
진실을 알게 된 엘리스는 똑같이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측은한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었겠네요·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할 혼자만의 고통을 짊어지느라····”
이제는 그 고통에서 그만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세상은 시안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서 그 아나스타샤란 인간은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죠?”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그 이유에는 시안이 있겠죠· 그녀는 대화를 원한다고 했어요·”
“대화요?”
“네· 아무래도 시안과 관련해서 어떤 협상을 하려는 거겠죠· 우리에게 있어 별로 좋은 협상은 아니겠지만····”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아린은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가서 그녀와 대화를 해볼게요·”
주위에 있던 모두의 눈이 번뜩 뜨였다·
“무모합니다 황녀님!”
레시무스가 펄쩍 뛰며 만류했다·
“그 인간이 정말 성검의 주인이라면 우리에게 해를 가하려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 정도는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다크 엘프들을 통해 무슨 목적을 이루려는 건지
또 시안을 두고 어떤 협상을 하려 할지·
아린은 그 속셈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며 모두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은 따라오실 필요 없어요· 제가 대표로 혼자 가겠습니다·”
“하지만 황녀님···!”
“황명이야 레시무스· 더 막으려 들지 마·”
거스를 수 없는 황명이라며 강하게 응수하니 레시무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어떤 요구를 하든 그것이 시안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럼 저도 갈게요·”
가만두고 볼 수 없던 루나브가 손을 들며 말했다·
“선배와 관련된 대화를 하러 간다는 데 제가 안 따라갈 수도 없죠·”
아린은 뭐라 말리려다가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루나브의 평소 성격을 봤을 때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있으면 더 든든하다는 마음도 들었다·
“황녀님! 잠깐 밖으로 나와보십시오!”
그때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한 기사가 허겁지겁 들어와 소리쳤다·
기사의 말을 따라 모두 밖으로 나오니 쥬른의 성문 너머 고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빛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빛은 성검이 뿜어내는 빛과 흡사했다·
“저 방향은?”
“프루이나 쪽이네요· 아마도 아나스타샤 그녀가 신호를 보낸 것 같아요·”
“신호요?”
“네· 자기는 여기에 있으니 준비됐으면 오라는 뜻이겠죠····”
엘리스의 설명에 아린과 루나브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저할 이유도 없기에 둘은 바로 빛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향했다·
* * *
우시프 제국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시린 찬바람이 부른 언덕 위·
그곳엔 아린과 루나브를 이곳으로 부른 또 다른 성검의 주인 장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번에 그가 아나스타샤라는 것을 파악한 둘은 망설임 없이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건 좀 예상외네요? 시꺼먼 남정네들이 올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아리따운 숙녀님들이 오실 줄이야·”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며 둘을 맞이했다·
“반가워요· 제 이름은 아나스타샤 스펜시아 보시다시피 성검의 주인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맞춰 아린과 루나브도 자신들을 소개했다·
“우시프 제국의 황녀 아린 세벨러스입니다·”
“가람 왕국 마법 학회의 대표 루나브 레인리버에요·”
범상치 않은 소개에 아나스타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국의 황녀와 마법 학회의 대표요? 정말 어마어마한 분들이 오셨네요· 나쁘게 보이면 안 되겠는걸요?”
그러면서 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국 곳곳에 다크 엘프 무리를 보낸 주동자가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그 점에 대해선 먼저 사과부터 드릴게요· 먼저 보여드릴 필요가 있었거든요· 대륙의 인간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를 말이죠·”
이에 루나브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륙의 혼란을 원하는 건가요?”
“혼란이라니요? 전 빛의 질서를 수호하는 사람입니다· 평화라면 모를까 그런 무시무시한 미래를 바라지 않아요· 여러분도 결국 그걸 막기 위해 절 찾아온 거잖아요 맞죠?”
둘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할게요· 시안 베르트· 그 남자만 제게 넘기세요·”
“시안을··· 어쩌실 생각이죠?”
아린의 진중하게 묻자 아나스타샤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죽일 거예요·”
“···!”
루나브는 순간적으로 들고 있던 성서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님 당신들이 직접 죽여서 목을 들고 와도 됩니다· 전 그 남자가 죽은 것만 확인하면 되거든요·”
아린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제어하며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시안을 왜 죽이시려는 거죠?”
“그 남자로 인해 다크 엘프가 깨어났으니까요·”
“저희가 못 내준다면요?”
“아마 이 세상이 혼란으로 물들어지겠죠?”
아나스타샤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을 이었다·
“시안 베르트는 신의 비밀을 탐한 중죄인입니다· 그로 인해 프루이나 만년설 아래 봉인되어 있던 다크 엘프들이 부활하고 말았어요· 그들은 이제 제국만이 아닌 대륙 각지로 퍼져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겁니다· 그런 비극적인 미래를 굳이 보실 이유는 없잖아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게 성검의 주인이 할 짓인가요?”
루나브가 눈초리를 바짝 세우며 되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바로 대답을 잇는 대신 살짝 코웃음을 쳤다·
“이제 보니 당신 마서의 주인이었군요?”
루나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국의 황녀가 추악한 마서의 주인과 연합해 마검의 주인을 지키려 한다니· 대체 이 세상은 얼마나 잘못된 건가요?”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도 결국 당신 기준 아닌가요?”
줄곧 미소를 유지했던 아나스타샤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제 뜻은 신의 뜻입니다· 제 뜻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건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신은 우리의 세상을 만들지 않았어요!”
아린과 루나브는 동시에 소리쳤다·
“우리의 세상을 만든 건 바로 시안이에요!”
시안이 있었기에 시안이 만들어주었기에 그들이 살 수 있었던 이 세상·
둘에게 있어 아니 이미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있어
시안은 기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과 삶을 만들어준 창조주와 다름없었다·
“····”
아나스타샤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더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협상 결렬·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기에 둘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 번 겪어보세요· 다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미련한 일인지····”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아린과 루나브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보다가도 노을이 지는 언덕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후회 안 하세요?”
“갑자기?”
“제국의 백성을 지켜야 하는 황녀로서 답지 않은 행동을 하신 거잖아요·”
“시안도 엄연한 제국의 백성이야·”
아린은 뭐가 문제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시안이 나를 지켜준 만큼 나도 시안을 지켜줘야겠지····”
그녀의 눈앞에선 10년 전 자신을 지키기 위해 트롤과 혼자 대면했던 시안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