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자격 (3)
주변 50m 반경의 사람들이 전부 들었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
일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해 턱뼈가 돌아갈 지경이었다·
“아 아린! 네년이 감히?”
미친 것인가?
아님 자포자기를 한 것인가?
이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를 세우고 자신을 나무라다니·
루이넬로선 정말 예상치 못한 봉변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아린은 개의치 않고 멱살을 잡지 않은 반대 손으로 뭔가를 꺼냈다·
“보이십니까 여러분?”
그러곤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절 전선 순방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는 것을 인증하는 임명서입니다! 이 임명서에 따라 전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전선 순방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조그맣게 시작된 웅성거림이 곧 거리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가 부재한 그 틈을 타 루이넬 황자는 황성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기사들을 동원해 각 도시 및 영지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이것은 엄연한 반역 모의입니다!”
“반역이라니! 지금 누구 앞에서 반역이란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루이넬 또한 아린의 멱살을 붙들며 응수했다·
아린은 굴하지 않고 민중들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따라야 할 이 제국의 주인이 누굽니까? 저도 제 앞에 있는 루이넬 황자도 아닌 바로 디오네 황제 폐하입니다! 아닙니까?”
아린의 물음에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런 황제 폐하의 직무 수행을 임명받은 유일한 대리인입니다! 저를 부정하겠다는 건 곧 황제 폐하와 이 나라 자체를 부정하는 겁니다!”
“현혹되지 말라 민중들이여!”
루이넬은 급기야 아린을 옆으로 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동안 우리 황실이 어떻게 능욕당했는지 벌써 잊었는가? 아린 황녀는 그 흉악한 범죄자들과 손을 잡고 지난 7년간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뿐인 줄 아는가? 그녀는 개국 이래 빛을 숭배해온 우리 제국의 정신을 무시하고 더러운 검은 안개의 존재와 손을 잡았다! 자신도 모자라 우리 모두를 어둠으로 물들이기 위해!”
“그 더럽다고 말하는 안개의 존재가 제국과 대륙을 구했다는 건 아십니까!”
“···?!”
거리엔 잠시 정적이 일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그동안 악이라 치부하고 배척했던 그 검은 안개로부터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거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검은 안개로부터 해를 입은 적이 없었으니·
“우리는 그동안 빛을 숭배하고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구원자를 자청하며 빛의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성검의 주인이 얼마나 흉악한 뒷면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진짜 악으로부터 우릴 구원해준 이가 바로 검은 안개의 계승자 시안 베르트 입니다!”
민중들의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다분했다·
“화 황녀님 말이 사실인가?”
“솔직히 그 남자가 황실을 구한 건 맞는 것 같긴 한데····”
“대체 어느 말을 믿어야 하는 거지?”
수백 년간 정립되어온 제국의 관념을 무너트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린은 멈추지 않고 논설을 이었다·
“여러분은 모르겠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 큰 위험이 불어닥칠 뻔했다는 것을! 에쉘 베르트의 농간으로 마계의 최강자가 인계로 넘어오려 한 걸 저지한 자도 역시 시안 베르트 입니다!”
“···?”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루이넬 황자가 자기 자리를 찾는 일에 급급했을 때 그자는 마왕과 홀로 대적함으로써 인계의 평화를 지켰습니다! 이래도 그가 추악한 존재입니까?”
“거 거짓말이다! 근거 없는 낭설에 속지 마라 민중들이여!”
루이넬은 더 크게 소리치며 아린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낭설이 아니에요·”
황궁 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면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루이넬은 물론 아린 역시 당황을 금치 못했다·
황궁 안에 있다가 어느샌가 밖으로 나온 루나브와 세트였다·
둘을 알아본 일부 무리 속에서 웅성거림이 재차 일었다·
“우리는 아린 황녀님의 순방 임무를 돕기 위해 특별 수행원으로 함께했어요· 아린 황녀님의 말을 모두 사실입니다· 시안 베르트는 마계의 존재들로부터 인계를 구했습니다· 가람 학회의 이름을 걸고 거짓이 아님을 분명히 밝힐겁니다·”
“나도 마찬가지! 스파니아 왕실의 명예를 걸고 분명히 말한다!”
둘은 각각 학회와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을 내보이며 아린 황녀의 주장이 진심임을 밝혔다·
이에 민중들만이 아닌 황자의 기사들 또한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흠· 우리 괜한 짓 한 거 아닐까 후배님? 아린 황녀가 도와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잖아·”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뭘 되짚고 그러세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세트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애초에 지금 저희가 한 행위는 도움이라고 할 것도 못 돼요· 그냥 살짝 보탠 것뿐이죠·”
“뭐 그건 맞는 것 같네· 굳이 우리가 나서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풀렸을 거야·”
-탁탁탁
그때 거리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을 제치고 아린의 뒤로 우루루 몰려든 기사들·
그들의 견갑엔 전부 붉은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즉 루이넬을 따르는 반군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이제 더 봐주는 것도 지쳤다! 네년은 그나마 대우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도 놓쳤어! 이제부터 널 황녀로 대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아린!”
지원군 도착에 인상이 펴진 루이넬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린 황녀를 연행해!”
이내 지시를 받은 기사들은 수갑과 밧줄을 들고선 아린에게 다가갔다·
-스윽
허나 기사들은 몇 걸음 못 가서 발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부 지켜본 사람들이 황녀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기사들의 진로를 틀어막은 것이다·
예상치 못한 민중들의 돌발 행동·
“아린 황녀님을 지키자!”
당황한 기사들은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이런 바보 같은! 뭘 멀뚱히 보고 있어! 당장 이년을 끌어내란 말이야!”
다급해진 루이넬은 옆에 있던 호위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지만
“····”
기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 움직이지 않았다·
“황녀로서 명합니다·”
그러자 아린이 그들을 향해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제국의 반역자 루이넬 세벨러스를 지금 당장 연행하세요!”
“이년이 그래도 끝까지···!”
-턱
기사들은 바로 루이넬의 양팔을 붙잡았다·
얼굴이 혼비백산해진 루이넬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었다·
“니 니들 뭐야? 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황녀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기사들은 루이넬의 말을 무시한 채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루이넬은 거세게 저항했다·
“이거 놔! 제국이 망하는 꼴을 기어이 봐야겠어? 저런 껍데기 황녀를 따라봐야 남는 건 파멸뿐이라고! 뭐가 진리인지 파악하란 말이야 이 어리석은 놈들아!”
황자로서의 품위마저 완전히 잃은 비참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기사들은 저항하는 황자를 힘으로 제압한 채 그대로 황궁으로 연행했다·
어떤 병력이나 수행원도 없었고 아무런 물리적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직 떳떳한 마음과 굳은 신념만으로 아린은 민중들을 설득해 황실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황제 폐하 만세! 아린 황녀님 만세!”
그런 황녀를 향해 민중들은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더불어 그녀가 황제의 뒤를 이어 제국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후계자임을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증명한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외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
“이걸로 더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민중들 앞에 군림한 황녀를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난관을 극복하고 새롭게 피어난 꽃이 이제는 그 아름다움을 펼칠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공작님····”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림자가 진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허리엔 전선의 상급 기사들이 사용하는 백색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 * *
“미안해요 아린· 내가 부족해서 황성을 지키지 못했네요·”
“그런 말씀 말아주세요 비올렛 언니· 이렇게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혹여 험한 일을 당한 건 아닐까 아린은 매우 걱정했었다·
허나 비올렛은 그저 독방에 감금만 당했을 뿐 우려했던 큰 문제는 없었다·
“대단하네요· 설마 호위 병력도 하나 없이 맨몸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죠? 오라버니 아니 루이넬 황자는 이 반란의 근원이 아닌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해요·”
“네·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요· 저와 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던 제국의 인사들이 이 반란을 주도했다는 걸····”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아린의 잠깐의 고민 후 말을 이었다·
“회담을 열어볼까 해요·”
“회담이요?”
“네· 저를 향한 의심과 불신으로 인해 이 사태가 벌어졌으니 그들에겐 아무 잘못도 묻지 않을 거예요· 루이넬 오라버니도 마찬가지고요· 대신 제가 자격이 있다는 걸 그리고 제 뜻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어요·”
“무모한 일이란 건 알죠?”
“그렇기에 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확인한 비올렛은 아린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끝까지 도와줄게요·”
“고마워요 언니·”
두 자매는 진실된 교감을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한 시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린 황녀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자리를 비켜줘야겠네요· 난 이만 가볼게요·”
비올렛이 방을 떠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남녀가 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루나브와 세트·
아린은 말없이 팔짱만 낀 채 둘을 맞이했다·
그로 인해 방에는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다·
“정말 멋있었어 아린 황녀! 왕자인 내가 봐도 반할 만큼 아주 당당하던걸!”
그 어색함을 깨고자 세트가 분위기를 높여봤지만 아린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제가 분명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요?”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애매한 정적의 시간이 흐르고
“하····”
아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
“이 말 밖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네요·”
그러곤 미소와 함께 둘을 제대로 맞이해주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에요·”
루나브 역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며 화답했다·
“왜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는지 직접 보고 나서야 알게 됐네요·”
“운이 잘 따랐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으니까·”
“무모하긴 했지· 아마 시안 그 녀석이 봤으면 제정신이냐고 난리 쳤을 거야!”
낄낄대는 세트와 다르게 아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시안은··· 어떻게 됐어?”
“도망갔어요· 하스티아랑·”
“···?”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아린은 두 눈을 끔뻑였다·
“어쨌든 여기 일은 잘 해결됐으니까· 저도 이젠 안심하고 다시 선배를 찾으러 가야겠네요·”
“아 알아듣게 설명 좀 해줘· 하스티아랑 어딜 갔다는 건데?”
-똑똑
루나브가 설명을 이으려던 와중 또 노크가 울렸다·
-벌컥
울리는 동시에 바로 열려버린 문·
검은 망토를 두른 낯선 누군가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하아 하아····”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매우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 모두가 어리둥절한 찰나
“미아?”
그녀를 알아본 아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불렀다·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님께 전할 사실이 하나 있어서 왔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다급하고 불안해 보였다·
“당주 아니 시안 님의 생사가 불명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