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8화· 자격 (2)
“바렌스 후작가를 비롯해 17명의 영주 및 가주들로부터 루이넬 황자님을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보냈습니다·”
“보내지 않은 곳은?”
“퀴젤 공작가를 포함해서 총 6곳입니다·····”
이미 제국 내에서 과반수에 달하는 지지를 얻었다곤 하나 루이넬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정작 자신의 외가인 퀴젤 가에서 아직 답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그 주축엔 분명 전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 쿤델 퀴젤이 있음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죽을 날만 남은 늙은 사자가 짐승들을 끌어모으는 꼴이로군·”
“그 늙은 사자가 아직까진 훨씬 더 믿음직스럽단 뜻이겠죠· 오라버니보단 훨씬 더····”
탁상에 마주 앉아있던 비올렛은 그런 루이넬을 한껏 조롱했다·
루이넬은 인상을 구기는가 싶다가도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당당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 비올렛·”
이곳은 루이넬의 방도 비올렛의 방도 아닌 다름 아닌 아린의 방·
황성을 점령한 루이넬이 황실을 지키고 있던 비올렛을 데려다가 이곳에 가둔 것이었다·
“딱 7년 전이었지· 네놈이 에쉘과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친 게· 나는 네놈들 덕분에 원하지도 않았던 나락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치욕스러웠던 순간을 루이넬은 단 1초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좌절하지 않았다· 네놈들이 말한 대로 나락의 두려움과 절망을 전부 이겨냈지! 그렇게 쭉 기다려왔다! 다시 원래의 내 자리를 되찾게 될 이 날을!”
실성한 듯 광소를 남발하는 루이넬을 비올렛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봐라! 에쉘이고 보리스고 날 배신한 놈들은 전부 몰락했지만 난 아직 건재하다! 이제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마지막으로 남은 내가 승리자다!”
“누가 들으면 오라버니가 다 이룬 걸로 알겠네요?”
결국 듣다 못한 비올렛이 비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듣자 하니 이 반란의 주축 세력도 오라버니가 아닌 바렌스 후작이라고 하던데 오라버니는 그냥 상징적인 존재 아닌가요?”
“닥쳐!”
-쾅!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루이넬은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쳤다·
“이건 반란이 아니야! 본래의 내 자리를 찾기 위한 정의로운 귀환이지!”
“정의의 뜻이 언제부터 변질된 거죠?”
“남매의 정으로 대우해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지금 당장 황성 거리로 나가서 날 지지한다고 선언해라! 내가 황좌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임을 인정하란 말이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런 거 시키실 바엔 그냥 죽이시라고·”
목숨을 위협하는 거센 협박에도 비올렛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라고 덤덤히 말하니 루이넬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왜요? 못 죽이시겠어요? 절 죽이면 민중들의 지지를 잃을까 봐 두려우세요? 이렇게 무작정 하라고 협박하면 제가 ‘네 그럴게요 오라버니’하고 따를 줄 아셨나요?”
루이넬은 대답하지 못해 이만 아득바득 갈았다·
“7년 전보다 더 못나지셨네요 오라버니·”
“···!”
“아린도 보고 비웃겠어요·”
“비올렛!!!”
루이넬은 기어이 이성을 잃고 그녀를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를 주변 시종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루 루이넬 황자님?”
혼란스러운 와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루이넬은 식식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누군데?”
“그 그게··· 타국에서 온 손님들입니다·”
타국이라는 말에 루이넬은 물론 비올렛 또한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스파니아 왕국의 왕자와 가람 왕국 마법 학회의 대표랍니다·”
* * *
황궁 내 접견실·
“하아암····”
가만히 앉아만 있긴 매우 지루했는지 세트는 하품을 남발했다·
“시간 꽤 지난 것 같은데? 이 나라는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네·”
“예통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죠· 아마 머리 빠지게 고민하고 있을 거라 봐요·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지금으로선 전혀 알 길이 없을 테니까·”
-끼익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곧 접견실의 문이 열리며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루이넬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시프 제국의 황자 루이넬 세벨러스입니다· 오신다고 미리 소식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타국의 귀빈들을 이렇게 모실 수밖에 없어 황자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저희 잘못이죠· 준비할 시간을 전혀 못 드렸으니까·”
루나브의 말엔 왠지 모를 가시가 담겨있었다·
이를 의식한 루이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표정을 유지했다·
스파니아 왕국의 1왕자 세트 샤하르칸과 가람 왕국 마법학회장의 손녀 루나브 레인리버·
두 명 다 각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만큼 루이넬로선 최대한 예를 갖추어서 대해야만 했다·
“아! 참고로 난 볼 필요 없수다· 어차피 우리가 할 말은 옆에 있는 후배님 아니 루나브 양께서 다 할 거니까·”
세트는 자기는 딱히 할 말이 없다면서 또 한 번 하품을 내질렀다·
이에 루이넬의 눈은 자연스레 루나브와 마주하게 되었다·
“빈집털이를 하셨더라고요?”
그녀는 시작부터 황자를 크게 자극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본래의 제 자리를 찾기 위한 정당한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루나브 양께서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쫓겨나게 됐는지·”
루나브는 대답 없이 품에서 꺼낸 두 개의 서신을 그에게 내밀었다·
서신 중앙엔 각각 두 왕국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확인해보세요·”
루이넬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서신을 확인했다·
“···!”
허나 내용을 읽자마자 그의 눈과 손이 크게 요동쳤다·
루나브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가람 왕국과 스파니아 왕국은 이번 루이넬 1황자의 행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1황자를 우시프 제국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두 왕국의 입장 선언·
루이넬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 이제부터 두 왕국이 우리 제국과 척을 지겠다 그 뜻입니까?”
“제국과 척을 지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당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죠· 우리는 계속해서 제국과 우호 관계를 이어나갈 겁니다· 그 점을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다시 말해 1황자만 물러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란 얘기였다·
이를 받아들일 리 없는 루이넬은 대뜸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7년 전엔 그렇게 도움을 요청해도 응답조차 안 해주더니 지금은 완전 반대로군요· 내가 아닌 아린 황녀가 도움을 호소했기 때문입니까?”
“오해하지 마쇼 황자· 아린 황녀님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바라지 않았어·”
대답은 팔짱 끼고 앉은 세트가 대신했다·
루이넬은 차오르는 분노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두 분 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실각해 있던 7년 동안 자격도 없는 것들이 황실을 능욕하고 망가트렸단 말입니다! 이건 비단 우리 제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가람 왕국과 스파니아 왕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걸 왜 모르십니까?”
“충분히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나선 거예요· 저희는 그 혼란을 수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아린 황녀님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린은 자격이 없습니다!!”
흥분한 루이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두 남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 자리는 원래부터 내 자리였습니다! 그 망할 것들이 잠시 찬탈하고 있던 거란 말입니다!”
“글쎄요? 그건 제 알 바가 아니라서요· 전 단지····”
담담히 말을 잇던 루나브의 눈빛에 순간 독기가 차올랐다·
“절 이용해 먹으려던 파렴치한 인간이 황자랍시고 설치는 꼴을 보고 싶진 않거든요·”
“무 무슨 말을?”
“7년 전 황성 연회·”
루이넬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데이즈 스톤을 이용해 그때 벌어진 참사를 우리 학회에 돌리려고 했던 사실을 저희가 정녕 모를 줄 알았나요?”
“호?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세트는 입술을 모으며 흥미롭단 반응을 보였다·
“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그날의 사태는 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루이넬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지만 그런다고 루나브의 마음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저 황자님?”
그때 밖으로부터 한 소식을 접한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한눈에 봐도 매우 당황한 얼굴이었다·
“뭐야?”
“지금 황성 거리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 누가 나타났다는 건데?”
“아린 황녀님이····”
루이넬의 얼굴은 또다시 구겨지고 말았다·
* * *
우시프 제국의 수도 세벨리너스의 중심부·
넓게 펼쳐진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들은 전부 외곽에만 자리할 뿐 그 누구도 길목 중앙을 나다니지 않았다·
대신 남녀노소 신분 상관없이 전부 같은 얼굴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지?”
“설마 혼자 오신 거야? 아무 호위 병력도 없이?”
“저분 정말 아린 황녀님 맞아?”
황궁으로 이어진 은빛의 길을 당당히 나아가는 한 여인·
바로 아린 황녀였다·
결연한 걸음에선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일부 사람들은 마치 신의 행차를 보는 것 같단 느낌이 들 만큼 그녀의 기세에 제대로 눌려 있었다·
“아 아린 황녀님?”
이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자로부터 황녀를 발견하는 즉시 생포하란 명을 받았지만 그 누구도 아린을 막겠답시고 나서지 않았다·
왠지 그녀의 앞을 막으면 큰 죄를 저지른다는 기분을 느낄 것 같았으니·
그야말로 정면 돌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나 간섭없이 황궁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는 듯 지만
“멈춰라 아린·”
이를 가만두고 볼 리 없는 루이넬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기사들은 아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바로 주위를 둘러쌌다·
그럼에도 아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시선으로 앞에 자리한 루이넬을 노려만 볼 뿐·
루이넬로선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머리채를 붙잡고 싶었지만 아직 주위엔 보는 눈들이 많았다·
일단은 미소의 가면으로 속내를 감춘 뒤 천천히 아린에게 다가갔다·
“어서오거라 아린· 오느라 고생 많았다·”
“····”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할 얘기가 무척 많을 터이니·”
루이넬은 함께 가자며 손수 손까지 내밀었다·
허나 아린은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루이넬은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아린에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같잖게 버티지 말고· 인도적으로 대해줄 때 말 따라라·”
“····”
“지금 보는 눈이 많아서 널 봐주고 있다 생각하면 큰 오산····”
-콱!
살벌한 목소리로 말을 잇던 루이넬은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아린이 그의 멱살을 붙잡은 것이다·
“지금 누구 앞이라고 명령입니까? 루이넬 황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