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비밀 속으로 (7)
-슉!
전광석화로 찌른 성검의 끝이 왼쪽 볼을 스쳤다·
아나스타샤는 이에 멈추지 않고 바로 손목을 틀어 내 머리 쪽을 수평으로 갈랐다·
-챙!
나는 케이람을 들어 가볍게 막아냈다·
그러자 맞댄 검날을 타고 미미한 떨림이 전해졌다·
아마 그녀 또한 나와 비슷한 떨림을 느꼈을 것이다·
추위나 바람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감흥이다·
인생에 다시 없을 진정한 호적수와의 조우·
그로 인해 느끼는 엄청난 희열감·
기사건 암살자건 상관없이 검을 사용하는 자라면 절대 참을 수 없는 그런 감흥이지·
초반엔 원거리에서 검기를 날리거나 범위가 큰 비기를 시전하는 등 탐색전을 이어나갔다·
허나 얼마 안 가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아나스타샤는 바로 속도전으로 전환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은 놔두고 얼굴 쪽만 집요하게 노렸다·
-후웅!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
예상치 못한 자연 현상에 당황한 것일까?
내 목을 노리던 성검의 방향이 돌연 다른 쪽으로 틀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그녀의 안면으로 반격을 가했다·
-쐐액!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회피하였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허나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살짝 베어진 왼쪽 볼 위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상처가 났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넋 나간 눈으로 얼굴에 흐르는 피를 매만졌다·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 얼굴을 노리셨을까요?”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더불어 지금까지 얼굴 부분만 집요하게 노리고 있던 게 누구였는지·
“이러다 흉터라도 지면 사람들이 보고 걱정하거든요· 누가 전능한 구원자님께 상처를 입혔냐고····”
“구원자라는 자가 고작 흉터 하나에 집착하는 건가?”
“아 미안해요· 잠시 추태를 보였네요· 상처라는 걸 너무 오랜만에 입었다 보니 저도 모르게 흥분했나 봐요· 그 검의 전 주인이었던 디오도 저랑 이렇게까지 싸워주진 못했거든요·”
그녀는 바닥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쥐어 피를 닦아냈다·
“오히려 그 남자보다 더 마검의 주인다운 모습을 보는 기분이에요· 덕분에 당신에 대해서 더 궁금해졌네요· 뭐 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게 없어 저로선 답답할 노릇이지만····”
뭔가 꿍꿍이가 생각난 듯 곧 그녀의 눈가로 음흉한 눈웃음이 지어졌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저랑 거래를 하는 거예요·”
“거래?”
“네· 제가 먼저 호의를 베풀어 드릴게요· 저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주세요· 최선을 다해 답해 드릴 테니·”
즉 질문을 대가로 내게 궁금한 것을 묻겠다는 뜻이었다·
뭐 나로선 딱히 나쁠 건 없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대화의 주도권을 잡지 않았는가?
이 기회를 이용 안 할 이유는 없지·
“저 다크 엘프를 이용해서 뭘 꾸밀 작정이었지?”
“역시 그걸 물을 줄 알았어요·”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바 다크 엘프라고 이름 지은 저 개체들은 화이트 엘프의 시체에 마수의 피를 주입해서 만든 새로운 생명체에요· 뭐 이건 별로 놀랍지 않으시죠? 이미 예상하셨을 테니까·”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게 하려고 성서와 그의 주인이 애 좀 먹었죠· 소생 마법을 이용했답니다·”
성서의 주인이라면 아마 보리스 르헬름 그놈을 말하는 것이겠지·
이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들은 특별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진화하거든요· 인간보다 더 뛰어난 발전 가능성을 가진 종족이라고 할 수 있죠·”
“굳이 저런 존재를 만들지 않더라도 이미 이 전쟁의 승세는 너희 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뭐 하러 이런 번잡한 짓거리를 하는 거지?”
“어머 의외네요? 본인들이 진다는 걸 이미 예상하고 계셨던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혼란이에요·”
“혼란?”
“네· 아직은 프루이나에 머물고 있지만 이 다크 엘프들은 곧 대륙 전체로 나아갈 거예요· 대화는 일절 통하지 않고 성난 마수처럼 파괴와 살육만을 일삼는 그들이 인간과 접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처하는 걸까?
“정말 재밌는 세상이 만들어지겠죠? 우린 그런 세상을 만든 주범으로 당신들의 주인인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를 지목할 겁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상황인데?
“그럼 사람들 마음속엔 점점 검은 안개를 향한 부정과 불신 그리고 원망이 피어날 겁니다· 이후엔 우리를 향해 기도하겠죠! 부디 자신들을 이 추악한 검은 안개로부터 구해달라고 말이에요!”
아나스타샤는 아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까지 취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런 무서운 표정 지으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혼란이 찾아온 세상을 루멘델님과 제가 구원할 거니까· 당신들은 이 올바른 세상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악의 역할만 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이 미친년 봐라?]
잠자코 있던 케이람도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토해냈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절대 악이란 존재를 만들어 세상의 혼란을 유도한 다음 이를 구원이란 이름의 거짓으로 뒤덮어 자신들의 세상으로 만든다·
이에 동반되는 희생은 절대로 책임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한테 물은 거냐?]
“그럼 케이람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뭔데?]
이런 상황에 무슨 질문이냐는 듯한 말투였다·
“케이람 님의 전 주인께선 사람들에게 검은 안개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어 맞아· 근데 그게 뭐?]
“그럼 아에르 님과 케이람 님은 대체 뭘 위해서 저들과 싸우시는 겁니까?”
[····]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길래 이런 취급과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들 막으시려 하는 겁니까?”
[별거 없어·]
좀 더 머뭇거릴 거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케이람은 바로 답을 내었다·
[너 해와 안개가 같이 있는 거 봤냐?]
“···못 봤습니다·”
[그게 이유야·]
단호한 대답엔 어떠한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그 둘은 공존할 수 없어· 하나가 보이면 하나는 보이지 말아야 해· 그러니까 서로 필사적으로 잡아먹으려 이렇게 애를 쓰는 거야· 살아남기 위해·]
“그게 다입니까?”
[그럼 뭐 대단한 이유나 비밀이라도 있을 줄 알았니? 쟤들이 말하는 질서니 뭐니 하는 것도 그냥 다 듣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야· 그냥 지들이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안 보이게 해야 하는 거지·]
거창한 이유 엄청난 비밀·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저 각자가 살기 위해 저지른 어쩔 수 없는 행위였을 뿐·
지극히 본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혼자 쑥덕거리세요?”
잠시 무시당한 것에 기분이 상한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쯤 알려 드렸으니 이젠 제가 답을 들을 차례겠죠? 그러니 슬슬 알려주세요· 당신의 이름을 시작으로 당신에 관한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뭔지 아는가? 바로 저거다·
너는 누구냐·
대체 누구길래 자신의 앞에 나타나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는 거냐?
대부분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왜냐고?
당연히 전부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설사 그게 저 완벽한 성검의 주인이라고 해도
이 원칙은 깨치지 않는다·
-우우웅
한 손에는 마력을 다른 한 손에는 안개의 힘을 끌어모았다·
사람이 태어나는 수는 한 가지밖에 없지만
죽음의 수는 무한에 가깝도록 많다·
그만큼 인간의 몸은 죽음에 너무나도 취약하단 뜻이다·
압도적인 힘? 거창한 마법?
그딴 건 필요 없다·
암살자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간·
1초 아니 그거보다 더 적어도 좋다·
상대가 대처할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작은 시간적 차이를 벌린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작은 시간을 위해 나는 내 안에 깃든 모든 힘을 끌어냈다·
“무검(霧劍)····”
“···?”
뭔가 위협을 감지한 아나스타샤는 바로 검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멈춰버린 찰나의 시간·”
술식을 읊조림과 동시에 내 몸은 공간을 가로질러 아나스타샤의 등 뒤로 이동했다·
“···!”
내 움직임을 잡지 못한 그녀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엄습해온 살기를 감지해 본능적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걸로 끝이다·
-푹
안개를 머금은 케이람의 끝은 아나스타샤의 목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귀에 입을 대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피가 번지며 충혈된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내 이름은 시안 베르트· 너희의 진면을 알고 너희의 질서를 부정할 유일한 인간이다·”
“···!”
“이 사실을 네놈들의 몸과 머리에 똑똑히 각인시켜야 할 거야·”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아나스타샤는 입을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커헉!”
연거푸 터져 나온 피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결국 얼마 못 가 눈바닥 위로 풀썩 엎어졌다·
그칠 줄 모르고 발하던 성검의 빛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후····”
나는 긴 숨을 토해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쉴새 없이 불던 바람도 어느새 멈추며 고요한 적막이 주위를 가득 에워쌌다·
그러곤 몸을 돌려 그녀의 전 주인 디오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나는 말없이 쭈그려 앉아 디오의 몸 위로 손을 얹었다·
-피잉
손에서 발현된 치유의 빛이 전신에 새겨진 상처에 스며들었다·
행동 불능 상태였던 몸이 어느 정도 치유된 것을 확인하고선 그의 손에 다시 마검을 쥐여주었다·
그러자 디오의 몸이 일순간 검은 안개로 휩싸였다·
케이람의 영혼이 다시 전 주인의 몸으로 되돌아간 순간이었다·
그녀는 곧 감은 눈을 뜨며 나를 마주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뭐?]
“이제 케이람님께서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십시오·”
[하?!]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붙잡다가도 다시 날 선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야·]
“말씀하십시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
그녀의 눈을 보니 납득할만한 답을 듣지 않고선 절대 안 움직일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해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말해봐야 의미 없어·”
[···?]
“달라지는 것도 없고·”
[네가 기어이 정신줄을 놨구나?]
“주인이 검한테 말을 놓는 게 딱히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케이람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해· 이 세상에 너를 완벽하게 다뤄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케이람은 멍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뭔데?]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물었다·
“당연히 다크 엘프들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일 아니겠어?”
[너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놈의 세상은····]
케이람은 그 말을 끝으로 나에게서 돌아섰다·
멀어지는 동안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으며 그런 그녀의 뒤를 나는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결국 이것은 현실이 아닌 봉인된 기억 속의 세상·
이곳에서 내가 뭘 하든 달라지는 것 없다·
그저 알아 갈 뿐이지·
이 잊혀진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후우웅
갑자기 눈앞으로 검은 물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더니 사방으로 확 펼쳐졌다·
“재밌으셨나요?”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인지를 하고 있긴 하셨나 보네요· 이미 지나간 시간의 기억 속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어느새 죽음에서 일어난 아나스타샤가 나를 보며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