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비밀 속으로 (5)
“쿠에엑!”
안으로 들어갈수록 놈들의 울음소리와 피 냄새가 점점 더 짙어진다·
사실 가까이서 들어보니 울음소리보단 신음에 가까웠다·
소리가 들릴수록 케이람은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 역시 뒤처지지 않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녀를 뒤따랐다·
마침내 도착한 동굴 끝자락·
분명 빛 한 점 없는 암흑의 공간이어야 할 텐데 얼음에 불빛이라도 넣은 것처럼 일대가 너무나도 밝았다·
물론 주변이 밝다고 해서 거기에 관심이 꽂히진 않았다·
흠·
이거 뭐부터 설명해야 할까?
일단 왼쪽 구석에선 막 해동된 것 같은 마수의 사체들이 널려져 있고
중앙 벽엔 이름 모를 엘프의 시체들이 얼음에 갇혀있다·
그리고 바로 앞엔
“얘들을 뭐라 불러야 할 것 같냐?”
“완성되지 않은 다크 엘프··· 정도가 맞지 않겠습니까?”
즉 미완성의 다크 엘프·
거대한 얼음 감옥에 갇힌 그들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엄청난 공격성과 움직임을 보였던 조금 전 놈들과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었다·
“우어어····”
한 엘프가 자길 구원해달라는 듯 간절히 손을 뻗었다·
허나 그 손마저 온전히 뻗질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꾸에엑!”
입에서 피를 포함한 알 수 없는 토사물을 뱉어냈다·
토사물에선 심한 악취가 풍겼다·
거기다 주변 곳곳엔 마법을 쓰고 남은 마력의 흔적들까지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이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이 강해지면 여태 우리가 봤었던 그런 놈들처럼 된다는 거지?”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얼음에 갇혀있는 엘프들은 뭐고?”
“아마 이미 죽은 화이트 엘프들의 사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프루이나의 대지는 극지방의 자연적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영구동토다·
즉 시체를 묻어도 썩지 않고 냉동된 채로 유지되기에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근육과 연골 등이 고스란히 남는다·
사실상 영혼 빠진 빈 껍데기라 해도 다름없는 몸이지·
거기에 마수의 피를 주입해 소생 마법을 걸어 놓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이 다크 엘프들이 탄생한 게 아닐까 싶다·
“대체 어떤 멍청한 놈이 이런 등신 같은 짓거리를 한 거야!?”
케이람은 기분이 매우 언짢아졌는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불편함을 토로했다·
일단 도망친 장로의 아들이 가장 유력한 범인이겠지·
하지만 그가 독단적으로 이 일을 진행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그를 지원해주던 다른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 조력자가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문제는 이 다크 엘프라는 차마 새로운 종족이라고도 할 수 없는 놈들을 무슨 이유로 탄생시켰냐는 거다·
단순히 프루이나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준비했다기엔 좀 과한 수준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엘프의 사체들만 봐도 수십 구가 넘는다·
저것들을 전부 다크 엘프로 재탄생시켜 풀었다간 프루이나가 뒤집어지는 건 말해봐야 입 아프고
프루이나를 넘어 다른 지역에까지 재앙이 퍼질 수 있다·
어쩌면 마왕군이 인계에 침입하는 것 그 이상으로·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엘프들에게 상황을 알리시죠·”
“무슨 소리야? 장로 아들 그 새끼부터 잡아야지!”
“어디로 도망쳤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작정 찾을 순 없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런 장소가 여기 하나만이 아닌 몇 군데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엘프들과 합심해서 찾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케이람은 썩 내키지 않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놈들은? 그냥 놔두고 갈 거야?”
그래도 내 의견을 따르려는 지 동굴에 있는 다크 엘프들을 보며 물었다·
“누가 건들지만 않는다면 위험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제한 결계로 막아놓겠습니다·”
나는 바로 마나를 발현해 검은빛의 결계를 생성했다·
이거면 혹시 엘퓨리스가 돌아온다고 해도 저 엘프들에게 손을 댈 순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야· 넌 이게 단순히 그 엘프 한 명이 꾸민 일인 것 같냐?”
“물론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케이람은 대뜸 내 생각을 묻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누구 짐작 가는 주동자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아직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머리 안에서 어떤 벌레 한 마리가 자꾸만 아른거리네?”
그 벌레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일단은 마을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아까보다 한층 더 거세진 바람을 뚫으며 다시 마을로 향하려는 순간
“···!”
머리 위로 엄습해오는 낯선 불길함에 몸을 재빨리 뒤로 내뺐다·
-탁
내빼는 동시에 손을 뻗어 하늘에서 떨어진 요상한 무언가를 낚아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금색의 기다란 광창(光槍)이었다·
태양을 연상시킬 정도로 눈 부신 빛을 발하는 칼날에선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역한 기운이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힘을 주자 바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우와? 반응속도가 엄청나네요? 꼭 암살자 같았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을 잡치게 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와 케이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 개 같은 년이!!!”
케이람은 다짜고짜 욕부터 날렸다·
더불어 이전까진 느낄 수 없던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그녀에게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오랜만이에요 디오? 아니지 이젠 디오라고 부를 수도 없겠구나? 그럼 케이람 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확히 열 보 밖의 거리에서 금빛 장발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낯선 여인·
어느 익숙한 악마를 생각나게 하는 요망한 눈웃음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년이 여기 있는 걸 보니 알아서 퍼즐이 맞춰지네· 니들이 엘프들을 갖다가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을 만들었던 거냐?”
“쓰레기라니 말이 좀 심하시네요? 얼마나 가치 있게 쓰일 다크 엘프들인데····”
분명 처음 보는 낯선 여자고 아직 이름조차 듣지 못했지만
나는 저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성검의 주인입니까?”
“그래 맞아· 나한테 전신을 찢어발기다 못해 뼈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년이지·”
어떻게 알았냐고?
왜 모르겠는가?
한때 내 심장을 찔렀던 검이다·
그 흔적이 아직도 몸과 뇌리에 각인되다시피 남은 그 검이 지금 저 이름 모를 여자의 허리춤에 보란 듯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아! 당신이 그 엘퓨리스가 말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하수인이군요?”
그녀 또한 나를 보고선 가증스런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 이름은 ‘아나스타샤 스펜시아’ 라고 해요! 여러분에겐 별로 달갑지 않을 성검의 주인이랍니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될까요?”
“····”
“말해주지 않는 건가요? 저 비싸게 구는 남자 별로 안 좋아하는데?”
능청스러운 점까지 아주 그 악마를 똑 닮았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가라앉혔다·
“네년이 묫자리를 고르고 고르다 여기로 정했나 본데 내 앞에 감히 그 면상을 들이댄 이상 피할 생각하지 마라·”
케이람은 이미 그녀와 싸우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마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아까처럼 멋대로 나서면 너부터 죽여 버린다! 잠자코 뒤에서 구경이나 처 해!”
그러면서 내겐 껴들지 말라며 경고를 던졌다·
“어머? 지금 저랑 싸우시려고요? 검을 다뤄줄 주인도 없는 마당에 절 상대하실 수 있겠어요?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때요?”
언뜻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그녀의 손은 이미 듀란다르크의 검자루를 잡고 있었다·
저 아나스타샤란 여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서 있는 자세에서 나오는 기세 미소에서 나타나는 여유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성검의 기운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봤을 땐····
저 여자· 보통 강적이 아니다·
본인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미련한 성검의 주인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반면 케이람의 상태는
“네년 따윈 내가 팔 한 짝 없어도 충분히 죽여!”
성검의 주인을 향한 분노에 잠식된 나머지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다·
딱히 그녀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저 둘이 지금 상황에서 맞붙게 된다면 아마 케이람이 높은 확률로 질 것이다·
허나 지금 상황에선 내가 말려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긴 이미 글러 보였다·
-스스스
마검의 칼날에서 새어 나온 안개가 케이람의 몸을 감싸면서 그녀의 눈이 붉게 변색되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차마 눈뜨고 마주하지 못할 정도의 퍼져나갔지만
“어쩔 수 없네요·”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힘을 잔뜩 충전한 케이람은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질주했다·
-쾅!
두 개의 신의 무구가 격돌하면서 섬광이 번쩍이고 폭음이 울려 퍼졌다·
분명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힘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
검을 잡고 있는 케이람의 손이 떨리다 못해 매우 불안정했다·
넘치는 힘을 몸이 받쳐주지 못해 역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아 역시 주인 없는 검은 본인의 힘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에 비해 성검의 주인은 너무나도 안정된 상태·
오히려 케이람 보다 훨씬 더 물아일체 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을 견딜 수 없는 케이람은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크윽!”
물러서자마자 다리가 풀렸는지 한쪽 무릎을 덜컥 꿇고 말았다·
팔에서도 근육이 저려 왔는지 오른쪽 팔꿈치를 부여잡았다·
“이제 보니 몸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본인 몸 아니라고 너무 막 다루신 거 아니에요? 그래도 소중히 다뤄야죠· 함께 정을 나누면서 싸운 옛 주인의 몸인데····”
“그 입 안 다물어!?”
화가 폭발한 케이람은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챙!
“넌! 오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인다! 네 몸뚱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전부 조각내서 잘근잘근 씹어 먹을 거라고!”
“글쎄요? 영혼이 조각나는 건 아무래도 제가 아닌 당신일 것 같은데?”
미소 짓는 아나스타샤의 몸에서 순간 광채가 돋아나면서 빛의 산란이 일어났다·
“악을 정화할 비(Rain to Purify evil)····”
-후우웅
이내 그 빛은 하늘로 솟아올라 커다란 원형진을 생성해냈다·
원형진 안에선 조금 전 나에게 내려쳤던 광창(光槍) 수십 자루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위험을 인지한 케이람은 급히 몸을 내뺐다·
“그렇게 쉽게 틈을 주면 어쩌시려고요?”
허나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나스타샤는 피하는 케이람을 향해 커다란 검기를 날렸다·
저건 피할 수 없는 각도다·
-텅!
검기 자체는 어찌저찌 막아 내는가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몸 곳곳엔 하늘에서 떨어진 광창이 꽂혀있었다·
케이람은 피를 흘리며 거친 숨을 남발하였다·
쓰러질 수 없어 어떻게든 선 자세를 유지하려 하는 굉장히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끝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결전·
케이람의 몸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저 성검의 주인이 가진 힘이 애초부터 더 우월했다·
“당신과의 질긴 악연이 이렇게 싱겁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요?” 아나스타샤는 그런 케이람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듯 말하다가도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있었죠?”
대뜸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마검의 주인께선 아무래도 더 못 싸우실 것 같은데? 어떡할래요? 당신이라도 저랑 대신 놀아주겠어요?”
“개소리하지 마! 네년은 내가···!”
케이람의 역정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솔직히 평범한 하수인이라고 하기엔 기운 자체도 범상치 않고 또 여러모로 숨기는 게 많아 보였어요· 저 지금 당신 정체 엄청 궁금하거든요? 슬슬 말해주지 않겠어요? 당신이 누구인지?”
그러면서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당연히 입조차 열지 않았다·
“흠· 여전히 비싸게 구시네· 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자꾸 버티는 건 좋지 않을 텐데?”
그녀는 기어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내빼며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죠· 뭐· 말을 안 들으시니 힘으로 알아내는 수밖에····”
-피이잉
나를 마주한 아나스타샤의 눈에서 익숙한 선홍빛 광채가 발했다·
“야! 저년 눈 보지 마! 눈 감으라고!”
케이람은 그녀의 눈을 보지 말라며 소리쳤지만 나는 듣지 않고 그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
30초 정도 지났을 땐 그녀의 눈에서 작은 동요가 일어났고
1분이 지났을 땐 빛이 꺼짐과 동시에 그녀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마치 지금 상황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뭐야 당신? 왜 멀쩡한 거야?”
“현혹의 힘인가?”
“···!”
결국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예나 지금이나 네놈들의 방식은 참 역겨울 정도로 한결같았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