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비밀 속으로 (2)
어두컴컴한 밤하늘 위로 수를 놓은 듯 깨알같이 반짝이는 별들·
그 아래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게 보던 그녀가 대뜸 내게 물었다·
“너 프루이나에 가본 적 있냐?”
“있습니다·”
“어떻든?”
“춥습니다·”
“다른 거는?”
“바람이 매우 많이 붑니다·”
“짜증 나는 곳이란 뜻이네·”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가 싶더니 대뜸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내가 마검인 거 어떻게 알았냐?”
“눈을 보고 알았습니다·”
“눈?”
“예· 어느 누가 그 눈을 보고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너 평소에 당돌하다는 말 많이 듣지?”
“자주 듣긴 합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닥불을 뒤적였다·
“에휴 이건 뭐 말을 섞어도 재미가 없네· 난 잘라니까 그 불 꺼트리지 말고 잘 관리해라·”
턱이 빠질세라 크게 하품을 하던 그녀는 이내 잠을 잔다며 몸을 돌렸다·
일단은 그녀에게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얼떨결에 동행하긴 했다만 아직은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말을 남발해 의심을 살 필욘 없겠지·
대체 이 구시대의 기록은 내게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당장 그녀가 왜 프루이나로 가는지부터 궁금할 따름이었다·
음?
실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도중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머리를 베고 있는 저거 아무리 봐도 책 같은데?
“왜? 뭐? 할 말 있어?”
내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책을 베고 주무시는 겁니까?”
“책? 아 이거? 그냥 딱히 쓸데도 없어서 베개로 쓰고 있던 거야· 심심하면 너나 읽어라·”
그러면서 대뜸 내게 던져주었다·
책을 본 나는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이거 설마?
“교서인지 뭔지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을 위한 책이란다· 이 몸의 원래 주인 놈이 쓴 거야·”
설마 했지만 진짜였다·
이건 교서다·
보리스 놈이 황실을 쥐락펴락했을 당시 대륙 전체에 뿌렸던 바로 그 안개의 교서·
본의 아니게 원본 판을 여기서 보게 되는군·
“그런 거 백날 써서 뿌려대면 뭐 하겠냐? 인간들 교화해서 어따 쓴다고? 결국엔 지가 못 버티고 먼저 가버렸으면서·”
책의 저자인 디오 하펜커스·
그는 구시대에서 아에르를 추종했던 혈족의 수장이자 케이람의 전 주인이었다고 예전에 시리카 당주가 말했었다·
케이람은 그 주인을 먹어 치웠다고 했지·
순전히 그의 부탁으로 인해·
“그 몸의 주인은 이제 없는 겁니까?”
“그래· 더는 못 해 먹겠다며 자길 먹어달라고 애원하길래 내가 먹어 치웠다· 덕분에 원하지도 않는 몸뚱이를 얻었지만····”
인간의 몸을 얻게 된 것을 그녀는 별로 탐탁지 않는 듯했다·
“참나· 지금 나를 데리고 결사 항전을 해도 모자랄 판에 별 시답잖은 엘프의 땅에나 가보라니· 대체 그 머저리 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에르 님께선 왜 마검 님을 프루이나에 보내신 걸까요?”
“내가 알겠냐· 루멘델 놈의 꿍꿍이가 있을 거라나 뭐라나? 그냥 가면 내 할 일이 있을 거란다·”
결국 본인도 왜 가야 하는지 모르고 있단 거군·
“너도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이 전쟁 아마 그 머저리 신이 패배할 거야· 그럼 신 직위도 박탈당하고 신계에서 쫓겨나겠지·”
“그럼 마검 님께선 어찌 되시는 겁니까?”
“나? 나야 뭐 누가 이기든 그 재수 없는 성검 년이랑 어딘지 모를 곳에 묻히겠지· 신의 무구란게 원래 전쟁이 끝나면 항상 어디 음침한 지하 구석에 봉인되는 법이거든·”
그 어딘지 모를 곳이 바로 우리 집 밑이었지·
선정된 기준이 뭐였을지 궁금하지만 지금으로선 물어봤자 답을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진짜로 잘라니까 그만 입 다물어라· 불 꺼트리지 말고·”
케이람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잠을 청했다·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낯선 밤을 보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고
-쌔애앵
서늘하던 바람이 어느새 살을 찢을듯한 칼바람으로 변모하면서 나와 케이람은 마침내 프루이나 초입에 들어섰다·
“거 더럽게 춥네!”
케이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연신 입김을 뱉었다·
나 역시 추위엔 그리 강하지 않기에 망토를 더욱 감싼 채 발을 내디뎠다·
“야! 너 그 망토 내놔봐!”
“망토 말입니까?”
“그래! 치사하게 혼자서만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어!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이건 뭐 날강도가 따로 없다·
그나마 열을 유지해주던 최후의 보온수단도 뺏겨버렸다·
더럽게 춥군·
그렇게 인상을 잔뜩 구기며 나아가던 것도 잠시
“멈추시오!”
하얀 후드를 뒤집어쓴 열 명의 화이트 엘프가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 앞은 우리 화이트 엘프의 영지 프루이나입니다·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으니 그대로 돌아가시오·”
처음부터 면전에 대고 화살부터 날리던 때랑 비교하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대접이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여기 계신 마검 님의 생각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겠지만·
“나 니들 도와주러 온 거니까· 헛짓거리하지 말고 길 열어!”
“우릴 도와주러 왔다고!?”
엘프들은 이게 뭔 말인가 싶어 전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의도인진 모르겠지만 우리 화이트 엘프 일족은 당신들 같은 인간의 도움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썩 돌아가십시오!”
“뭔가 일이 있긴 있나 보네? 죄다 표정들을 못 감추네?”
“···!”
그녀의 말대로 엘프들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면 부자연스럽다고 해야겠지·
도와주러 왔다는 말에 정곡을 찔린 듯 하나같이 인상을 옅게 찌푸렸다·
“니들 이뻐서 도와준다는 것도 아니니까· 뭔 일 있었으면 주접떨지 말고 불어· 빨리 해결하고 떠날라니까·”
“대 대화가 안 통하는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보다 못한 내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야! 너 누구 맘대로 내 앞을 막으라고 했···!”
참지 못하고 반응한 그녀에게 나는 일단 손을 들어 올려 만류했다·
그러곤 리더처럼 보이는 엘프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프루이나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다 당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안타깝지만 저희 역시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순 없는 입장입니다· 악의 없이 순수한 목적으로 여러분을 도와드리러 온 것이니 믿어주십시오·”
“우리가 뭘 보고 너희 인간들을 믿어?”
지켜보던 한 엘프가 보다못해 소리치며 씩씩댔다·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낯선 인간 둘이 다짜고짜 도와주겠다고 온 것이니·
이들을 설득하려면 적어도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나는 다시 케이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서주시지요·”
“뭘?”
“디오 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짓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품에서 마검의 본체를 꺼내면서·
“···!”
눈앞에서 마검의 기운을 마주한 엘프들은 전부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다 당신이 그럼 마검의 주인?”
어쩔 줄 몰라 서로 눈치를 보던 와중
뭔가 결심이 선 듯 리더 엘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는 마을에 있는 다른 엘프들과 감응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으며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선 채로 기다리길 10분 정도·
이야기가 잘 끝났는지 엘프들은 마침내 길을 열어주었다·
“따라오시지요·”
그러면서 마을로 인도해주겠다며 안내를 자청했다·
별문제 없이 그들을 따르려는 순간
“야!”
그녀가 대뜸 나를 다시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갔다·
“한 번만 더 내 앞 가로막으면····”
그러자 내 귀에 입을 갖다 대더니
“죽여 버린다·”
심장을 옥죄이는 살기 짙은 경고를 전하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나는 덤덤한 눈으로 그녀의 뒤를 바라보면서 마을로 향했다·
* * *
“프루이나에 발을 들인 인간들이여 반갑소·”
마을에 들어서자 수염이 지긋한 엘프가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난 화이트 엘프 일족의 장로 타타리스입니다·”
당연하겠지만 현실에서 본 엘퓨리스라는 이름의 장로와는 완전 다른 엘프였다·
“듣자 하니 마검의 주인이 있다고 하던데· 혹 검은 안개의 신께서 그대들을 여기로 보내신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흠· 뭔가를 알고 보내신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면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장로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마을 안으로 이동했다·
“최근 들어 저희 마을에 이상한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존재?”
“예· 분명 외면만 봤을 땐 영락 없이 우리 일족과 닮았지만 온몸이 불에 탄 듯 새까만 피부를 가졌고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을 만큼 굉장히 포악했습니다· 또한 마수와 비견될 정도의 엄청난 공격성을 보였었지요· ”
“뭐야?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 있어?”
“직접 보고 확인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윽고 도착한 주거지에서 좀 떨어진 그늘진 어느 으슥한 공간·
주변엔 다수의 엘프들이 철통 경계를 서고 있었다·
눈앞엔 뭔가를 가리기 위한 큰 천막이 씌워져 있었다·
장로는 주저할 것 없이 바로 천막을 거뒀다·
-쾅!
“···!”
모두가 뒷걸음질 쳤지만 나와 케이람만이 딱 정자세를 유지했다·
앞서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니 더 가관이군·
얼음으로 된 창살을 부여잡으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검은 피부의 엘프·
금방이라도 창살을 부수고 우리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니까···· 얘를 뭐라고 불러야 하냐?”
“저희는 일단 다크 엘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크 엘프·
과거 화이트 엘프 일족을 위기에 빠트렸다던 바로 그 종족이다·
첫 대면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그래도 언 게 아닌 살아 있는 모습을 본 감평을 논하자면
이거 완전 마수와 엘프의 혼종이다·
분명 외관은 엘프와 비슷했다· 다만····
머리 위로 비스름하게 자라난 뿔·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과 이빨·
피에 젖은 듯 붉게 충혈된 눈까지
이것들은 엘프의 신체 부위가 아니다·
마족 혹은 마수들이나 가질법한 것들이었다·
“처음 발견했을 땐 저희를 경계하며 도망갔지만 어느샌가 순찰 중인 우리 일족원들을 공격하고 마을 근처에도 모습을 보이는 등 계속해서 저희를 위협했습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경계를 서고 있는 일부 엘프들 몸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희 방어 수단이 없던 것도 아니잖아? 마법으로 싹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니야?”
“사실 문제는 이들을 죽인 다음에 있습니다·”
장로는 한 엘프에게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우리에게 다가온 엘프는 갑자기 팔에 두르고 붕대를 풀러 안의 속살을 보여주었다·
나와 케이람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건?”
“저 다크 엘프에게 입은 상처입니다· 단순히 긁히기만 한 것인데 무슨 독에 당한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살이 점점 썩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이 지경이 됐습니다·”
상처 주위엔 화이트 엘프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는 상반된 검은 반점이 울긋불긋 솟아올라 있었으며 굉장히 흉측했다·
일단 마법으로 진행 자체는 멈춘 듯 보였다·
“아무래도 이들의 분비물과 피에는 아주 치명적인 독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시체 또한 그대로 놔두면 엄청난 악취를 풍기면서 주변 일대를 그냥 썩게 하더군요·”
즉 함부로 처리하기도 애매한 그야말로 골칫덩이란 뜻인데
대체 이런 놈들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당연하겠지만 자연적으로 생겼을 리는 없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고서야 이런 기괴한 존재는····
“타타리스 장로님!”
그때 우리의 뒤에서 한 엘프가 장로를 부르며 다급히 뛰어왔다·
“마을 근처에 다크 엘프들이 나타났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