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아카데미로 (4)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길 부정당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에서 추방되고 홀로 도태되며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나약한 개인이 모여 무리를 이루면 질서가 세워지고 법이 정해지듯·
인간이 인간으로서 그 무리에 남으려면 이러한 규칙들을 준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간단하다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지·
살인 강간 폭행 등을 일삼는 중죄인들을 보라·
우리가 그들을 사람 취급하는가?
사람으로서 사람 같지 않은 일을 저지른 만큼 절대 같은 범주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스스로의 본질을 부정당한다는 건 매우 무서운 일이다·
그렇게 도태된 이들이 나중엔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일이니····
암튼 내가 지금 이 얘기를 왜 꺼내느냐?
우리 미천한 인간만이 아닌 그 존귀해 마지않는 신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도태되신 분이 있기 때문이다·
신들 사이에서도 신으로 인정받지 못해 신계에서 추방당한 배척자·
그 이름도 지고하신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
이러한 신들의 조치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검은 안개의 신을 추종해선 안 된다·
그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지만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머리에 새겨진 금기처럼·
이 관념은 오랜 시간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쭉 이어져 왔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이 일관적일 수 없듯 이러한 관념도 영원할 순 없었다·
대륙에 처음 검은 안개가 목격되었던 어느 날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신의 관념에 반기를 든 자들이 나타났으니 훗날 사람들은 그들을 ‘안개의 신도들’이라 불렀다·
이들은 인간으로선 처음으로 아에르를 신으로 떠받고 추종했으며 기존의 다른 신들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의 지침을 부정한 대가는 매우 컸다·
기존의 관념을 고수하던 인간들은 그들을 세상에 있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존재들로 간주하였고 오로지 배척과 몰살만이 답이라 주장하였다·
즉 인간이기를 부정한 것·
그렇게 안개의 신도들은 같은 인간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고 끝끝내 몰살되었으며 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이 다시 세력을 규합해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스트’였다·
한 번의 도태를 경험한 그들에게 더 이상 안일한 자비는 남아있지 않았다·
빛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질서를 부정하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들춰낸다는 포부를 내세웠는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암살이었다·
그들의 목표 대상은 주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짓을 저지른 인간계의 상류층들·
다만 그 수법이 워낙 잔인했던 터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진 못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추종하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를 부정당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자 그럼 나는 이 이야기를 왜 알고 있느냐?
내가 바로 그 미스트에 몸담았던 암살자였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미스트의 말로는 빛의 기사단을 주축으로 한 ‘정화군’에 의해 토벌되어 전부 숙청당한 거로 알려졌지만 이건 왜곡된 사실에 불과했다·
그들은 토벌당한 것이 아닌 스스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신의 힘을 이어받을 계승자가 다시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기다리기 위해서라지만 이건 사실 개소리고 그냥 그 머저리 신의 변덕이 가장 큰 사유였다·
어쨌든 내가 아카데미로 가는 가장 큰 이유 역시 미스트와 다시 한 번 접촉하기 위해서라는 것·
근데 나도 없는 마당에 이들이 벌써 활동을 시작했다?
이 망할 신이 또 변덕을 부린 게 아닌 이상 그럴 리 없다·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야 맘 편히 아카데미로 못 갈 것이다·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빛이 드리운 밝은 조형물 뒤엔 그늘진 그림자가 있기 마련 설령 그것이 번창한 도시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사방으로 뻗은 도로와 그사이에 빼곡히 솟아오른 건물들· 뜨문뜨문 보이는 호화스러운 건물들엔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호위병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기사를 역임했던 전문적인 호위병이 아닌 평범한 용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인정이라곤 좁쌀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마수로 모자라서 인간 사냥이라도 하러 나왔니?]
어느 샌가 실체화한 케이람이 내 볼살을 꼭꼭 찌르며 말했다·
“그냥 내 눈으로 좀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 미스트인지 미트볼인지 하는 그거? 아에르 그놈도 참 별나네? 자기도 꼴에 신이라고 따라줬으면 하는 추종 집단이 있길 원했나 보지?]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케이람은 미스트에 대해 전혀 모른다·
미스트와 관련된 신의 힘을 물려받은 마검이지만 그녀는 알다시피 수백 년 동안 긴 잠에 빠져있었다·
고작 몇 십 년 사이 인간들 입에 오르내렸던 조직을 그녀가 알 리는 만무할 터·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도 같은 그 머저리 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을 일 있니? 애초에 있을지도 모르는 놈들을 어떻게 찾으려고?]
“별거 없어· 그냥 물고기를 낚기 위해 미끼를 던질 뿐이야·”
나는 호위병들조차 보이지 않는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안 보이는 공허한 주변·
딱 사람 한 명 몰래 죽이기 좋을 만한 분위기였다·
적당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한 나는 땅에 다리를 꼰 채 푹 주저앉았다·
그러곤 살며시 눈을 감아 내면에 잠겨있던 검은 안개의 기운을 밖으로 이끌어냈다·
-스으으
스산한 골목을 채우고 있는 짙은 무리의 안개들·
담력이라곤 1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 지나친다면 즉각 뒤도 안 보고 도망칠 것이다·
암살자의 본분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거지만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은 다르다·
그들이 있던 곳엔 항상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칙칙한 검은 안개가 드리워진다·
마치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표식인 것마냥·
자 만약 너희가 정말 이 도시 안에 숨어있다면 지금 발산하고 있는 나의 냄새를 결코 무시할 수 없겠지·
그러니 직접 내 앞으로 와 나의 존재를 확인해라!
나 또한 너희가 내가 찾는 그들이 맞는지 증명해 줄 터이니!
“····”
허나 앞서 말했듯 정작 내 냄새를 맡을 놈들이 이 도시 안에 없다면 결국 이 검은 안개도 그냥 매연에 불과했다·
30분을 한자리에서 똬리를 틀고 기다렸지만 찾아오는 건 습기 찬 밤바람뿐·
급기야 내가 지금 뭘 처하고 있는 건지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주인 또 되도 않는 석고상 놀이를 하고 있네?]
케이람은 이런 내 뻘짓(?)을 보기 좋게 비웃고 있었다·
그래 이만큼 기다렸는데도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이 도시엔 없다는 거겠지·
생각해보니 이럴 필요 없이 그냥 본거지로 찾아가 그 머저리 신을 깨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닌가?
가장 확실한 방법을 놔두고 여태 눈뜬 장님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털었다·
-스르륵 스르륵
안개를 물리고 그만 숙소로 돌아가려는 순간 골목 저편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힘겹게 끌고 있는 듯한 소리·
나는 즉시 해당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다·
-저벅저벅
소음 속에는 낯선 이의 발소리도 동반되어 있었다·
발소리의 주인은 한 명이었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은 한 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피 냄새가 나네?]
질 좋은 향내라도 맡은 듯 케이람이 입맛을 다셨다·
짙어지는 인기척 속엔 더러운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30분의 석고상 놀이가 뻘짓이 아니었다는 것에 기뻤던 것일까?
일직선이었던 내 입술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
어서어서 다가오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 것도 잠시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갑자기 뚝하고 끊겼다·
-다다다!
멈춘 건가 싶더니 다시금 전력 질주로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이게 내 쪽으로 오는 게 아닌 멀어지고 있다는 것·
즉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도망치는데?]
“이게 미쳤나?”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기껏 미끼를 던지고 기다렸더니만 냄새만 맡고 도망쳐?
녀석은 낯선 안개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닌 안개 속에 자리한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안개를 헤집고 나아가 왼쪽 모퉁이를 돈 순간 힘겹게 달아나고 있는 녀석의 뒤통수와 마주할 수 있었다·
-퍽!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을 움켜쥐고 땅에 내리꽂았다·
“켁!”
순식간에 제압당한 놈은 괴로운 듯 기침을 남발하였다·
나는 격양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키는 170에 몸무게는 70 정도·
얼굴은 검은 가면으로 가려져 안 보였지만 움켜쥔 목덜미로부터 느껴지는 주름과 목소리를 볼 때 중년의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쭉 뻗은 오른손 앞엔 피 묻은 나무 몽둥이·
방황하는 왼손 옆으론 사람 한 명 쑤셔 넣기 딱 좋을 만한 거대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누런 천 사이로 붉은 자국들이 비치는 것으로 보아 피 냄새가 여기서 흘러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에잇!”
피 묻은 나무 몽둥이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놈이 간신이 몽둥이를 잡아 나에게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내 손이 녀석의 목을 단단히 쥐고 있는 터라 나에게 닿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나는 녀석의 목을 더욱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카가각···!”
성대가 갈리고 옥죄이는 고통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몸이 차가워지고 기절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놔주었다·
[이놈이 그 머저리 신의 추종자라고?]
케이람은 혹여나 그가 죽진 않았는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찔러보고 있었다·
검은 가면 피 묻은 몽둥이 확인은 안 했지만 사람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자루까지·
뭔가 조건은 충족된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어설프다·
“사····”
이내 숨을 헐떡이던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살려주십시오···!”
목숨을 구걸하는 간절한 호소·
그걸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짭이다·
그냥 겉모습만 어설프게 흉내 낸 가짜·
대륙을 벌벌 떨게 만드는 암살자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니·
진짜 미스트 대원들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치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 녀석은 미스트가 아니었다·
-꿈틀
불현듯 옆에 놓인 누런 자루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끄으으···”
기분 나쁜 신음소리는 덤·
굵고 쉰 목소리로 보아 아름다운 미녀가 들어있을 것 같진 않고
일단 확인은 해보자는 마음에 자루를 풀어보았다·
흠····
머리카락은 없고 배만 산처럼 나온 중년의 남성이 들어있었다·
나로선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옷차림이 꽤 고급스러운 걸 보아 돈 좀 있는 귀족인 것 같았다·
둔탁한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이마엔 상처와 함께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격즉사를 목적으로 때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기절만 시킨 뒤 납치하려 했던 것 같은데····
허탕 쳤다·
미스트 찾자고 왔더니 이건 뭐 애먼 범죄 현장에나 휘말리고 말았다·
이거 더 엮여봐야 나만 골치 아플 것 같은데····
“그 그놈은 아니 돼····”
가면의 남성은 애절한 눈빛과 함께 힘겹게 자루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누가 보면 금덩이라도 든 줄 알겠네·
참 애달프기 그지없는 모습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다시금 자루를 다시 봉한 뒤 그에게 돌려주었다·
“···?”
가면 속의 눈동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뭔 꿍꿍이인진 몰라도 사지 찢기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하고 다니지 마·”
“···예?”
“내가 아닌 다른 놈들이 봤었다면 넌 그냥 죽었어·”
이윽고 주변을 장악했던 안개들이 모두 걷혔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누워있는 녀석을 그대로 놔둔 채 나는 유유자적하게 그곳을 벗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