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비밀 속으로 (1)
시안을 달래기 잠시 둥지 밖으로 나간 하스티아·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자 마음 급한 알폰스가 밖으로 나가 보았다·
“좀 오래 걸리시는데?”
때마침 눈보라도 멈춰서 가시거리도 굉장히 넓어졌지만
“하스티아님?”
어째서인지 하스티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그녀가 찾으러 간 시안도 보이지 않았다·
“하 하스티아님이 사라지셨습니다! 그 인간이 데려간 것 같아요!”
너도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엘프들은 바로 사라진 하스티아를 찾기 위해 알폰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가르니안과 로엘 두 엘프는 나가지 않고 마리안의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너희는 왜 안 나가고 있니?”
“그 인간이 정말로 하스티아님을 데려간 거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리기 위해서·
그녀가 죽지 않길 바라는 것은 두 엘프도 마찬가지였다·
“전 하스티아님이 살길 원합니다· 그걸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저 인간은 다르겠지요·”
가르니안은 시안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하스티아를 지킬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마리안님께선 왜 움직이지 않으시는지요?”
이에 로엘이 역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 역시 너희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야·”
마리안의 대답도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신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그 아이가 죽을 이유는 없지·”
* * *
마리안의 둥지로부터 약 1000걸음 정도 떨어진 어딘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땅 위에 올라선 하스티아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문이 끝나자 발밑에서 하얀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후우웅
마법진이 뿜어내는 빛에 잠식된 둘은 금세 어딘가로 전이되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뜬 두 남녀 앞에 펼쳐진 것은
“나무?”
성인 남자 대여섯이 팔을 뻗어야 다 감싸질 정도의 아주 커다란 나무였다·
단순히 크기만 큰 나무가 아닌 몸통부터 잎까지 전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신께 바쳐진 나무 아르보르(Arbor)에요· 신께서 저희에게 지키라고 명했던 구시대의 기록이 이 나무에 전부 봉인되어 있죠· 그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제 안에 있고요·’
대륙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잊혀진 구시대의 기록·
그 기록은 다름 아닌 이 나무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시안님은 제 몸에 깃든 열쇠의 힘을 이용해서 신의 비밀을 밝히신다는 거죠? 그걸 통해 저란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신다는 거고요?’
“내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강요하진 않을 테니까·”
토끼마냥 동그래진 눈을 끔뻑이던 하스티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시안님한테 그냥 당한 거라 하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제 의사는 왜 물으시는 거예요?’
시안은 대답하지 못해 시선을 회피했다·
‘그럼 하나만 여쭤볼 테니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뭔데?”
‘이건 저를 위한 일인가요? 아님 시안님을 위한 일인가요?’
시안은 일말의 고민 없이 바로 답했다·
“너와 나 둘 다를 위한 일이야·”
그러자 하스티아의 얼굴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기대했던 답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속을 유추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저만을 위한 일이라고 했다면 전 바로 거절했을 거예요· 저 하나 살자고 일족을 저버릴 순 없으니까요·’
그럴 것이다·
그녀는 미련할지언정 이기적인 존재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게 시안님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시안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전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딱히 예상 못 한 반응은 아니었음에도 시안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이건 네 일족도 아닌 나를 위해 네 일족을 전부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하스티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안은 그녀가 감응을 잇기까지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그냥 이기적으로 생각할래요· 좋은 게 좋은 거죠 뭐·’
순수하다 못해 미련하기만 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이기적인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제 마음이 이렇다고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열쇠의 힘을 발현시키는 건 온전히 시안님께서 하셔야 해요·’
허나 시안은 그 방법을 몰랐다·
그녀의 몸에 깃든 열쇠의 힘을 어떻게 발현시키는지 설사 발현했다 해도 그 열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찌해야 하나 답답하던 차에
[용케 여기까지 왔네·]
실체화한 케이람이 시안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타났다·
[이제부터 뭔 일이 벌어지듯 다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할 수 있겠어?]
“의미 없는 질문 할 거면 내가 뭘 해야 할지나 알려줘·”
[딱딱하기는· 안개의 힘이나 발현해 봐·]
시안은 그녀의 말대로 손에 검은 안개의 힘을 발현했다·
케이람은 그런 시안의 손을 덥석 잡더니
“···?”
갑자기 하스티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란 하스티아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야! 지금 뭘 하는···!”
-파지직
뭐라 물을 틈도 없이 순간 시안의 손에서 강한 스파크가 일었다·
곧 살갗이 찢기면서 타는 듯한 고통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널 거부하기 위한 신의 보호가 발동된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버텨·]
말로는 누가 못하겠는가?
딱히 물러설 생각도 없었기에 시안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버텼지만 문제는 하스티아였다·
‘···!’
표정을 봤을 땐 그녀도 시안과 비슷한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과연 그녀가 이 아픔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저 전 괜찮아요 시안님···!’
이런 시안 마음을 눈치챈 듯 하스티아는 바로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허나 안심할 새도 없이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으며 이내 거듭 일어났던 스파크가 크게 폭발하더니
-콰앙!
폭발과 함께 엄청난 빛이 퍼지더니 곧 시안의 몸을 덮쳤다·
“···!”
시안은 그 빛으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형상의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그 모양은 마치 열쇠를 보는 듯했다·
-털썩
빛이 사라지자 하스티아와 시안은 동시에 쓰러졌다·
쓰러진 둘을 지그시 바라보던 케이람은
[될 대로 돼라지 이젠·]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다시 안개가 되어 시안의 품속으로 되돌아갔다·
* * *
머리가 띵하다·
망치로 맞았다가 쓰러져도 이 정도는 아니겠네·
마치 누군가가 내 뇌를 한껏 주무르다가 간 느낌이다·
기분 참 어지간히도 더럽네·
맞다 하스티아·
분명 그녀도 나와 쓰러졌을 텐데 괜찮은···?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으면 간신히 눈을 뜬 나는
바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여기는?
아르보르인지 뭔지 하던 새하얀 나무는 어디 가고
녹잎이 무성한 나무가 내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주변도 어느샌가 흙과 풀잎으로 변한 지 오래·
이건 바보라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긴 프루이나가 아니라는 걸·
뭐야? 나 다른 데로 전이된 건가?
순간 그 변태 마검이 사기 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키에엑!
숨이 끊어질 듯한 인간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바로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남자가 한 번 저질렀으면 끝을 봐야지· 어째 한 놈이 당했다고 다들 엉거주춤하고 있냐! 앙?”
목소리가 들린 순간 바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근데 뭐지 이 목소리는?
이건 마치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한 곳에 겹쳐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한목소리는 그렇다 치는데 한목소리가 내 귀에 매우 익숙했다·
소리가 들린 곳엔 도적으로 보이는 괴한 다수와
“뭐해? 안 덤벼?”
낯선 붉은 머리의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저놈은 한 명이야! 쫄지 말고 공격해!”
도적 무리 중 한 명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제압하려 했지만
“지랄들 하네·”
남성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비 한 점 보이지 않는 검격으로 도적들을 무참하게 베어나갔다·
잠깐만 저거 설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서늘함을 자아내는 자줏빛 도신과 검자루에 박혀 있는 흑색의 보석·
저런 형태의 검은 내가 아는 한 이 대륙에 한 자루밖에 없다·
마검 케이람·
남성이 춤추듯 자유분방하게 휘두르고 있는 검은 분명한 케이람이었다·
나는 황급히 속을 뒤져보았지만
없다·
늘 같은 자리에 항상 품고 다녔던 케이람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 숨어 있는 놈· 좋은 말 할 때 나와라·”
마검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고개가 다시금 휙하고 올려졌다·
그가 나를 부른 것이다·
존재를 들킨 이상 더 숨어봐야 의미는 없는 법·
나는 남성이 원하는 대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누가 그랬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남자 난 모르는 남자다·
하지만 저 눈만큼은 모를 수가 없다·
이미 목소리를 통해 깨닫지 않았는가?
저 남자 아니 저 남자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저 영혼은 분명
케이람이다·
“너 뭐냐?”
하지만 그녀는 내게 뭐냐고 물었다·
그녀가 정말 내가 아는 케이람이라면 날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아는 케이람이 아니란 뜻인가?
“너 뭔데 안개의 힘을 풀풀 풍기고 다니는 거야?”
내 안에 깃든 안개의 힘을 감지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날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겠지·
그녀가 날 잊었거나
아님 내가 모르는 과거의 그녀와 마주하고 있다거나·
상황으로 봤을 땐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묻잖아 새끼야· 정체가 뭐냐고? 벙어리야? 사람 말귀 못 알아들어?”
누구냐고 물어봤자 지금 상황에선 딱히 대답할 말도 없는데·
이거 뭐라고 해야····
“설마 그 머저리 신이 보낸 하수인이냐?”
머저리 신?
혹시 아에르를 말하는 건가?
더 지체해봐야 의심만 늘릴 것 같기에
나는 바로 자세를 갖추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아에르 님으로부터 마검 님과 그 주인을 보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케이람은 의심과 경계가 뒤섞인 눈초리가 내 몸을 빤히 훑었다·
나는 간만에 느끼는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얌전히 기다렸다·
“쓸데없는 짓 하긴· 보낼 거면 좀 제대로 된 놈을 보내던가 어디서 이런 음침한 놈을 보냈어?”
대충 넘어간 것 같다·
일단 날 아에르가 보낸 수하라고 믿는 것 같으니 별로 내키진 않지만 존대하면서 맞춰줘야 할 것 같다·
안도의 숨을 쉴 시간도 없이 그녀는 대뜸 내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꽤 어려 보이는데 이름이 뭐냐?”
1초 정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안· 시안 베르트입니다·”
“시안 베르트? 무슨 귀족가의 자식도 아니고 이름이 뭐 그래? 기억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꼬맹이라고 부른다·”
“편할 대로 하십시오·”
씨익하고 웃던 그녀는 급기야 내 턱을 어루만졌다·
“자 그럼 꼬맹아· 이 누나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 말이야····”
남자의 몸으로 누나라고 하는 게 꽤 거슬리긴 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여기서 프루이나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 안내 좀 해라·”
“프루이나로 가시는 길이었습니까?”
“뭐야 너 그 머저리 신한테도 아무것도 안 듣고 왔어? 이건 뭐 쓸모없는 짐덩이도 아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시면 될 겁니다·”
“무슨 근거로?”
“정면에서 계속 찬 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극지방이 가까워지고 있단 증거입니다·”
“뭐 헤매고 있진 않았던 모양이네· 뒤처지기 싫으면 알아서 잘 따라와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이어진 길을 나아갔다·
그녀를 따라 발을 내딛으려는 것도 잠시
다시 발을 멈춘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음?”
“케이람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호칭을 묻는 내 질문에 그녀는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케이람이 아니야·”
“그럼 뭐라고···?”
“디오·”
“···!”
“디오 하펜커스·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게 맞아·”
그 기묘한 미소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