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인과응보 (2)
빛의 기사단을 그만둔 이후 종적을 감춘 지 무려 7년
무려 7년 만에 엘리스는 에쉘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청아하면서도 수려한 미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변하지 않고 항상 흐르는 영원의 물줄기처럼·
다만 분위기만큼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엘리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그야 당연히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죠·”
고민 한 점 없는 대답에 에쉘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러다 돌연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환히 웃기 시작했다·
“하하! 그래 그렇구나! 넌 날 도와주러 온 것이야! 너 역시 베르트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가문의 미래인 날 도와주러 온 거라고! 그렇지 엘리스?”
엘리스는 대답 없이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만 보았다·
에쉘은 그런 엘리스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날 도와다오 엘리스· 일단 이 마계에서 벗어나야 해· 벗어나서 그놈에게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
마침내 엘리스와 마주 선 에쉘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두 눈을 간절하게 응시했다·
엘리스는 그 시선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에쉘의 두 눈에서 보랏빛 현혹의 힘이 발현되었다·
“날 도와주겠느냐 엘리스?”
그의 은밀한 속삭임이 전해지자 엘리스는 살며시 손을 풀고선 에쉘의 두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면서 눈동자 또한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그래· 엘리스!”
에쉘의 입엔 다시금 미소가 차올랐다·
“정말 안쓰럽네요·”
허나 그 풀어졌던 눈동자는 다시 날카롭게 조여졌다·
-꽉
이와 함께 감싸 쥐었던 에쉘의 얼굴을 더 강하게 옥죄이고선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내동댕이쳐진 에쉘은 얼굴을 급히 매만지며 엘리스를 거칠게 노려보았다·
“현혹의 힘이 통하지 않아서 당황하셨나요?”
“···!”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노기에 차 있던 에쉘의 눈동자가 이내 의문에 휩싸인 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담긴 엘리스의 모습에선 푸른빛의 눈부신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엘리스 너 설마? 신과 계약한 것이냐···?”
현혹의 힘이 통하는 대상은 인간을 비롯한 동급의 종족뿐·
지고의 존재로부터 힘을 내려받은 인간에겐 그 힘이 통하지 않았다·
엘리스는 대답 대신 품에서 낯선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기억하세요 오라버니?”
낡아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스크롤이었다·
“오라버니가 어릴 적 저에게 주었던 마법 스크롤 아니 소환 스크롤이에요·”
에쉘은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오라버니는 제가 이 스크롤을 발동시킨다면 그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제게 시선을 보낼 거라 했죠? 확실히 그랬을 것 같아요· 이 스크롤을 발동시킨 그 순간 전 마수의 식사 거리가 됐을 테니까요·”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이구나· 난 단지····”
“그때부터 전 깨달았던 것 같아요· 오라버니는 내가 가문의 유지를 잇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비참하게 죽는 걸 원한다고· 그래야 오라버니를 향한 가문과 아버지의 관심이 더욱 증대할 테니까요·”
급기야 감정이 격분한 엘리스는 스크롤을 꽈악 구겼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우셨나요?”
“뭐?”
“뭐가 그리 두려우셨길래 오라버니를 넘어서려는 사람만 있으면 그렇게 다 죽이려 하신 거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만 오라버니의 질서가 완성이 되는 건가요? 오라버니 한 사람 때문에! 평생을 수호에 몸 바쳤던 아버지까지도! 오라버니 때문에 결국 허무하게 돌아가셨어요!”
엘리스는 눈물이 흐르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오라버니는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예요·”
그토록 마음속에 간절히 묵혔던 말을 이제야 꺼낸 상황·
에쉘은 멍한 눈으로 엘리스를 보다가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은 너도 나를 부정하는구나 엘리스·”
그러면서 다시 성검을 뽑아 그녀를 향해 겨눴다·
“네가 설사 신과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난 전능한 빛의 신 루멘델님이 선택하신 이 땅의 유일한 구원자야!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날 막을 순 없다 엘리스!”
“구원자요? 당신은 구원자가 아니야· 구원자는 절대로 본인 하나만을 위해 살지 않아· 그런 숭고한 이명을 고작 당신 따위에게 붙이지 마!”
엘리스 또한 굴하지 않고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돌연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
주위에 무엇하나 보이지 않는 물속 한가운데·
마치 빛 한점 들지 않은 심해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숨을 쉴 수 없어 몸부림치는 에쉘과 다르게 엘리스는 평온했다·
-휙! 휙
성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봐도 애먼 허공만 베어 가를 뿐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에쉘의 몸은 그렇게 점점 더 밑이 보이지 않은 깊은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루멘델이시여! 정녕 저를 버리실 겁니까?!”
자신에게 은총을 내렸던 지고의 존재를 향해 에쉘은 다시 한번 구원을 요청했다·
“저만이! 오직 저만이 당신의 질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부디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그러자 암흑으로 뒤덮인 눈앞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에쉘은 황급히 빛이 일어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름 아닌 손에 쥐고 있던 성검 듀란다르크였다·
빛에선 곧 듀란다르크의 영령이 실체화하여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쉘의 얼굴엔 다시금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성검이시여! 저를 다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
“한심하구나·”
허나 그 간절한 마음과 다르게 돌아온 것은 매정한 대답이었다·
“구원자를 자칭하는 놈이 어찌 구원을 요청한단 말이냐? 네놈은 이미 나와 빛의 명성을 너무나도 더럽혔다·”
“성검이시여? 대체 무슨 말씀을?”
“넌 기어이 그분께서 하사하신 마지막 기회까지 저버렸다· 그분은 더 이상 네게 아무런 기대도 갖고 계시지 않아·”
에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만 나락 속으로 꺼져라·”
그 말을 끝으로 주변을 밝히던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짙은 어둠 속에서 처참한 울부짖음이 사방으로 널리 퍼졌지만 이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일한 세상의 질서라고 믿었던 거짓의 구원자는
그렇게 깊은 절망의 나락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 * *
-툭
“에쉘!!”
균형을 잃고 힘없이 고꾸라진 에쉘을 향해 하니엘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갔다·
“정신 차리거라 에쉘! 눈 좀 떠보란 말이다!”
허나 그는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가에 핏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
엘리스는 그런 모자의 광경을 못내 처량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끝내 죽이진 않았구나·’
그런 엘리스의 머릿속으로 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에게 죽음은 오히려 구원이 될 수 있어요· 전 그런 오라버니에게 구원을 주고 싶지 않고요·”
죽음은 삶의 끝이자 고통의 끝·
거짓의 구원자에게 그런 단순한 최후를 주고 싶지 않았다·
“최후의 심판은 결국 제가 아닌 시안이 할 거예요·”
엘리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지금의 상황을 전부 지켜본 에밀리와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리스 아가씨····”
에밀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정중한 자세로 엘리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혹시 설명이 필요할까요?”
엘리스는 그녀가 있는 것에 잠시 의아해하긴 했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긴 말을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결국 한 사람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걸 테니까·”
“맞는 말씀이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안을 기다릴 거니?”
“아니요· 아직은 도련님을 뵐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시안을 기다릴 거냔 물음에 에밀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무슨 말을 해도 시안은 다 이해해 줄 거야·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너니까 더 잘 알겠지·”
“욕이라도 안 하시면 다행이겠죠·”
에밀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엘리스는 이해한다는 듯 싱긋 웃으며 다시 에쉘에게 시선을 돌렸다·
곧 그녀의 발밑으로 푸른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러곤 마법진이 발현한 빛에 몸을 맡겼고 쓰러진 에쉘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에밀리는 떠난 엘리스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그녀 또한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이대로 내가 널 보낼 것 같으냐?”
아직 현장에 남아 있던 하니엘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보내지 않으시면 어쩌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에밀리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심장 쪽을 움켜쥐었다·
“커헉!”
원인 모를 고통과 함께 입에선 피가 쏟아졌으며 숨 쉬는 것조차 점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넌 길고양이 같은 존재야! 필요하면 언제든 거둘 수 있고 필요가 없으면 언제든 내칠 수 있는 길고양이! 더이상 내 아들을 위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네년을 내가 살려둘 이유는 없지!”
“대 대체 무슨 짓을?”
에밀리로선 아직 고통의 원인을 몰라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허나 곧 그녀가 토한 피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각혈로 인해 붉게 물들어진 땅바닥엔 정체 모를 보랏빛 액체가 포함되어 있었다·
“네년 몸속엔 아직 내 피가 흐르고 있다! 너도 알겠지만 그 피는 평범한 피가 아니야! 내 마음에 따라 언제든 네년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바꿀 수 있지!
“누 누가 그 아들에 그 어미 아니랄까 봐···!”
에밀리는 질린다는 얼굴로 하니엘을 노려보았다·
“날 죽여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요!”
“왜 달라지는 게 없겠니? 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네 도련님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줄 텐데? 자신을 위해 남몰래 헌신했던 너 하나도 지키지 못했단 사실에 평생을 괴로워할 거다!!”
“그 그런···!”
뭔가 대응을 하려 해도 그녀로선 손쓸 도리가 전혀 없었다·
입에선 연신 피가 터져 나왔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느냐? 절대 잊을 수 없는 너에 대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각인될 텐데? 너를 향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평생을 사게 될 거다!”
단단히 부여잡던 정신마저도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확실하게 전해주마! 네가 어떤 고통에 사로잡히며 가련하게 죽어갔는지! 네 시체를 붙잡고 오열하는 네 도련님의 얼굴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나!”
하니엘은 실성한 사람마냥 광소를 토해내며 에밀리를 더욱더 깊은 고통 속으로 인도했다·
허나 그런 웃음마저 이젠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가쁜 숨소리만 주변을 가득 채우는 상황에서 에밀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사지가 금방이라도 뒤틀릴 것 같은 도저히 미소를 지을만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웃어야 했다·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아주 만족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시안에게 꼭 전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야지 그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테니·
“정말 영광이었어요····”
에밀리는 간신히 입을 움직이며 시안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했다·
“도련님의 시녀로 살다가 죽을 수 있어서····”
그 말을 끝으로 에밀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아쉬움도 없는 그야말로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한 채
그렇게 눈을 감았다·
-툭
허나 그녀의 눈이 완전히 감기기 그 직전
“···!”
일련의 감촉을 느낀 에밀리의 눈은 순식간에 부릅떠졌다·
그와 함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맘대로 죽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