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그를 위한 흐름 (6)
사나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양쪽의 기세가 한순간에 꺼져버린 상황·
두 남자는 하나같이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베 베스티?”
먼저 입을 연 건 벨카리온이었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베스티는 바로 뛰쳐나갔다·
“위험합니다· 베스티님!”
로저스가 급히 따라가서 만류하니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보란 듯이 내밀며 소리쳤다·
“전 무사해요· 마왕! 펜던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요!”
그녀의 목엔 더 이상 현혹의 펜던트가 걸려 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벨카리온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검을 쥔 손마저 잠시 움찔하는가 싶었지만
-후웅
벨카리온은 머지않아 시안을 향해 다시 사검을 휘둘렀다·
-챙!
시안 역시 무덤덤한 기색으로 그와의 혈전을 재개했다·
“어 어째서?”
“마왕님께선 지금 사검이 내뿜고 있는 본성에 사로잡혀 계신 상황입니다!”
“사검이 뭔가요?”
심각한 그들의 곁으로 루나브가 다가와 물었다·
“마계를 지키고자 했던 역대 마왕의 사념이 전부 모여든 검입니다! 마왕님의 본성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검이라 해도 무방해요! 아마 지금 마왕님의 정신은 저 사검이 붙들고 있을 겁니다!”
“제가 다시 가서 말려볼게요!”
“무리입니다! 아무리 베스티님이라해도 지금의 마왕님을 말리실 수는 없습니다!”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신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베스티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요?”
“사검의 힘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로저스는 본성에 잠식된 마왕이 다시 이성을 되찾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허나 바람과 다르게 사검은 마검과의 혈전을 지속할수록 그 기세가 더욱 상승하고 있었다·
저 상황에 사검의 힘을 억제한다는 건 무리에 가까웠다·
“대체 어찌해야····”
절망과 슬픔에 사로잡힌 베스티는 주저앉으며 흐느꼈다·
-스윽
그런 그녀의 어깨를 루나브가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할 수 있겠어요?”
“네?”
“제가 자 사검의 힘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킨다면 마왕을 진정시킬 수 있으시겠어요?”
순간적으로 멍해진 베스티는 루나브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시간 없어요· 빨리 답하세요·”
“해 해볼게요!”
“해볼게요로는 안 돼요· 더 확실하게 대답하세요·”
“할 수 있어요! 벨카리온에게 아주 작은 이성이 남아있다면 제가 그를 진정시킬 수 있어요!”
베스티는 벌떡 일어나 루나브에게 당당히 외쳤다·
“알겠어요·”
그 의지를 확인한 루나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려는 거야 루나브?”
“전부 뒤로 물러나세요·”
그녀의 단호한 지시에 모두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루나브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품에서 마서를 꺼내 펼쳤다·
-화악
그러자 그 안에 내재해 있던 다량의 마력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제 말 들리죠 레미하람?”
“물론이지 숙녀님·”
레미하람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무거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가진 마력으로 저 사검의 힘을 약화시켜 주세요·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다 써서····”
“····”
“왜 대답이 없으시죠?”
“저 마검의 주인 아니 시안을 위해서인 거지?”
“굳이 대답이 필요한가요?”
늘 그렇듯 루나브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숙녀님····”
레미하람은 그 말을 끝으로 루나브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
마서의 영혼이 몸에 들어온 순간 루나브는 크게 휘청거렸다·
급히 중심을 잡고 균형을 바로 잡으니 양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동시에 입에선 숨이 아닌 다른 것들이 새어 나왔다·
그 불안한 몸을 간신히 제어한 그녀는 천천히 마왕의 사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약화(Weaken)····”
목표로 삼은 대상의 힘을 약화시키는 1성급 무속성 마법·
시전자가 발현하는 마력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는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단순한 마법이지만 지금은 이 마법이 매우 절실했다·
그 절실한 마음과 함께 그녀의 손을 떠난 빛이 마침내 사검에 맞닿으니
“···!”
붉은빛이 일렁이던 사검에서 검은 광채가 작게 발했다·
허나 아직은 어림도 없었는지 벨카리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소롭구나·’
오히려 그런 그녀의 힘을 우습게 여기기라도 하듯 머릿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이에 루나브는 단계적으로 할 것 없이 바로 전력을 쏟아부었다·
작은 빛에 불과했던 광채는 마력이 더해짐에 따라 서서히 크기가 불어났다·
‘너의 힘으론 우리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단념해라····’
포기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거듭 들려왔지만 루나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목소리에 화답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막을 생각 없어요· 그냥 잠시만 아주 잠시만 멈춰주세요·”
마침내 그녀의 광채가 사검의 붉은 오라보다 훨씬 커질 정도로 불어났다·
“···?”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한 벨카리온이 시선을 사검에게 돌렸다·
“무검(霧劍): 흩날리는 8개의 꽃잎!”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케이람의 검날이 그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벨카리온은 굴하지 않고 몰아치는 연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챙!
마지막 연격을 제대로 막지 못해 그만 몸의 균형이 무너져버렸다·
“지금이에요!”
그 순간 루나브가 크게 소리치며 베스티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베스티는 필사적으로 벨카리온을 향해 달려나갔다·
케이람으로선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난리들 났네 아주·”
루나브와 베스티의 움직임을 보고선 급히 검의 궤적을 바꿔 사검에게 강한 일격을 가했다·
-깡!
사검은 그대로 벨카리온의 손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윽고 솟구친 사검의 검날이 지면에 떨어졌을 땐
“그만 이제 그만해요· 벨카리온····”
“····”
“마계의 평화를 위해 그만 멈춰줘요····”
바닥에 쓰러져버린 벨카리온의 몸을 베스티가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풀썩
그와 동시에 힘을 다한 루나브도 쓰러졌다·
“루나브!!”
이에 아린이 급히 다가가 부축했다·
다행히 정신을 잃진 않았고 그저 지친 한숨만 내쉬었다·
“성공··· 한 것인가?”
혼란에 빠진 로저스는 마왕에게 다가가야 하나 마나 몸을 이리저리 방황했으며 그를 비롯한 모두가 부둥켜안은 벨카리온과 베스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 한 명
“····”
나나를 제외하고선·
그녀의 몸은 어느샌가 시안과 근접해 있었다·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품에 안겼겠지만 어째서인지 더 다가가지 않은 채 불신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만 보았다·
마치 앞에 있는 시안이 시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파파 어딨어요?”
* * *
“대답해 에밀리·”
“····”
“대답하라고! 내 말 안 들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크게 소리쳤지만 에밀리는 내 부름에 응해주지 않았다·
참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
하지만 내 손은 그녀의 몸에 닿지 못한 채 그대로 통과했다·
뭐야?
이거 완전 유령 취급이네?
얌전히 닥치고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화난다기보단 그냥 어이가 없어 애먼 헛웃음이 터졌다·
-저벅저벅
그러자 그녀가 걸어왔던 방향에서 또 다른 인기척과 함께 발소리가 울렸다·
이건 또 뭐야?
에밀리와 똑같이 후드를 뒤집었다곤 하나 정면에서 오고 있는 만큼 얼굴이 바로 보였다·
외면이 좀 달라 보이긴 해도 틀림없다·
하니엘 파시니티·
그 지랄 맞은 성검의 아공간에서 나를 붙들고 늘어졌던 그 악마의 친어미였다·
그녀 역시 내가 보이지 않는 듯 내 시체를 안고 있는 에밀리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제가 이상한 일이라도 한다는 것처럼 물으시네요·”
에밀리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냐?”
“제게도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는 인간이라고· 기뻐할 줄 알고 슬퍼할 줄 알며 정을 품을 줄 아는 인간····”
에밀리는 내 시체를 더 격하게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뭐가 진실인지도 모른 채 한평생을 미련하게 살았던 남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쯤 했으면 됐다· 더 보는 것도 꼴사나우니 그만 일어나거라·”
하니엘은 작작하고 일어날 것을 지시했지만 에밀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좋으세요?”
“무엇이 말이냐?”
“바람대로 되셨잖아요· 에쉘 도련님은 모든 걸 다 이루셨어요· 이제 이 땅에서 그분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야겠죠·”
“어째 너는 별로 좋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부정은 못 하겠네요· 왜일까요? 당신과 다르게 에쉘 도련님이랑 피가 섞이지 않아서 그런가?”
에밀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쉘을 비꼬는 듯한 말을 계속 내뱉었다·
하니엘의 미간은 점점 더 진하게 찌푸려졌다·
“애초에 에쉘 도련님이 절 기억이나 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분은 제가 당신이랑 같은 마녀란 것도 모르시지 않나요?”
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분명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못 들은 것처럼 상황을 부정했다·
마녀? 마녀라고?
에밀리 네가?
“백번 양보해서 시안 베르트에게 정을 품은 것까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아들을 부정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여기까지 온 거 더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에쉘 도련님이 질서가 된 이 세상 제가 장담하는데 얼마 못 갈 거예요·”
“···!”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에밀리의 얼굴이 홱 하고 돌아갔다·
화를 참지 못한 하니엘이 그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봐· 에쉘이 질서가 된 세상이 어떻게 될 거라고?”
“제가 실수했네요· 의문이 들지 않으시도록 정확히 말씀드릴게요· 에쉘 도련님이 질서가 된 이 세상은····”
에밀리는 굴하지 않고 얼굴을 당당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망할 거예요· 머지않아·”
실로 확고하면서도 확신에 찬 눈빛·
익숙한 모습은 아닌데 어째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 그녀의 이 눈빛은·
평소 나를 봐주던 눈빛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으니·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에밀리!”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진 하니엘 손에 마나를 발현했다·
“더 이상 내 아들을 위하지 않는 너를 굳이 살려 둘 이유는 없지! 너의 그 소중한 도련님 곁으로 내 친히 보내주도록 하마!”
곧 에밀리의 머리 위로 금빛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허나 피할 생각 따윈 이미 없는 듯 에밀리는 오히려 내 시체를 더욱 끌어안았다·
“도련님·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에요····”
그러곤 내 귀에 입을 갖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제게 한 번 더 생이 주어진다면 그땐 에쉘 도련님을 위해 살지 않을 거예요·”
망자에 불과한 나로선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 도련님의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그냥 끝까지 도련님을 위해 살다가 죽고 싶어요····”
“····”
“도련님도 꼭 도련님을 위한 삶을 사세요·”
그녀의 볼을 타고 뜨겁게 흐른 눈물이 내 얼굴에 닿은 순간
-콰직!
눈앞에 번개가 떨어졌다·
그 번개로 에밀리가 죽었는진 알 수 없었다·
왜냐면 번개와 함께 번뜩인 광채가 서서히 걷혔을 땐
내 눈앞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
사방이 까맣게 물들여진 것이 마치 내 아공간을 보는 듯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이 지랄 맞은 광경이 꿈이나 환상이라면 그거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대체 누굴까?
이 기억은 대체 누구의 기억이며 무슨 이유로 이제 와서 내게 이걸 보여주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해주려는 듯 등 뒤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긴 한데 빛에 가려진 나머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분위기만 봐선 인간도 마족도 아닌 지고의 존재에 가까워 보였다·
문제는 내가 봤었던 혹은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신도 아니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
그는 내게 이 기억을 보여준 존재라는 것· 거기에 더해····
“당신이군·”
“····”
“내게 두 번째 삶을 준 장본인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