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그를 위한 흐름 (3)
“여 여기는?”
빛이 들지 않은 암흑의 공간·
낯선 존재로부터 전이 당한 세 여인이 도착한 곳은 주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차원이었다·
허나 서로의 모습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아공간?”
공간의 정체를 눈치챈 루나브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 무구를 통해 생성한 자신의 아공간과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지만 이곳은 영락없는 누군가의 아공간이었다·
주변을 정신없이 방황하던 것도 잠시
아린과 루나브는 불현듯 인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급히 눈을 돌렸다·
함께 자리하고 있던 나나의 시선은 이미 한참부터 그쪽을 향해 있었다·
“···!”
왕좌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남성·
바로 데빌 드래곤의 우두머리인 나겔이자 방금 전 그녀들 앞에 나타나 다짜고짜 마법을 시전했던 바로 그 존재였다·
나겔은 상념에 잠긴 듯 지그시 눈만 감고 있을 뿐 딱히 그녀들에게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당신이 저희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건가요?”
루나브의 물음에도 나겔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는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
재차 물음에도 답이 없자 루나브는 품에서 보란 듯이 마서를 꺼내 펼쳤다·
그녀 역시 아공간을 생성하고 다룰 수 있는 존재인 만큼 나가는 게이트를 생성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시답잖은 짓 하지 마라·”
그러자 나겔이 처음으로 입을 열고 반응했다·
“너희가 나가봤자 어차피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게이트를 열고 나가봐야 어차피 마계 안·
마왕의 표적이 된 이상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도망치는 일에 불과했다·
“즉 저희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부정 없는 침묵은 또 다른 긍정의 표시라 했다·
이것은 호의일까 아님 계산된 행동일까?
아직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의문에 휩싸인 두 연인과 다르게
“····”
나나는 나겔을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경계심을 바짝 세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못내 의식한 듯 나겔 역시 눈을 마주쳐주긴 했으나
그럴 때마다 코웃음만 칠뿐 딱히 말을 걸어주거나 하진 않았다·
-후우웅
그 순간 나나의 뒤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나겔의 심복 중 한 명인 켈리안이었다·
그 또한 나나를 흘끗 쳐다보다가도 바로 나겔에게 다가가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방금 미슈카로부터 감응이 왔습니다·”
“뭐라 하더냐?”
“시안 그자와 함께 지금 아렘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상태는?”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답니다· 다만 그 아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긴 했는지 분위기가 매우 달라 보였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붙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거군·”
덤덤한 나겔의 얼굴에선 왠지 모를 무거운 감정이 느껴졌다·
심각한 분위기의 대화가 오가는 도중
“내보내 줘요·”
나겔을 쭉 노려보던 나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파파한테 가야 해요· 우리 내보내 줘요·”
잔뜩 당황한 켈리안과 다르게 나겔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파파라· 그 인간을 부르는 너의 호칭이냐?”
“네·”
나나는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 정도 성장했으면 이미 알만큼 다 알고 있을 텐데? 그 인간이 정말 너의 친아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파파는 내 파파일 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너희가 가봐야 그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야·”
“파파가 그랬어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거보다 미련한 건 없다고·”
“무엄하다! 지금 네년이 누구 앞이라고 감히!”
당돌한 태도에 분노한 켈리안이 소리쳤지만 나겔은 손을 들며 만류했다·
“할 수 있는 능력이라 했느냐?”
“네·”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냐?”
“네·”
나나의 대답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러자 줄곧 지켜보던 아린이 슬그머니 다가와 아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나는 시안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중히 키워온 시안의 아이예요· 그러니 시안의 옆에 있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겠죠·”
“····”
“저희를 도와주신 점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안에게 일이 벌어질 거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방관만 한다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
“저희를 보내주세요· 저희는 시안에게 아주 작은 힘이라도 되어줘야 해요!”
아린은 두 손을 모으며 나겔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이토록 어리석은 존재들이 또 있을까?
기껏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줬더니 다시 그곳으로 보내 달라며 요청한다니·
어리석다 못해 미련한 종족들이 아닐 수 없었다·
“닥쳐라! 나겔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를 이 이상 모욕했다간 내가···!”
“켈리안·”
“예! 나겔님!”
“현재 영역에 있는 무리 전원에게 알려라· 그 인간이 아공간에 도착하는 즉시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제한 결계를 생성하라고·”
당황한 켈리안은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부 분부하신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내 후다닥 게이트를 열고선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겔을 바라보았다·
“확신 없는 일에 오늘만 벌써 두 번이나 가능성을 거는군·”
나겔이 다시금 마력을 발현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발밑에 흑색의 전이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한 번 지켜보도록 하겠다· 너희의 존재 여부가 과연 그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말을 끝으로 세 여인의 몸은 마법진에 빛에 잠식되었으며 또 다시 어딘지 모를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 * *
최악이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고꾸라져 저 아래로 처박힐 듯한 상태다·
기분만 표현했을 때 칼날에 베인 듯 군데군데 벌어진 상처 안으로 독이 주입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런 기분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좀 있으면 아렘에 도착하긴 하는데···· 너 괜찮은 거 맞지? 어째 숨소리가 자꾸 거칠어지는 느낌이다?”
신경 끄고 비행이나 집중하란 말을 뱉고 싶어도 입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말할 기운조차 없을 만큼 내 정신은 심각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럼에도 난 지금 아렘으로 가고 있다·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을 마왕을 막기 위해·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방향 돌려·]
“왜?”
[그걸 몰라서 처 묻고 있냐? 그 상태로 지금 누구랑 싸우겠다는 거야?]
“주인 걱정도 해주고· 많이 변했네· 케이람·”
[이게 진짜 말이나 못 하면!]
보다 못한 케이람은 급기야 내 앞에 실체화하여 나타났다·
“뭐 뭐야?”
깜짝 놀란 미슈카가 눈을 치켜들며 반응했지만 케이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오직 내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눈이 있으면 네 상태를 봐! 너 스스로도 네가 온전치 않다는 거 알잖아! 최상의 컨디션으로 가도 모자랄 판에 왜 굳이 지금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건데?]
고집· 고집이라····
글쎄 나도 왜 이런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최상의 상태로 싸워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와 최악의 상태로 싸우려고 하다니·
스스로도 참 미련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성검의 아공간을 간신히 깨부수고 나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 버렸다·
온몸에 칼에 베이기라도 했냐고?
그런 외적인 피해라면 차라리 말을 안 하지·
허나 난 그 아공간에 있는 동안 상처는커녕 피 한 방울조차 안 흘렸다·
내가 피해를 입은 것은 바로 정신·
성검의 아공간이 퍼트린 빛의 기운에 의해 정신이 갉아 먹힐 대로 갉아 먹혔다·
아공간은 기본적으로 신의 힘을 근원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성검의 아공간은 그중에서도 최고신에 육박하는 빛의 신에 힘이 작용한 공간으로 나에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던 곳이다·
그런 공간을 무너트리려 했으니 어땠겠는가?
공간에 균열이 생성될 때마다 그곳에서 터져 나온 역한 기운들이 내 정신을 옥죄이듯 억눌렀으며 계속 자극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이미 영혼이 산산조각 부서졌겠지·
그나마 나니까 쓰러지지 않고 제정신을 간신히 유지한 것이다·
뭐 솔직히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긴 하지만·
[이대로 싸워봐야 그놈 좋은 일만 시켜준다는 거 몰라? 네가 지금 마왕이랑 싸우러 간다는 것 자체가 그 성검의 주인이 원하는 일이라고!]
“내가 지금 마왕을 막지 않는다면 마왕은 인계를 침공할 거야· 그럼 내가 이곳에 온 의미가 없어져 버려·”
[그 인계가 너한테 뭘 해줬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널 부정했던 곳이잖아?]
“그래서 더 버릴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
나는 입술을 간신히 올려 그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
케이람은 그런 나를 쌍심지 켠 눈으로 노려만 볼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슬며시 고개를 내려 아래를 쳐다보니 아렘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움직여야 할 때가 왔음을 인지한 나는 바로 아래로 뛰어들었다·
“야! 너 미쳤어?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미슈카가 소리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름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준 것에서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지만 나중에 하지 뭐·
할 기회가 있다면·
-쿵!
지면에 안착한 순간 몸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이에 벽을 짚어 균형을 간신히 바로 잡았지만 입에서 거친 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그 많던 마족들은 어디 갔는지 거리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어진 길 저편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마족이나 마수의 피 냄새가 아닌
익숙한 인간의 피 냄새가·
나는 그 냄새를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왔냐?”
얼마쯤 갔을까?
대로 한가운데 떡하니 앉은 낯익은 누군가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왠지 기다리고 있으면 올 것 같아서 안 움직이고 있었는데 제대로 맞췄네?”
마왕 벨카리온·
가볍고 능글맞았던 이전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모습·
허나 그리 놀랍진 않았다·
내가 본래 알고 있던 마왕의 모습을 이제야 마주친 듯한 기분이니·
마왕도 마왕이지만 그의 오른손에 쥔 낯익은 검에 바로 시선이 옮겨졌다·
마왕의 절대 무구 사검(死劍)·
기어코 꺼낸 것인가?
이건 뭐 최악에 최악이 더해진 상황이로군·
“···?”
사검을 쭉 지켜보던 중 그 옆에 익숙한 무언가가 있어 나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
칼날 중심에 새겨진 문장이 선명하게 빛나는 백색의 장검·
저 검을 사용하는 사람은 인계를 아니 인계와 마계를 통틀어 한 사람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검?”
틀림없는 아버지의 검이었다·
“구차하게 설명 같은 건 안 하겠다· 너희 인간은 기어이 선을 넘고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어· 그렇기에 나는 너를 시작으로 네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을 멸절시킬 거다·”
뭐라뭐라 떠드는 것 같긴 한데 어째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간신히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아버지의 검 외에도 다른 기사들의 검을 비롯해 피가 튄 자국까지 곳곳에 보였다·
다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 해서 저 검의 주인들이 절대 온전할 거란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그래 뭐 예상 못 한 일도 아니지·
저런 광경을 봤다 해서 내가 특별히 분노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다만 확실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저 마왕이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남아있었듯
나 역시 저 마왕을 죽이기 전에 이 마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어느새 오른손에 쥐어진 케이람을 슬그머니 앞으로 내민 채 나직이 읊조렸다·
“암무 9식: 마검 발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