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그를 위한 흐름 (2)
불꽃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붉은 오라가 일렁이는 사검·
그 사검을 오른손에 꽉 쥔 채 서서히 다가오는 벨카리온과 그를 지켜보는 아린과 루나브·
한걸음 한걸음 점차 거리가 좁혀짐에 불구하고 두 여인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뭔가 하고 싶어도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땅에 뿌리를 내린 듯 다리는 굳어버렸고 손에선 단 한 줌의 마나도 발현되지 않았다·
감춰져 있던 마왕의 진면과 마주한 순간 멀쩡했던 몸의 기능이 거짓말처럼 멈춘 것이다·
“하아 하아····”
입에서 거친 숨만 하염없이 터져 나왔다·
두 여인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사이 벨카리온은 어느새 코앞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인 둘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스윽
그런 와중 대뜸 마왕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으며 접근을 저지하는 이가 있었으니
“····”
바로 나나였다·
그녀는 웃지도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중의적인 표정으로 벨카리온을 마주하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넌?”
벨카리온 역시 그녀를 보고선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너 인간이 아니구나?”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마족인 것 같지도 않고 모습만 봐선 데빌 드래곤이 폴리모프 한 것 같긴 한데··· 그마저도 분위기가 좀 다르다? 뭐냐 넌?”
마왕의 추궁 같은 물음에도 나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은 시선으로 묵묵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나 나나야! 위험해!”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아린은 간신히 입을 벌려 나나를 향해 속삭이듯 외쳤다·
허나 그럼에도 나나는 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헤에····”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환한 미소를 짓는 다소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아저씨·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네요?”
벨카리온의 얼굴은 바로 돌처럼 굳어졌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아닌가? 이상하네? 분명 아저씨한테서 나는 냄새가 맞는데?”
나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의문을 표하는가 싶더니 이내 똘망똘망한 두 눈이 어느 한쪽으로 향했다·
“아 저기서 나는 냄새였구나?”
벨카리온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나나가 향한 곳으로 향했다·
나나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녀의 눈은 분명 마왕이 손에 쥐고 있는 사검에게 향해 있었다·
“이거 말하는 거냐?”
벨카리온은 확인차 검을 들이밀며 물었다·
“네! 참 신기하네요?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냄새를 맡아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제가 살면서 맡아봤던 냄새 중 가장 맛있는 냄새가 나요····”
나나는 급기야 혀를 빼꼼 내밀며 입맛을 다셨다·
“그거··· 제가 먹어도 돼요?”
당돌하다는 못해 무모한 물음·
아니 이 세상에 어떤 단어를 대도 표현이 부족할 만큼 경악스러운 물음이었다·
홀연히 미소를 짓는 나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벨카리온은
-슈욱!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사검을 휘둘렀다·
“위험해 나나야!”
그 때 굳었던 몸이 풀린 아린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려가 나나를 끌어안았다·
목표가 바뀌었음에도 사검은 멈추지 않았다·
아린은 그대로 눈을 감았고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드리워지려는 순간
-텅!
요란한 울림과 함께 주변에 파동이 일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아린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녀의 머리 위엔 햇볕처럼 따스한 빛을 띠는 투명한 방패가 맞닿아 있었다·
빛속성 방어 마법 수호자의 방패(Guardian’s Shield)·
당연하겠지만 아린이 시전한 마법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루나브가 한 것도 아니었다·
마법의 시전자는 다름 아닌 베르트 공작이었다·
“전 기사! 마왕으로부터 황녀님을 지켜라!”
이윽고 공작의 지시가 떨어지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진용을 갖추며 바로 마왕에게 반격을 가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
벨카리온은 가소롭다는 듯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들의 반격을 받아주었다·
“괜찮아 아린 언니?”
이에 나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린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크 큰일 날 뻔했잖아 나나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 괜찮았는데?”
나나는 눈을 끔뻑이며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단 반응을 보였다·
“황녀님!”
그때 아린의 곁으로 베르트 공작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선 급히 마왕과 거리를 벌렸다·
얼떨결에 끌려가던 것도 잠시
아린은 베르트 공작의 손을 냉큼 뿌리치며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베르트 공작?”
“황녀님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었다·
“이 이제 와서 무슨?”
“황녀님께서 애초에 이 자리에 계시면 안 됐습니다·”
허나 공작의 눈은 실로 단호하면서도 올곧았다·
“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고 황녀님께서 이해 못 하실 행동을 하고 있단 것도 압니다! 하지만 황녀님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는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아린은 물론 황급히 곁에 온 루나브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 틈에 여길 벗어나십시오·”
“이 이해할 수 없어요! 갑자기 갑자기 왜···?”
“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으며 그 대가를 이곳에서 전부 치러야만 합니다· 하지만 황녀님은 아닙니다· 저를 대신해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우시프 제국을! 그리고 인계를 지키셔야 합니다!”
대륙의 수호자로서 매우 강직하고 당당한 눈빛·
이는 아린이 본래 알고 있던 베르트 공작의 원래 모습이었다·
이제야 정말 베르트 공작과 마주했단 기분이 든 것일까?
경계심 가득했던 아린의 눈동자가 점점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정말 제가 존경했던 윌리어스 베르트 공작님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요?”
“수십 년간 제국과 대륙을 지켜왔던 수호자의 신념은 그리 쉽게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공작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머리가 복잡하고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상황·
허나 시간은 아린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에 아린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우시프 제국의 황녀로서 명하겠습니다· 죽지 마세요 베르트 공작! 반드시 그동안의 저지른 죄를 전부 참회하고 반성하셔야 합니다!”
베르트 공작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세요 베르트 공작!”
“황녀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의 말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아린은 여러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러곤 나나 루나브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도주를 시작했다·
베르트 공작은 그녀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다시 마왕을 향해 돌아섰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없는 힘에 현혹되어 자신의 맏아들인 에쉘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내 자네한테 황제가 아닌 친우로서 부탁 하나만 하겠네·’
황제의 은총을 받아 제국과 대륙의 평화를 위해 싸워온 것이 지난 수십 년·
그 평생에 가까운 시간동안 쌓아온 수호자로서의 신념은 설사 신이 온다 해도 바꿀 수 없다·
그 신념을 마지막으로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
베르트 공작은 10년 전 전선에서 디오네 황제가 했던 부탁이 머릿속에서 선명히 피어올랐다·
‘내가 자네 보다 먼저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아이를 조용히 빼주게나· 황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냥 일반인으로서 평범히 살아가게 해줬으면 좋겠어·’
디오네 황제는 만약 공작보다 자신이 먼저 죽게 된다면 사후 뒤 예고되는 거센 피바람 속에서 아린 황녀를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허나 그때의 황제와 공작은 물론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아린 황녀는
우시프 제국과 인계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꼭 지키겠습니다· 황제 폐하!”
베르트 공작은 황제를 향한 충성을 외치며 검에 마력을 전승했다·
그리고
“이 부족한 아비가 못다 한 일을 너에게 부탁하마· 부디 네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거라··· 시안!”
가장 믿음직스러운 자식을 위한 마지막 유지를 끝으로 베르트 공작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베르트 공작의 말에 따라 얼떨결에 도망은 쳤지만 상황은 여전히 급박했다·
“딱히 초를 치고 싶은 건 아닌데 저 기사들이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2분 저희가 아렘을 빠져나가기에도 빠듯한 시간일 거예요·”
루나브는 마왕의 힘을 직접 눈앞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금방 아까와 같은 상황이 재개될 수 있을 거라며 경고했다·
“시안! 시안을 찾아야 해! 찾을 수 있을까 루나브?”
“현재로선 단서가 너무 부족해요· 저도 선배가 여길 다녀갔다는 것만 알 뿐 그 외에 다른 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숨 가쁘게 달리던 것도 잠시
“···!”
세 여인은 양쪽으로 갈라진 길목 앞에서 위협을 느끼고 발을 멈췄다·
건물에 가려진 왼쪽 길모퉁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이에 나나는 눈초리를 날카롭게 세우며 그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왕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고 경계하는 반응이었다·
-저벅저벅
급격히 적막해진 분위기 속에서 선명히 들려오는 발소리·
발소리의 주인은 바로 세 여인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당연하겠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족도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족과 다르게 느껴지는 기운이 확연히 달랐는데 아린은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나에게 향했다·
이유는 단 하나·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와 옆에 있는 나나에게서 왠지 모를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서였다·
그 말은 즉 지금 그녀들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데빌 드래곤?”
조금 전 아린이 마계에 오자마자 맞닥트렸던 데빌 드래곤이란 뜻이었다·
“····”
정체불명의 존재는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들의 발밑으로 흑색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전이 마법진이란 것을 파악한 루나브가 황급히 대응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후우웅
세 여인의 몸은 이미 마법진에 빛에 잠식된 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동되었다·
* * *
“으아! 진짜 미치겠네!”
정체도 모를 낯선 아공간에 들어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하는 드래곤·
이런 경험은 아마 온 대륙을 통틀어 자신밖에 못 했을 것이라며 미슈카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거스를 수 없는 우두머리의 명을 수행한답시고 이전에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인간과 동행을 한 것까진 용납할 수 있었다·
허나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인간은(물론 못할 것 같지만) 아공간과 아공간 사이를 연결하라고 시키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혼자 여기 둔 채 쌩하고 떠나버렸다·
원치 않게 홀로 남은 미슈카는 어찌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았으며 벌써 몇 시간째 시안의 아공간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진짜 내가 그 인간 놈이랑 무슨 악연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이건 뭐 넘어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고!”
시안이 들어간 아공간을 몇 번이고 다시 열기 위해 애를 써봤지만 한 번 닫혀버린 아공간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내가 그놈 생사가 어찌 되었는지 알게 뭐야? 난 이미 나겔님이 하라고 한 대로 다 했잖아? 그래 맞아! 난 이제 여길 떠나면 그만이라고!”
숱한 고민 끝에 기어이 방향을 정한 미슈카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를 생성했다·
“네가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야! 차라리 영영 못 나온다면 내가 더 환영할 일···!”
-후우웅!
그렇게 게이트 밖으로 나가려던 미슈카는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소리에 바로 발길을 멈추었다·
자신이 생성한 게이트 외에 또 다른 게이트가 생성된 것이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미슈카는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뭐야 너?”
게이트에서 나온 이는 다름 아닌 시안·
허나 들어갔을 때와 다르게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상처를 입었다거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보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시안은 바로 미슈카와 눈을 마주쳤다·
“야·”
무거운 외마디 물음에 미슈카는 몸을 움찔했다·
“왜? 뭐? 쌩하니 사라졌다 몇 시간 만에 나타난 주제에 갑자기 왜 무게를 잡고 있어?”
그래도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을 앞세워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나 싶었지만
“너 나랑 아렘 좀 가자·”
“···?”
그다음에 이어진 말에 대해선 미슈카는 차마 부정을 표하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