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재앙의 전조 (1)
“황녀님?”
활짝 열린 문 앞에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레시무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자면 빈 접시가 가득한 식탁 그리고 활짝 열린 창문이었다·
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린과 나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현장을 목격한 기사들 역시 전부 패닉에 빠졌다·
“화 황녀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빨리 다른 곳에도 보고해!”
이에 한 기사가 보고를 위해 신속히 움직이려던 순간
“기다리십시오·”
레시무스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뭔가 결심이 선 얼굴로 차분히 식탁을 향해 걸어갔다·
깨끗이 비워진 그릇 사이엔 누가 썼는지 모를 한 장의 서신이 놓여 있었다·
레시무스는 바로 서신을 펼쳐 안을 확인했다·
“····”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신을 내려놓더니 열린 창문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 레시무스 경! 그거 황녀님께서 남긴 서신입니까?”
“예· 그런 듯합니다·”
“안엔 뭐라고···?”
기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레시무스가 어서 서신을 읽어주길 바랐다·
허나 레시무스는 서신을 바로 읽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의 상황을 두고 어찌 반응 해야 할지 내면에서 어지러운 고민이 이어졌지만 곧 마음을 굳힌 듯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황녀님께선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셨습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기사들은 눈을 끔뻑였다·
“해 해야 할 일 말입니까?”
“예·”
“그게 뭡니까?”
“저도 모릅니다·”
무책임한 답일 수 있지만 이는 레시무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아린이 남긴 서신에 정말 아무런 내용 없이 이 한 줄만 그대로 적혀 있었다·
<아린 세벨러스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오겠습니다·>
* * *
-후우웅!
일생에 다시 없을 순간·
아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금 같은 경험을 해본 이가 몇이나 있을까?
감히 자부하건대 열 손가락에도 들지 않을 것이라고 아린은 생각했다·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비행하는 인간·
경이롭고 신기하다기보단 이게 정말 현실인지 의문과 두려움이 앞섰다·
“아린 언니 속도 괜찮아? 안 무서워?”
“으 응 괜찮아· 아마도····”
괜찮아 뒤에 이어진 말을 나나는 듣지 못했다·
“무섭다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줘· 내가 속도 조절해 줄 테니까·”
“고 고마워 나나야·”
그냥 이 이상 더 올리지만 않기를 바랐다·
“그 언제부터 변신이 가능했던 거야?”
“뭐라고? 잘 안 들려 언니!”
높은 상공에서 비행 중인지라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아린은 눈을 질끈 감으며 크게 소리쳤다·
“언제부터 변신이 가능했었어?!”
“3년 전부터! 몸에 이상한 기운이 돋는가 싶더니 변신이 가능해졌어!”
나나는 날개를 더 힘차게 퍼덕이며 비행 속도를 높였다·
“기분 진짜 좋다! 나 아린 언니는 꼭 한 번 태워 주고 싶었거든! 다음엔 파파랑 아린 언니를 같이 태우고 우리끼리 놀러 가고 싶어!”
“시 시안이랑?”
“응! 근데 파파는 하늘을 나는 게 싫은가 봐· 자꾸만 나나 등에 안 타려고 해·”
아린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파파랑 아린 언니 이제 다시 예전처럼 친해진 거지? 나중에 우리 같이 꼭 놀러 가자!”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 이뤄지면 좋을 것 같은 바람·
비록 가능성은 없지만 그 작은 소망을 아린은 마음속에 조심스레 품어보았다·
“···!”
싱글벙글 웃던 나나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세워졌다·
“왜 그래 나나야?”
“꽉 잡아 아린 언니!”
뭔가 위험을 감지한 듯 나나는 비행고도를 급격히 낮췄다·
얼떨결에 고개를 내민 아린은 하마터면 심장이 멈출 뻔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절벽이 이어진 광활한 협곡지대·
나나는 망설임 없이 그 사이로 진입했다·
이윽고 절벽 바닥에 이르고서야 비행을 멈추었으며 다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나나야 왜 이런 곳에···!”
아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등에서 내리다가도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어둠속에서 자신들을 서서히 향해 옥죄이는 일련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그녀보다 훨씬 더 먼저 기운을 감지한 나나는 꼬리를 칼처럼 날카롭게 세우며 전방을 주시했다·
-쿵
빛이 들지 않은 절벽 끝자락·
묵직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발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아린의 손에는 땀이 흥건해졌다·
“인도의 빛!”
그래도 침착하게 마법을 시전하며 어두웠던 주위를 밝혔다·
빛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쿵!
허나 정체 모를 발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곧 전방에서 거대한 날개 형상을 가진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이에 아린은 빠르게 검을 뽑았다·
“····”
잠시 어둠 속에서 다섯 명의 괴인들이 나타났다·
전부 흑발에 머리 양쪽엔 뿔이 달려 있었고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마 마족?”
아린은 그들이 단연 마족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그들은 마족이 아니었다·
인간인 아린은 제쳐놓더라도 나나를 바라보는 시선엔 왠지 모를 의문과 당혹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어째서 저런 존재가 이 세상에?”
“이거 나겔님이 아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겔님만이 아닌 그 누구에도 들켜선 안 된다·”
그 당혹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린과 나나를 위협하는 살기로 전환됐다·
이를 감지한 나나의 눈에서도 곧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올랐다·
언제 터질지 모를 만큼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
“···!”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아린은 곧 자신의 발아래를 쳐다보았다·
“마법진?”
다량의 마나가 흘러넘치는 오색 빛의 마법진·
언제 생성되었는지 모를 낯선 마법진에 아린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역시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설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마나의 기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방을 둘러보던 아린은 이윽고 절벽 위 인도의 구체 아래에 홀연히 자리한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하였다·
“전이 마법진이다 잡아!”
앞에선 뒤늦게 마법진의 정체를 파악하고 급히 달려들었지만
-후우웅
둘은 곧 전신이 마법진의 빛에 휩싸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털썩!
그렇게 전이된 어딘가·
황급히 고개를 든 아린은 곧 자신들을 위기상황 구해준 당사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다친 덴 없으세요?”
“루나브!?”
시안과 함께 마계로 떠났던 루나브였다·
“어 어떻게 여길?”
“간도 크시네요? 마계에 오자마자 데빌 드래곤이랑 붙을 생각도 하시고?”
“데 데빌 드래곤? 그냥 마족들 아니었어?”
자신들을 위협했던 그들의 정체가 데빌 드래곤이었다니?
그럼 무려 거물급 마수들에게 공격을 받을 뻔했던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단 소리가 아닌가?
아린으로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드래곤 맞아! 나나랑 똑같은 냄새였거든!”
나나는 좀 전과 달리 해맑게 웃으며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근데 여긴 어디야?”
뒤늦게 주변 풍경을 살펴보던 아린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어디긴요? 마계죠·”
“그 그건 아는데 뭔가 분위기가 좀····”
본래 있었던 장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장소·
붉은 하늘만 아니었다면 차마 마계라는 생각 자체가 안들만큼 굉장히 묘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선배와 저 아이를 전이시키는 동시에 저도 공간을 이동했어요· 어차피 인근으로 도망쳐봐야 금방 추적당할 테니 차라리 보는 눈이 많은 곳으로 도망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루나브는 이곳이 마계의 주거지역 중 하나인 아렘이라고 소개했다·
“근데 왜 너 혼자 있어? 시안은?”
“아 이게 설명하면 좀 복잡한데····”
루나브는 턱을 들어 올리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여기 왜 온 거예요? 호위 기사도 없이?”
“그 그게 나도 좀 경위를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꺄아아악!”
그 순간 거리 저편에서 아찔한 비명이 들려왔다·
* * *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눈을 자동으로 찌푸렸다·
마치 나의 입장을 거부한다는 듯 차마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밝은 빛이 시야를 덮쳤다·
게이트는 내가 들어온 순간 사라졌으며 게이트를 열어준 미슈카는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내 아공간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지·
[아· 벌써 부터 속이 울렁거리려고 하네?]
동감한다·
일분 일초라도 더 있기 싫은 역한 기운이 물밀 듯이 몰려오면서 나를 점점 더 옥죄였다·
그래도 일단 다시 돌아갈 방도는 없는 만큼 앞으로 묵묵히 나아갔다·
몇 걸음 나아가니 익숙한 누군가의 뒤태가 보였다·
에쉘은 아니었다·
그보다 머리가 훨씬 긴 여자였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그 악마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다시 만났군요· 시안 베르트·”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반갑듯 반갑지 않게 맞이했다·
악마의 친어미이자 이 마계에서 그토록 찾고자 했던 바로 그 여자·
하니엘 파시니티였다·
나는 대답 없이 눈동자만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혼자인가?”
“네· 조금 전부터 혼자가 됐습니다· 당신이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 같이 있던 이들을 모두 내보냈거든요· 당신의 아버지인 그이를 포함해서 말이죠····”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를 제외하고선 주변의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공간에 오직 나와 그녀 그리고 케이람만 존재했다·
“제가 아닌 제 아들이 있기를 원했던 당신으로선 조금 아쉽겠네요· 우리 이렇게 된 거 깊은 이야기라도 나눠볼까요?”
“내가 왜 그래야 돼지?”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당신은 왜 에쉘을 따르지 않는 거죠?”
별로 내키지 않는단 반응을 보였음에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질문을 들이밀었다·
“전 에쉘을 낳은 순간부터 그에게 신을 제외한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을 그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도록 권능을 부여했습니다·”
“잘도 권능이라 지껄이는군·”
“당신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제게는 아니 우리 일족에게 있어서 이 힘은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그쪽 이야기 듣자고 온 건 아닌데?”
더 들어봐야 나만 피곤할 일·
나는 케이람을 고쳐잡고선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절 죽이실 생각입니까?”
아니 머리채 잡고 끌고 나갈 거다·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당신은 여기서 못 나가요·”
케이람의 칼날은 그녀의 목에서 딱 손톱만큼 사이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내가 나가지 못한단 말은 곧 당신을 구하러 와줄 사람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뜻이야·”
“네 맞습니다· 이제 이 공간에 아무도 나갈 수 없으며 아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저와 당신 그리고 그 마검만 남을 뿐이죠· 이건 당신이 절 죽인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깨닫기엔 정확히 3초의 시간이 걸렸다·
[야 주인아· 이거 여유부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케이람 역시 뭔가를 느꼈는지 초조한 웃음을 흘렸다·
이 아공간 뭔가 이상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과 공간 사이의 경계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정말 본인 한 몸 희생해서 날 여기 묶어둘 생각인가?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여기에 평생 가둬두겠단 말은 아니니까·”
하니엘은 내 얼굴을 보란 듯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시안 당신은 그저 여기서 무기력하게 방관하세요! 당신이 이 공간을 빠져나갔을 때쯤엔 이미 마계와 인계는 혼돈과 혼란으로 물들여졌을 테니까요!”
나는 그제야 이 아공간의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건 인계에서 도망친 사냥감들이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 같은 곳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잡으러 온 맹수를 가두기 위한
일종의 함정이었다·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