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데빌 드래곤 (4)
신의 피를 직접 계승 받은 신성한 종족·
혼탁한 마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수호자·
지능 없는 천박한 마수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해 다가서려 하지 않는 존재· 데빌 드래곤·
그 데빌 드래곤이 고작 인간 한 명이 무서워서 도망친다?
좀 더 과장을 보태면 이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저 조금 흥미로웠고 그저 조금 다르게 보였을 뿐이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지 10년은 됐을까 싶은 인간 꼬맹이가 마수를 단신으로 처리했다고 하면 믿을까?
그 자리에서 먹고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했다고 하면?
세간에 농담거리로도 못 쓸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다·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분명 인계에서도 돌연변이로 취급받다 못해 큰일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단 예감이 피어오르게 했다·
왠지 먹으면 꽤나 맛있을 것 같단 생각마저 들게 하던 순간
“···?”
그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고선 눈을 마주쳤다·
그때의 그 기분은 아마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인간의 눈은 마치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최상의 먹잇감을 발견하고선 환희에 젖은 듯한 눈빛이었다·
감히 지상 최고의 생명체이자 포식자인 자신을 먹잇감으로 바라보다니·
드래곤으로 태어나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혹 지능이 마수만도 못한 수준은 아닌지 의문마저 들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인간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드래곤인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고 달려들었다·
이게 웬 난데없는 날벼락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인간·
콧방귀 한 번만 뀌어도 형체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인간이 가진 힘은 데빌 드래곤인 자신의 힘을 훨씬 뛰어넘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이런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 인간은 명백하게 잘못된 존재다!
강한 부정과 함께 데빌 드래곤의 내면에선 처음으로 생존을 향한 강한 갈망이 샘솟았다·
결국 그 인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으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족은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 인간과의 만남은 다시 접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일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마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은 좀 성장해서 변하긴 했어도 눈빛만큼은 그대로였다·
마계 접경지도 아니고 이런 깊숙한 곳엔 왜 나타난 걸까?
이유야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저 볼일만 끝내고 빨리 꺼지길 원했지만 이게 웬걸?
종족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안내자로 지목하며 그 인간을 어느 장소까지 인도할 것을 지시했다·
우두머리의 말은 절대적이며 아직 성체에도 이르지 못한 자신은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불쾌한 감정을 꾹 참으며 결국 지시했던 장소에 잘 데려오기까지 했건만
이 망할 인간은 왜 자꾸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일까?
“크기가 좀 더 커졌네?”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태연하게 공중에 떠있는 시안·
순식간에 데빌 드래곤의 앞으로 다가와 앞을 가로막더니 씨익 하고 미소를 날려주었다·
“내려와· 우리 아직 할 일 더 남았잖아?”
“할 일이 남긴 뭐가 남아? 난 나겔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했어! 내 할 일은 여기서 끝이라고!”
“네 우두머리가 정말 이 장소로 날 안내하라고 했어? 확실해?”
“내가 네놈한테 거짓말이라도 했단 거냐? 무슨 이유로!”
아무리 하등한 인간이라 한들 종족의 우두머리로부터 명령을 받은 드래곤이 인간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 역시 딴 길로 새지 않고 나겔이 안내하라고 한 장소에 시안을 정확히 인도했다·
“네 우두머리가 그러던데? 다시 볼 일이 없길 바란다고· 내가 말하는데 여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난 다시 네 우두머리에게 돌아갈 거다· 그래도 상관없나?”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네놈이 못 찾는 걸 왜 나겔님께 돌리겠단 거냐?”
“네 우두머리에게 돌리겠다는 게 아니야· 너한테 돌리겠다는 거지·”
“····”
“네가 안내를 잘 못 해서 내가 돌아온 것 같다고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다면 뭐 돌아가도 좋아·”
데빌 드래곤은 분에 찬 듯 크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시안을 노려보는 시선엔 분노와 억울함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나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 많고 많은 성체들을 다 제치고 널 보낸 데엔 분명 이유가 있겠지·”
“뭐?”
“잔말 말고 내려와· 난 니들처럼 날개가 없어서 오래 못 나니까·”
시안이 먼저 힘을 거두고 지면에 내려왔다·
“하 진짜 내가 어쩌다가!”
데빌 드래곤은 하늘을 보며 크게 한탄하다가도 곧 날개를 접고 시안을 따라 내려왔다·
그러곤 다시 폴리모프를 통해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꿨다·
“너 인간 모습으로 다니는 게 꽤 편한 모양이다? 네 우두머리도 그렇고·”
“비아냥 대지 마· 그리고 자꾸 너! 너! 그러는데 나도 이름이 있어! 미슈카 안데르센 아즈이····”
“짧게 앞에 하나만 말해·”
마음 같아선 이름 전체를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하라고 귓구멍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미슈카다·”
마지못해 앞에 하나만 말하는 미슈카였다·
“정작 너도 네 우두머리를 나겔님이라 부르면서 왜 쓸데없이 이름을 길게 짓고들 있는 거지?”
“남이사· 인간인 네가 뭔 상관이야? 난 이름을 짧게 짓고 다니는 네놈들이 더 이해가 안 된다·”
고작 이름 가지고 서로를 이해시킬 것도 아니기에 시안은 다시 본래의 일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넌 네 우두머리가 날 여기로 왜 안내했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과거의 기억을 자극하는 살벌한 눈빛에 미슈카는 입을 잠시 머뭇거렸다·
“나한테 물어보기 전에 일단 주변에서 뭐가 느껴지는지부터 먼저 확인해봐·”
느껴지는 기운이야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었다·
목을 건조하게 하는 텁텁한 공기 머리를 멍하게 하는 풀내음 중간중간 처리해온 마수의 피냄새·
그리고 드래곤 고유의 기운 신기(神氣)까지·
대부분은 시안의 옆에 있는 미슈카로부터 나타나고 있었지만 꼭 그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은연하게 퍼져 있었다·
“네놈은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 주변엔 만연한 신기 속에서 다른 기운 하나가 숨어 있어·”
“기운이 숨겨져 있다고?”
“그래· 이 정도로 세밀하게 숨기는 건 나겔님 정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데 대체 어떤 놈인지 낯짝 좀 보고 싶네·”
시안은 그 말에 바로 눈을 감고 비기를 시전했다·
“암무 4식: 살기 감지·”
마치 없는 것을 찾는다는 기분으로 당장 느껴지는 모든 기운을 전부 배제한 채 숨어 있는 기운을 감지해 보았다·
‘찾았다·’
두터운 성벽 사이 작은 틈 속에 숨어 있던 것처럼 숨어있던 익숙한 기운·
이는 분명 인계에서도 몇 번이고 접해본 적이 있던
‘성검의 기운이다·’
성검 듀란다르크의 기운이었다·
“아공간이군·”
신의 무구가 가진 힘을 이용해 현실이 아닌 차원의 경계 속에 창조하는 또 다른 공간·
성검의 주인은 인계가 아닌 마계의 차원 속에 아공간을 만들어 숨어 있던 것이다·
바로 이 주변 어딘가에서·
“표정을 보니 이제야 눈치를 챈 모양인데 그런다 해도 별 수 없을 거다· 아공간이란 게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바로 찾아갈 순 없는····”
-후우웅!
“뭐 뭐야?”
미슈카는 눈을 의심했다·
아공간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도 그 입구를 찾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말하려던 찰나
시안은 그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아공간을 열었다·
“너 아공간도 만들 수 있어?”
세상에 드래곤도 아닌 인간이 아공간을 창조하다니·
대체 이 인간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뭐해?”
“···?”
“안 들어오고·”
이미 안에 들어선 시안은 미슈카에게도 얼른 들어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 * *
아무것도 없는 무지 한가운데에서 힘을 써봐야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길은 길 위에서 찾고 사람은 사람 속에서 찾는 것처럼 아공간 역시 아공간 안에서 찾아야 맞는 것이지·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 분야는 내 쪽이 아니다·
이 분야에 관해서 그 잘난 후배님이 제격이겠지만 지금은 데려오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
그 대신
“나참·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우리보다 훨씬 잘난 이 데빌 드래곤을 이용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인간은 신의 무구라도 있어야지 아공간 생성이 가능한 반면 이 드래곤이란 놈들은 날 때부터 신성해서 어느 정도 성장만 하면 개인 아공간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들었다·
즉 아공간에 관해선 인간보다 훨씬 더 잘 다루는 종족이란 소리지·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힘쓴다고 해서 찾을 수 있단 보장은 없다?”
“그럼 네 우두머리한테 가서 찾아달라고 해야겠군·”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기어이 화가 폭발한 듯 미슈카가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대로 주먹이라도 한 대 휘두르는가 싶었지만
“하····”
한숨만 푹 쉬더니 다시 등을 돌려 아공간 추적을 재개했다·
조금 욱하는 성질은 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말은 참 잘 듣는 것 같다·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그의 뒷모습을 팔짱을 끼며 잠시 쭉 바라보았다·
“야·”
“미슈카라고 이름도 말했다 난·”
“너 인계엔 왜 왔었냐?”
기운을 추적하던 그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내가 말해야 하냐?”
“싫음 말고·”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나는 아무 이유 없다는 의미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미슈카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엔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 가득 엿보였다·
“그냥 좀 궁금했을 뿐이야· 인간이란 종족이 말은 하등하다고 하는데 실제론 얼마나 미개할지 내 눈으로 확인 좀 해보고 싶었던 거라고· 그래서 잠깐 확인만 할까 싶어서····”
“레메아 협곡에 갔던 거다?”
“그래! 거기서 네놈을 마주치고선 한동안은 울화가 치밀어올라서 잠도 못 잤다!”
나 역시 그때 네놈을 못 먹고 놓친 것이 아까워서 이따금 얼굴을 구겼다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꽤 궁금하긴 했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원래 나겔님도 인간에 관해선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셨어· 근데 어느 순간부턴 그냥저냥 괜찮게 보시더라· 결국은 우리랑 크게 다를 바가 없으시다면서····”
자신들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자만심이라면 하늘을 찌르는 종족인 드래곤이 인간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다니·
나로선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네 우두머리도 인계에 다녀왔던 건가?”
“어· 한 9년 전 쯤?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다녀오셨다고 해· 다녀오신 직후엔 기분이 매우 안 좋으셨던 것 같지만····”
-파직
순간 신기를 조절 중이던 미슈카의 양손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찾았다!”
미슈카는 외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 허공에 손짓하며 커다란 원을 그리니 원에서 빛이 일어났으며 이내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그 안을 잠시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것도 잠시
-파지직
게이트의 빛이 희미해지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저 공간의 주인이 널 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닫으려 하는데?”
상태를 보니 금방 소멸할 것 같았다·
지금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마 다음엔 더 찾기 힘들겠지·
-홰액!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