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데빌 드래곤 (2)
“그래서 그냥 빈손으로 오셨단 말입니까?”
“어차피 너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나와 기사들로는 시안을 죽이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에쉘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시안 역시 날 죽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을 네가 원했단 것을 눈치챘는지도 모르지·”
공작의 말에 에쉘은 턱을 치켜들며 매우 불쾌한 반응을 모였다·
“뭐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군요· 작은 상처는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자식의 매정한 조롱에도 베르트 공작은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도 아버지를 향한 녀석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의미는 찾았다고 봅니다· 다음에 만났을 땐 그 마음을 좀 더 자극하····”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에쉘?”
순간 에쉘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시안과 검을 부딪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넌 시안을 이길 수 없어· 네가 아무리 방도와 계책을 갈구한다고 한들 시안에겐 통하지 않을 거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네가 무의미한 일을 지속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공작은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너에게 전부를 바치고자 하는 내 마음은 아직 그대로다· 이대로 다시 시안을 죽이러 가라 말한다면 난 아무런 고민 없이 갈 수 있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
“이제 그만 현실을 깨달아라· 에쉘·”
공작은 지금이라도 현실을 인지하고 모든 걸 그만두라고 권했다·
하지만
“키하하하하!”
에쉘은 급기야 하늘을 올려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현실을 깨달으라 하셨습니까?”
그에겐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전 아버지께 현실을 깨닫게 해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절 위해 하셔야 할 일은 저를 위해 현실을 바꿔주시는 겁니다! 제가 시안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요? 그럼 시안을 이길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해주십시오! 그리하셔야만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질서는 오직 자신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아직 그 신념을 굳게 지키고 있는 에쉘로선 시안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 욕망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저 에쉘입니다·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이자 대륙의 수호자 윌리어스 베르트의 뜻을 이어 이 세상을 지킬 의무가 있는 남자란 말입니다! 제가 그 의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선 영혼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
“이제 뭘 하셔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네가··· 원하는 일은 해주겠다·”
에쉘은 그제야 만족에 젖은 듯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공작의 두 손을 고이 잡고선 호소하듯 말했다·
“잊지 마십시오· 막내로 인해 어긋난 이 세상의 질서를 오직 저만이 바로 잡을 수 있단 것을! 저는 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헛된 환희에 사로잡힌 그의 웃음소리가 붉은 하늘을 가르며 사방에 퍼져 나갔다·
* * *
되도 않는 우두머리 연기를 하던 잔챙이가 물러나고 왕좌의 진짜 주인이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제대로 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손으로 턱을 괴고 긴 다리를 꼬고선 나를 가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드래곤 치곤 의자에 앉은 모습이 꽤 자연스러웠다·
인간 형태로 지내는 걸 선호하기라도 하는 건가?
“드래곤의 피는 언제 섭취한 것이냐?”
그의 첫 질문은 내 몸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관한 것이었다·
“글쎄? 벌써 7년도 더 된 일이라 딱히 기억이 안 나네?”
나는 모르쇠로 대답했다·
“적어도 데빌 드래곤을 먹은 적은 없어·”
“알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네 몸은 벌써 내 뱃속 안에 들어가 있었을 거다·”
농담이 아닌 진심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같잖은 연기로 시험하면서까지 날 당신의 공간으로 데려온 그 이유 좀 들어볼까 하는데?”
“같잖은 연기라는 말은 좀 거슬리는구나· 마왕과 호각을 이뤘다는 너의 소문을 검증하기 위한 나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는 급기야 꼬던 다리를 풀더니 나를 향해 목을 들이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마계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거 하나 묻자고 굳이 날 여기까지 부른 건가?”
“난 인간의 수준을 잘 안다· 설마하니 마왕이 전력을 다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마계의 최강자와 호각을 이뤘다는 것만으로도 인계에서의 네 위치를 가늠해볼 수는 있다· 넌 필시 인계에서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니 딱히 부정은 안 했다·
“인계의 절대자가 마계로 넘어와 마왕과 마주한다는 것은 절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큰일이 생기기 마련이지· 어쩌면 이미 생겼을 수도 있고····”
“왠지 경험담처럼 들리는데? 기분 탓인가?”
그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인계에서 분탕 치고 그것도 모자라 마계로 도망친 어느 머저리 인간을 잡으러 왔을 뿐이야· 그 인간을 잡는 즉시 바로 인계로 돌아갈 거고 이 땅엔 두 번 다시 발도 안 붙일 거다·”
“도망친 사냥감을 쫓으러 왔단 말이군·”
그는 잠시 눈동자를 굴려 내가 아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다· 그럼 그 사냥감을 찾을 수 있게 내가 도와주도록 하겠다·”
“방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입 아프게 하지 마라·”
두 번 말하진 않겠다는 듯 나겔은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아까 습지에서 봤던 인간들이 바로 네가 쫓고자 하는 사냥감의 무리들이겠지· 그들의 냄새는 이미 기억해놓았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아직 저 말에 신의를 파악할 순 없지만 직감상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날 도와주는 이유가 뭐지?”
“알려 하지 마라· 호의는 아닐뿐더러 악의는 더더욱 아니니·”
차라리 이유를 말하는 게 낫지 저런 두루뭉술한 대답은 의심만 자극했다·
“내가 좀 전에 한 말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넌 지금 거절할 처지가 아니다· 이방인이면 이방인답게 용건만 해결하고 빨리 네놈들 땅으로 꺼져라·”
그냥 한시라도 빨리 마계에서 날 쫓아내는 게 목적이라는 건가?
피차 원하는 일이라곤 하지만 어째 구린 냄새가 심하게 난다·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고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내 의사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군·
놈은 슬며시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내 등 뒤를 가리켰다·
-후우웅
그러자 밖으로 연결된 둥근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밖에 있는 내 동족 중 한 명에게 네 사냥감의 위치를 알려놨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직접 안내하진 않겠다 이건가?
썩 내키지 않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긴 하나
어쨌거나 나에게 나쁠 건 없으니 일단은 따라보고자 한다·
“다시 볼 일이 없길 바란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서로에게 찝찝함을 남기는 말을 끝으로 나는 밖으로 나왔다·
“····”
이내 잠시 발을 멈추곤 가파른 돌산 아래로 펼쳐진 진귀한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나오기를 여태 기다리기라도 수십 마리의 데빌 드래곤들이 양옆으로 사열한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딱히 다가온다거나 말을 걸진 않았지만 나로선 썩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려 하자 돌연 중간쯤에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느낌상 날 안내해준다는 그 드래곤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크기로 봤을 때 성체인 것 같진 않고 이제 막 성장기를 지난 정도?
놈은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날 불만 섞인 눈으로 빤히 보더니 곧 폴리모프를 통해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꿨다·
“따라와라·”
그러곤 자질구레한 설명 없이 바로 따라올 것을 지시했다·
[오호?]
대뜸 케이람이 속에서 흥미롭단 웃음을 지었다·
딱히 물을 생각은 없기에 반응은 안 했지만····
근데 저 데빌 드래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낯익은 기분이다·
일단 내색하진 않은 채 묵묵히 녀석의 뒤를 따랐다·
* * *
시안이 안내자와 함께 돌산을 떠나고
왕좌에 앉아 상념에 잠긴 나겔의 곁으로 잠시 그의 역할을 연기했던 켈리안이 다가왔다·
“그 인간이 안내자와 함께 알려준 장소로 방금 떠났다고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감시자들도 몇 명 뒤따르게 했습니다·”
“····”
“나겔님· 무리가 안 되신다면 그 인간에게 왜 호의를 베푸시는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겔은 입은커녕 감은 눈조차 뜨지 않았다·
“혹 예전에 인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
순간 주변에 신기가 퍼지며 공간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죄 죄송합니다 나겔님!”
켈리안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난 호의로 놈을 도와준 것이 아니다·”
그에겐 호의가 아닌 어디까지나 일련의 이득을 위한 일이었다·
“놈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 인간이 가진 힘은 내 예상을 훨씬 넘어섰어· 마왕과 두 번 다시 붙게 해선 안 된다·”
“그 그 정도란 말입니까?”
예상 밖 평가에 켈리안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한데 놈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더구나·”
“무슨 냄새 말입니까?”
“모르겠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알 듯 말 듯 한 오묘한 냄새였다·”
단순히 드래곤의 피를 섭취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아닌 반쪽짜리의 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냄새····”
나겔은 그 냄새가 마치 자신의 신체 어딘가에서도 흘러나올 것처럼 굉장히 익숙하게 다가왔었다·
* * *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
맛있는 음식들이 푸짐하게 널려있음에도 나나는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먹어 나나야?”
“배 배가 안 고파서·”
아린은 그 말이 거짓이란 걸 단번에 알았다·
나나는 절대 안 놓을 기세로 두 손을 꽉 잡으며 식욕을 애써 제어했지만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는 감정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괜찮으니까 먹어· 에밀리에 대해선 안 물을게·”
“저 정말로?”
“응· 언니가 황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반신반의한 시선으로 눈치를 보던 것도 잠시
나나는 기어이 못 참겠다는 듯 허겁지겁 눈앞에 차린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며 아린은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브라이언에게 들었어· 나나 네가 모두를 태우고 벨리아스로 데려왔다며?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해서 말이야·”
“···!”
쉼 없이 움직이던 나나의 포크가 허공에서 뚝 하고 멈췄다·
“괜찮아! 네가 용인이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뭐!”
나나가 예상 밖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아린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나중에 괜찮으면 언니한테도 한 번 보여줘· 드래곤으로 변한 나나의 모습이 언니도 무척 궁금하거든· 분명 근사하겠지?”
“아린 언니는 드래곤을 본 적 있어?”
“딱 한 번 본 적 있어·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도 더 됐네?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시안이 레메아 협곡 하늘 위에서 드래곤의 몸에 매달려 있었거든·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
“그 드래곤이 아마 데빌 드래곤이라고 했었지?”
“언니는 파파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응?”
마냥 천진난만했던 나나의 낯빛이 돌연 급격히 어두워졌다·
“대답해줘· 아린 언니는 파파를 위해 뭐든 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 에밀리 언니처럼?”
아린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엄밀히 말해 지금 이 음식들은 그녀가 나나의 입을 열게 할 생각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브라이언이 말하길 에밀리는 사라지기 전 나나와 하스티아에게 본인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놨다고 했다·
허나 어째서인지 하스티아는 입을 다문 채 정신 감응에도 응해주지 않았으며 나나 역시 에밀리에 관해서 좀처럼 말해 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 질문을 통해 아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린은 황녀였다·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있는 그녀에게 누구를 위해 뭐든 해줄 수 있냔 물음은 대답하기 매우 위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응· 언니는 시안을 위해 뭐든 해줄 수 있어·”
아린은 황녀로선 해선 안 될 위험한 질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가식이나 거짓으로 꾸민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이에 나나는 본래의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린 언니· 나랑 파파 찾으러 갈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