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데빌 드래곤 (1)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나겔 안시온 데 쿠르트 제니스 아로디크 유니스라고 합니다· 너무 길면 나겔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한 번에 알아듣기도 벅찬 긴 이름·
이런 쓸데없이 장황한 이름을 쓰는 종족은 두 대륙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다·
드래곤·
그냥 드래곤도 아니었다·
검보라빛의 영롱한 날개와 창날을 박아넣은 듯 날카롭게 솟은 뿔로 봤을 때
저 정체 모를 남자는 데빌 드래곤이 분명했다·
특이하게도 꼬리의 끝부분 일부가 잘려 있었다·
“귀공의 성함은 그러니까··· 시안 베르트· 맞으십니까?”
설마하니· 이 낯선 땅의 낯선 존재로부터 내 이름이 불리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래 뭐 이름 불린 건 둘째치더라도····
저 드래곤 뭐지?
여태 내가 알던 잡스러운 데빌 드래곤과는 전혀 다른 기운을 풍기고 있다·
저 속내에 꾹꾹 눌러 담다 못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신기만 봤을 땐 마왕의 가공할 혈기에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한테 볼 일 있나?”
우연한 만남인지 아님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서 찾아왔는진 모르겠지만
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봤을 때 저 드래곤은 나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주변 정리부터 해야겠군요·”
나겔이란 이름의 드래곤은 이내 시선을 주위의 기사들에게 돌렸다·
“금방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신들이 표적이 됐음을 인지한 기사들은 바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누구 맘대로?”
놈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드래곤은 상도의가 없나? 지금 어디서 숟가락을 얹으려는 거지?”
“아 혹시 이들을 사냥 중이셨습니까? 결례를 범했군요· 마저 진행하십시오·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사과함과 동시에 한발 물러서 상황에 나서지 않겠단 의사를 보였다·
반신반의한 눈으로 놈을 응시하다가도 다시 아버지에게 눈을 돌렸다·
“가십시오·”
아버지는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나를 보내주겠다는 것이냐?”
“제겐 더 이상 아버지와 검을 맞댈 이유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 여기 더 계실 이유도 없지 않으십니까? 아버지는 절 못 죽이십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사실·
아버지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듯 미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선택이 네게 득이 될지 아님 실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구나·”
“그건 아버지께서 판단하실 일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내가 판단할 일이지·
나 역시 아버지를 이용해 내 뜻대로 이용할까 했지만 관두려 한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아버지라 한들 성검의 힘으로도 굴복하지 못한 나를 아버지와 기사들이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그 간사한 악마 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길 바랐을지도 모르지·
잠시 감정이 앞서긴 했지만 놈의 뜻대로 따라줄 생각은 죽어도 없다·
아버지와 기사들은 곧 아무 말 없이 습지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기척이 어느 정도 멀리 사라진 후에야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사냥감이 아니셨나요?”
“알 바 아니잖아? 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지 그래?”
내 투박한 반응에도 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날 만나고 싶어 하는 자?”
“예· 가까운 곳에 계시니 저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제안이나 부탁이 아니다·
이것은 잠자코 따라오라는 일방적인 강요·
“날 데려가고 싶다면 적어도 날 만나고 싶다는 그 당돌한 자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려줘야 예의 아닌가?”
“····”
석상 같던 녀석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무겁게 내려앉은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전에 한 말씀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던지·”
“여긴 그대들의 땅이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던 신기가 순간 폭발하듯 치솟았다·
“이방인이면 이방인답게 행동하십시오· 제가 지금 굉장히 예의를 차린 상태로 말씀을 드리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타지에서 온 이방인인 주제에 기어오르지 말라는 건가?
지금 당장은 해할 생각이 없지만 언제 어디서 바뀔지 모르니 몸을 움츠리고 있으라는 속내가 그대로 엿보였다·
나는 녀석과 마찬가지로 턱을 치켜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은 켈리안 아쿠스 디오 나메리안 아지스 크루즈 델리오··· 님이십니다·”
이거 뭐 이름을 물어보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군·
그런 열 번 들어도 기억 못 할 이름 따위 알아봐야 딱히 얻을 것도 없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켈리안 어쩌고 하는 그 드래곤이 뭐 하는 놈이며 나를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이런 내 의중을 눈치챈 듯 나겔은 이름에 덧붙어 말을 이었다·
“저희의 수장이십니다·”
“···!”
나도 모르게 눈꺼풀을 위로 추어올렸다·
* * *
습지를 벗어나자 아렘에선 보이지 않던 가파른 돌산이 나타났다·
“키에에엑·”
정체 모를 생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덤·
인간의 발로 차마 서 있는 것조차 불가할 만큼 경사가 매우 급박했다·
“····”
일단 놈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긴 하지만 중간중간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하겠지만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경계하거나 혹은 비꼬거나·
내가 이곳에 온 것이 매우 탐탁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산 중턱쯤에 이르자 나겔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분과 대면하기에 앞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등만 보인 채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먼저 질문을 하기 전엔 절대 입을 열지 마시고 질문을 하시면 1초 이상 고민하지 말고 바로 답하되 반문은 안 됩니다· 그리고 절대 그분과 눈을 마주친 상태로 대화하지 마십시오· 이 점만 잘 지켜주신다면 그대의 안위는 보장될 것입니다·”
“지키지 않는다면?”
“뒷일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날 만나고 싶다 해서 데려올 땐 언제고 막상 와주니 까다로운 규율들을 열거하고 있다·
암만 고지식한 척해도 결국 이 데빌 드래곤들 눈에 난 하찮은 인간일 뿐이다 이건가?
다시 봐도 참 맘에 안 드는 종족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의미 있는 시간이 되시길····”
나겔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앞에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파직!
그러자 갑자기 공간 한쪽에서 균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곧 뿌리처럼 금이 번지며 끝내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부서진 공간 너머는 칠흑의 암흑으로 뒤덮여있었다·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공간·
태어나 생전 처음 와보는 장소였지만 어떤 곳인지는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아공간인가?”
[정확히는 드래곤의 아공간이지·]
케이람이 덧붙이듯 말했다·
나는 방황하던 눈을 이내 앞으로 고정한 뒤 주어진 길을 따라 묵묵히 나아갔다·
그렇게 백 보 정도 걸었을까?
저 앞에 왕좌로 보이는 거대한 의자와 함께 그 위에 앉은 낯선 누군가가 보였다·
두말할 것 없이 이 공간의 주인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환영한다 인계에서 온 인간이여!”
나를 데려온 나겔이나 불편한 시선을 보냈던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그는 호의적으로 날 반겨주었다·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나는 보란 듯이 눈을 마주쳤다·
“당신이 날 만나자고 했나?”
이 자가 바로 데빌 드래곤의 우두머리·
나로선 딱히 친대 할 이유도 없고 적대할 이유도 없는 존재다·
그래· 아직까진 말이지·
그가 나로부터 무얼 원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 즉시 방향이 바뀔 수 있다·
“몇백 년 만에 만나는 인간이지 모르겠군· 한데 조금 이상하구나· 왜 네 몸에서 동족의 냄새가 나는 거지?”
동족의 냄새·
그건 데빌 드래곤을 포함한 드래곤 종족을 의미했다·
“너 설마 드래곤의 피와 살을 섭취하기라도 한 것이냐?”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
반문하지 말라는 나겔의 경고를 또다시 무시한 채 나는 눈을 깔아 내리며 물었다·
켈리안은 그런 내 눈을 꽤 길게 쳐다보는가 싶더니
“쿠하하하하!”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나겔로부터 경고를 들었을 터인데 말하는 것이 참 당돌하기 그지없구나· 목숨을 뭐 인계에 두고 오기라도 한 것이냐?”
나름 경고와 협박을 섞은 언행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뭐지?
이런 놈이 정말 데빌 드래곤의 우두머리라고?
본연의 모습을 숨긴 건지 아님 원래 이런 건진 모르겠지만
전생과 현생을 구르고 굴러 다져진 내 감각이 말해주길 이자는 절대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차라리 날 여기 데려온 그 나겔이란 놈이 더 위험하지·
“그래도 날 웃겨줬으니 방금의 결례는 용서해주도록 하겠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누가 보면 무슨 큰 자비라도 베풀어주는 줄 알겠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얼마 전에 마왕성에서 마왕과 승부를 내지 못할 정도로 격전을 벌였다고 들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마계의 최강자와 대등하게 싸웠다니 나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구나· 분명 내가 아는 인간은 힘이라곤 마수에도 못 미칠 정도로 하등한 종족이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날 불렀다는 건가? 당신이 직접 확인할 생각으로?”
“착각이 심하구나· 나는 데빌 드래곤의 우두머리다· 너희 같은 피조물이 아닌 신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계승체인 내가 너와 힘을 겨룰 것이라 생각했느냐? 지능 수준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하로구나!”
대화가 아닌 나를 향한 질 낮은 조롱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
대체 뭐지?
이건 예상보다 한참 못 미치는 밑바닥을 웃돌 정도의 수준이다·
이런 격 떨어지는 놈이 우두머리라는 것도 웃기지만 이런 놈을 우두머리랍시고 내게 지켜야 할 규칙을 잔뜩 열거했던 그 나겔이란 드래곤이 새삼 더 웃겼다·
이놈들은 진짜 무슨 생각으로 날····
속으로 어이없단 생각을 반복하던 와중
일련의 기운을 감지한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내 바로 등 뒤 내가 걸어온 길·
나를 지켜보는 듯한 무언의 시선이 느껴진다·
“지금 내 앞에서 등을 돌린 것이냐? 정녕 여기서 살아남을 생각이 없나 보군·”
저 되도 않는 놈이 뭐라 떠들든 말든 이미 내 신경에선 벗어난 지 오래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고선 이 어두운 공간을 잠식한 낯선 기운의 본질을 느꼈다·
그러고 머지않아 눈을 떴을 땐
나는 비로소 이 공간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뭔가 재미 좀 느낄까 싶어 한 번 불러봤더니만 역시 인간은 인간이구나· 같이 있을수록 내 격만 떨어지는 법이지· 그만 보내줄 터이니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거라·”
“야·”
놈은 잘못 들었다 생각했는지 3초 정도 침묵했다·
“지 지금 뭐라 했느냐?”
“같잖은 연기 그만하고 네 진짜 우두머리 불러· 더 역겨워서 못 들어주겠으니까·”
“기 기어이 머리가 돌았구나! 감히 이 지고한 켈리안님께 그런 망언을···!”
“네놈 머리라도 베어야 나타나려나?”
나는 곧바로 케이람을 고쳐 쥐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화들짝 놀란 녀석은 바로 사색에 찬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잠깐 기다려! 난 단지···!”
“거기까지·”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이 왔음을 느낀 순간 나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마왕과 호각을 이루었단 말이 과장된 소문은 아니었나 보군·”
뒤쪽을 향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듯 들려왔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인간·”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웅장한 신기를 뿜으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바로 데빌 드래곤의 수장· 나겔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