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마왕의 본성 (1)
“으윽·”
정신을 차린 아스카론이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는 곧 자신의 몸이 무언가에 구속되어 있단 것을 눈치채고선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드신 모양이네요·”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간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머리 위로 무(無)의 구체를 날렸던 바로 그 인간이었다·
아스카론은 황급히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구 구원의 속박?”
투명한 마법진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수십 가닥의 빛의 사슬이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의 무리 역시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루나브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전 무의 구체라는 어둠 속성 마법을 보여준 데 이어 이번엔 빛의 마법이라니?
이 인간은 속성 수치라는 개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인가?
혼란에 휩싸인 그의 시야에 곧 베스티와 로저스가 들어왔다·
둘은 루나브로부터 다섯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아스카론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군· 당신이 바로 그 마왕성에 드나든다는 인간이구려·”
“모르는 사이 벌써 유명인사가 된 모양이네요?”
루나브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가 다가와 부릅뜬 눈으로 그를 내려보며 말했다·
“제대로 된 설명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아스카론·”
아스카론은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내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혹 조금 전 나는 베스티의 저 펜던트를 파괴하려 했습니까?”
“펜던트를 파괴하려 했다기보단 그 착용자를 파괴하려 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루나브는 세상 무덤덤한 얼굴로 답을 해주었다·
아스카론은 후회막심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저런 펜던트가 베스티에게 있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마왕성에 웬 정체 모를 인간이 드나든다는 것만 알았지·”
로저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 알고 있나 해서 묻는 거지만 최근 우리가 아닌 마왕을 반대하는 분파 세력 중 한 곳에서 인간과 접촉했었단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로저스는 펄쩍 뛰며 반문했다·
“몰랐던 모양이군· 최근 ‘데모스 파’에서 다른 분파 세력과 아예 연락을 끊는 데 이어 인간과 함께 다니고 있단 소문이 나돌고 있었소· 그 소문에 대한 진위를 판별하던 중에 그 인간을 만나게 된 겁니다·”
“어떤 인간을 말하는 거죠?”
“이름은 나도 모릅니다· 로브를 둘러쓰고 있어 전신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금발 머리카락에 허리엔 이상한 기운의 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근거지를 찾아온 것도 모자라 뜬금없이 베스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이에 베스티가 몸을 움찔했다·
단서라곤 금발 머리카락에 이상한 기운의 검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인간이 누구인지 루나브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다짜고짜 말하길 내 딸이 위험하다면서 구해야 하지 않겠냐 하더군요· 그러면서 펜던트에 관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인간과 눈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두통이 오고 정신이 멍해지더군요·”
“제가 펜던트에 처음 정신을 현혹당했을 때와 비슷해요·”
베스티는 자신과 유사한 증상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튼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단 게 확실합니다· 평소의 나라면 행동을 하기에 앞서 사실에 대한 진위부터 조사했겠지요· 하지만 난 무리를 이끌고 바로 마왕성으로 향했습니다· 아마 다른 건 몰라도 내 딸만은 살려야 한단 마음이 강했던 것 같군요·”
아스카론은 순간 베스티와 눈을 마주쳤지만 바로 시선을 거뒀다·
“펜던트를 파괴하려 했던 것까진 진심이었습니다· 허나 마력이 발현한 순간부터 다시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건 상관없이 오직 펜던트만 눈에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되더군요·”
아스카론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때의 아찔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아마 말리지 않았다면 억지로 떼려 했을 겁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그의 시선은 다시금 베스티에게 향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구나· 베스티····”
감정이 복받친 듯 사과를 받은 베스티의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쳤다·
“아버지도 현혹의 힘에 당하셨던 거잖아요·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이에요·”
베스티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며 부정했지만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는지 못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혼자 있고 싶네요·”
그러곤 호숫가를 향해 홀로 걸음을 옮겼다·
“로저스님!”
그 순간 로저스가 요청했던 마왕성의 지원군이 현장에 도착했다·
지원군과 베스티를 번갈아 보던 로저스는 이내 루나브에게 부탁했다·
“염치없지만 루나브님께서 베스티님을 모시고 성으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사후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루나브는 무리 없이 바로 승낙해주었다·
그렇게 로저스와 지원군들이 사후처리를 진행하는 동안
루나브는 호숫가에 홀로 멍하니 서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베스티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과 로저스가 하는 대화를 다른 방에서 엿들었어요· 허락도 없이 몰래 들어서 미안해요·”
루나브는 대화를 엿들은 것에 관해 사과했지만 베스티는 오히려 놀란 반응을 보였다·
“로저스의 결계를 뚫고 저희의 대화를 들었단 말인가요?”
“네·”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듯 루나브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 아스카론의 마력을 손쉽게 흡수하던 것도 그렇고 새삼 그녀가 가진 능력에 베스티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정말 대단하네요· 루나브가 아니었으면 전 지금 살아있는 것조차 불가능했을지 몰라요· 오히려 제가 감사를 해야겠네요·”
그러면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 아스카론이란 분을 아버지라고 하시던데····”
“···!”
“아버지와는 정 반대 길을 걷고 계셨었나 봐요?”
다소 민감한 질문이었지만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루나브의 성격상 그냥 지나가진 않았다·
“처음부터 반대하셨던 건 아니에요· 아버지는 제가 마왕 아니 벨카리온을 변화시켰을 때 가장 기뻐했던 마족이셨으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베스티는 곧 담아두었던 속 이야기를 꺼냈다·
“인계 상황이 어떤지 저는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마계는 굉장히 잔혹한 땅이에요· 살아남기 위해선 오로지 힘이 전부이며 힘이 없는 마족은 살아날 수 없어 도태되고 마는 잔인한 땅이죠·”
이러한 이치는 사실 인계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전 그래서 생각했어요· 힘이 전부인 이 마계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마왕이 마계를 위해 힘을 쓰면 좋지 않을까? 분명 힘이 없는 마족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평화로운 땅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실제로 벨카리온은 변했고 그가 변함에 따라 마계는 예전보다 한층 더 살기 좋은 땅이 되었죠·”
베스티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평화로운 시기의 마계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변한 마왕의 모습을 아버지께선 반대하셨어요· 더불어 제게도 마왕성에서 빨리 나오라며 닦달하셨죠· 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지금만큼 마계가 평화로웠던 적이 없는데 아버지께선 무슨 이유로 반대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할아버지랑 의견이 안 맞아서 계속 싸우고 있거든요·”
루나브는 자신도 비슷한 처지라며 그녀를 위로하였다·
힘겹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베스티는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이에 그녀에 관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루나브는 어쩜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거죠?”
“제가 강한 이유 말인가요?”
평소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루나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로저스가 그랬거든요· 인간은 발전 가능성이 가장 뛰어난 종족이라고· 제 아버지도 마력 운용에 관해서 명망 있는 마족이신데 그분을 그렇게 손쉽게 제압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제가 그 강함을 따라갈 순 없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힘을 길러오신 건지 제게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루나브는 잠깐 고민하다가도 바로 답을 내었다·
“그냥 간절히 바라던 사람의 뒤를 계속 쫓았다고 할까요?”
“···그게 다예요?”
“네· 그 사람의 곁에 있고 싶고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단 마음으로 쭉 나아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밖엔 딱히 드릴 말이 없네요·”
베스티는 뭔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루나브의 답은 간단했지만 그 안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뒤를 계속 쫓는 것·
그것은 여태껏 본인이 계속해오던 일이 아니던가?
“저를 어떻게 보신 건진 모르겠지만 제 눈엔 베스티가 더 대단하고 강해 보여요·”
“어 어째서요?”
“적어도 베스티는 간절히 바라는 그 남자가 베스티를 봐주고 있잖아요· 전 아직 멀었거든요·”
루나브는 돌연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며 베스티가 바라보고 있던 수평선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호수 앞에서 짧게 회포를 나눈 두 여인은 이내 마왕의 무리와 함께 성으로 올랐다·
* * *
“오늘 일을 마왕님께 보고하진 않겠습니다· 우리는 물론 그쪽 세력에서도 오늘 일이 언급되는 일은 기필코 없어야 할 겁니다·”
“마왕에게 비밀로 할 생각입니까?”
“마왕님이 아셔서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요·”
사후처리를 자청한 로저스는 아스카론으로부터 큰 보상이나 사과 없이 그저 입단속만 잘해줄 것만 요구했다·
“내 이리된 거 하나 묻겠습니다· 로저스 그대는 바뀌어버린 지금의 마왕이 진정 우리 마계를 위해 더 좋다고 생각합니까?”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엔 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로저스는 그대로 몸을 돌리려나 싶다가도 다시 얼굴만 돌리며 말했다·
“지금의 평화는 마왕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베스티님께서 만드신 거죠· 그 사실을 당신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스카론?”
“당장이야 좋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 평화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아스카론은 눈을 세우며 그동안 속에 담아내고 있던 본심을 드러냈다·
“우리 마족은 이 마계라고 하는 각박한 땅에서 수 천 년을 생존해 왔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게 바로 우리 마족들이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었던 원천입니다! 마왕이란 존재도 결국 마계의 그런 법칙 속에서 나타난 존재라는 걸 로저스 그대도 잘 알지 않습니까?”
“····”
“평화로운 마계? 우리 마계에 평화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 마족들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기 위해선 포악하고 무자비한 그런 본성적인 마왕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로저스는 입을 다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로저스 그대도 언젠간 깨닫게 될 것이오· 진정 마계를 위해 필요한 마왕의 모습이란 무엇인지····”
로저스는 끝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이 평화로운 마계의 시대가 종식될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을·
한편 그 시간 마왕성 앞에선
“어디 갔다 왔나 봐 베스티?”
“베 벨카리온?”
미명의 호수에서 성으로 복귀한 베스티의 눈앞에 벨카리온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복귀한 탓에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빠 빨리 돌아왔네요?”
“뭐 그렇게 됐어· 근데 단체로 어디 갔다 온 거야? 로저스도 안 보이고?”
“그 그게 그러니까····”
베스티를 포함해 그들을 호위했던 다른 마족들도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왜 말을 못 하고 있어? 직접 말하기 힘들어? 그럼 다른 쪽한테 물어봐야 하나?”
벨카리온의 눈은 곧 루나브에게 향했다·
“그럼 네가 말해주라· 베스티랑 어디 갔다 왔어?”
“선배는 어딨나요?”
허나 돌아온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이었다·
“선배는 어디 두고 왜 혼자 돌아오신 거죠?”
“내가 지금 먼저 물었잖아· 어디 갔다 왔냐고····”
“····”
루나브는 먼저 답하기 전엔 답하지 않겠다는 듯 마왕을 향해 눈을 날카롭게 세웠다·
“니들 말이야· 아무래도 뭔가를 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잠깐만요 벨카리온! 내가 설명할게요!”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베스티가 급히 만류했지만
“더 반문하지 말고 답해라· 죽기 싫으면!”
벨카리온의 눈은 이미 분노와 살기로 잠식되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