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아카데미로 (1)
저택 5층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은색의 방문·
건장한 체격의 저택 제복을 입은 한 남성이 문 앞으로 찾아왔다·
-똑똑
“들어오시죠·”
담당 시종들도 찾아오지 않을 늦은 시간이었지만 방의 주인은 출입을 허가했다·
방의 주인을 마주한 순간 남성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엔 의자에 앉아 여유로운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에쉘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씀하셨던 둘째 아가씨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에쉘은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덤덤하게 물었다·
“어디에 있던가요?”
“대륙 북쪽 화이트 엘프의 영지인 ‘프루이나’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습니다·”
“프루이나라···· 외부인이라면 극도로 혐오하는 종족들과 함께 있었다니 역시 그녀의 친화력은 알아줘야 할 것 같군요·”
책을 덮은 에쉘은 창문에 떠오른 달빛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쭉 지켜보다가 제국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면 그 때 한 번 더 알려주시죠·”
“알겠습니다·”
그의 눈치를 보던 남성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평소와 다르게 에쉘 님의 얼굴이 굉장히 밝아 보이셔서 그렇습니다· 동생분과의 만남이 흥미롭기라도 하셨습니까?”
동생을 언급하자 에쉘의 미소는 곧 웃음으로 번졌다·
“하하하· 흥미롭다라···· 뭐 경우에 따라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제대로 잘못 보셨습니다 켈린· 전 지금 기분이 매우 안 좋거든요····”
반원을 그리는 눈썹과 직선으로 굳어진 입술·
불과 방금 전 시안이 언급되었을 때의 모습과는 상반된 얼굴이었다·
“에쉘 님의 속을 헤아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남성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내 속을 감추는 것조차 이리 어려운 마당에 다른 사람의 속을 아는 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이제 막 젖비린내를 벗어난 소년이라 할지라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다·
에쉘은 불과 몇 시간 전 시안과의 만남이 짜증날 만큼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혹 그 시안이라는 동생분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별거 없었습니다· 그저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덕담 몇 마디를 전해 줬을 뿐이죠· 헌데··· 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요?”
어느덧 눈빛마저 굳어져버린 안면엔 부정적인 감정이 덕지덕지 서려있었다·
“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군요····”
“오 오랜만의 만남이시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전 그 녀석과의 교류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한 건 사실상 오늘이 처음입니다·”
시안과 에쉘의 나이 차는 무려 일곱·
그동안 에쉘은 시안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어떤 여지도 없었으며 철저하게 필요성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상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요? 마치 전생의 원수라도 본 느낌? 그 눈빛은 마치 절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놈 머릿속엔 저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을 텐데 말이죠····”
잔혹한 살기 그 자체·
그 당시 시안의 눈은 인간이 아닌 마족의 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여러모로 참 신경 쓰이는 동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여 엇나가지 않도록 잘 봐둬야 할 것 같군요·”
남성은 에쉘의 말을 바로 알아챘다·
“···사람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에쉘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용무를 끝낸 남성은 곧장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에쉘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한 개 뜨지 않은 깜깜한 장막과 그 사이에 낀 희미한 안개·
환하게 뜬 달빛마저 가리는 그 기이한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것만 같았다·
* * *
창세력 986년 2월 18일·
저택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새벽·
마당에는 출발준비를 마친 마차와 수호기사들이 미리 대기한 상태였다·
“후····” 아직은 쌀쌀한 새벽 공기에 입김이 절로 나온다·
이틀 전 크란츠의 출발일과 비교되는 황량한 광경·
마부와 수호기사들을 제외한 저택의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정오쯤에 출발하는 줄 알고 있을 터·
크란츠마냥 어쭙잖은 관심이나 받으면서 떠나고 싶진 않았기에 일부러 시간을 속여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나와 홀로 떠나려고 한 것이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용케 나왔네 에밀리···?”
마차 앞에 선 에밀리는 쌍심지를 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양 볼에 가득 담긴 불만 덩어리는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진짜 실망이에요 도련님····”
“말했잖아· 애초에 아카데미에는 개인 시종들을 데려갈 수 없다고· 이건 내가 안 데려가는 게 아니라 못 데려가는 거라니까?”
“그럼 처음부터 말해주셨으면 좋잖아요! 왜 하필 알려줘도 전날에 알려주신 거예요?!”
네 히스테리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면 이해해 주려나?
솔직히 저택에 오자마자 말하려 했는데 예기치 못한 엿 같은 만남으로 인해 그만 까먹어 버렸다·
개인 시종들을 데려갈 수 없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말이다·
아카데미 법률상 시종의 출입은 원칙적으론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원칙을 뛰어넘는 꼼수는 어디든 존재하기 마련·
만약 동행인의 신분이 시종이 아닌 수호기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국뿐만이 아닌 대륙 각지의 귀족들이 모이는 만큼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개인의 신변 보호만큼은 아카데미에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에 귀족들은 개인 시종들을 수호기사로 위장시켜 입장시키는 꼼수를 사용한다·
이 루트를 사용하면 어렵지 않게 시종들을 들일 수 있으며 실제로 빈번하게 이용되는 방식이었다·
에밀리 역시 그런 꼼수를 쓰면 들여올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아카데미란 마수가 우글거리는 전선보다도 더 지독하고 추악한 장소일지 모르니·
“그래도 너에 대해선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없었으면 난 아마 이 저택에서 버티지 못했을 거야·”
“사탕발림 말은 됐어요· 가서 건강히 잘 지내기나 하세요·”
에밀리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지만 붉어진 얼굴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머니라 하긴 그렇고 좀 모자라지만 착한 누나 정도?
전생에서나 지금에서나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시녀 그 이상의 존재였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지금 아카데미로 떠나면 웬만해서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 다시 볼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건강히 잘 있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 간다 에밀리· 사고치지 말고 잘 있어!”
“도련님도 가서 왕따 당하지 마시고요!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 같은 거 걸려서 자살하고 그러시면 안 돼요!”
“····”
역시 내 시녀답네·
그나마 남아있던 잔정도 싹 사라지게 만드는 아주 기똥찬 시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더 이상의 미련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이랴!”
마부의 힘찬 고삐질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으며 그 뒤로 수호기사들이 따랐다·
목적지는 로얄 아카데미가 위치한 제국 동남부 도시 루웬·
서부 경계인 벨리아스로부터 완전 끝자락에 있는 도시인만큼 사실상 제국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는 셈이었다·
빠듯한 시간이기에 입학식에 늦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가야 할 것이다·
뭐 사실 늦어도 상관은 없지·
내가 우등생 노릇이나 하려고 가는 것도 아니잖아?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타이틀과는 별개로 난 그런 교육들을 이미 예전에 다 마스터한 사람이다·
세상을 살면서 복습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지만 내가 치매노인도 아니고서야 구구단 수준의 교육들을 복습할 필요가 있는가?
아 물론 내 기준에서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구구단 수준의 교육들이 행해진다는 건 아니다·
난 지금 배움이 아닌 어디까지나 나만의 목적을 위해서 아카데미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최대한 남의 눈에 뜨지 않으면서 내 할 일만 하면 되겠다만···
어쩌면 전선에서의 생활보다 더 고단할 지도 모르겠군·
-두구두구
어느덧 영지를 벗어나 광활한 평야 위를 달리고 있는 마차·
그 주위에 정확히 여섯 명의 수호기사들이 마차를 보위하고 있다·
흠····
이거 왠지 시작도 전에 피부터 봐야 할지 싶다·
* * *
뉘엿뉘엿 서쪽하늘로 접어드는 해·
쉴 새 없이 달리던 발굽소리가 멈추자 오침을 취하던 내 눈도 자연스레 뜨였다·
청승맞은 하품을 하던 도중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시안 도련님· 오늘은 이만 여기서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어디쯤 왔어?”
“중부도시 ‘사페른’ 인근입니다· 아마 내일 오전쯤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거짓말이다·
사페른 인근에 이렇게 지독한 풀내음이 나는 숲은 없다·
못해도 하루는 더 가야 한다·
“일단 알겠어· 준비 다 되면 불러줘·”
“알겠습니다 도련님·”
점점 멀어지는 기사의 발소리·
그와 동시에 내 품속에서 케이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알고 있는 거지?]
“당연하지· 출발하기 전부터 알아챘어·”
[넌 무슨 벌써부터 사방에 적을 만들고 다니는 거니? 그렇게 살다간 너 제명에 못 살고 또 요절하는 수가 있다?]
“천재단명도 한 번이면 족해· 애초에 암살자가 적을 안 달고 사는 게 이상한 거잖아?”
그저 살기 위해서 모조리 죽일 뿐이지·
뭐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빨리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무가 적당히 드리워진 것도 아니고 누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런 숲 골짜기에서 야영을 한다니·
뻔하다 못해 뻔뻔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뚜벅뚜벅
잠시 후 문 너머로에서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정확히 문 앞에서 멈췄으며 어디론가 이동하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중 나온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기사들은 지금 나를 포위한 것이다·
“시안 도련님 그만 나오셔도 좋습니다·”
나오라고 하시니 나가 드려야죠·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망가지 않도록 내 주변을 둘러싼 6명의 기사들·
저마다 서로 다른 표정과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뭔가 애처로움이 느껴진다는 것·
같지도 않은 것들이 지금 나를 연민하는 건가?
일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맑은 산골짜기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 좋네? 사페른 근처에 이런 숲이 있었나?”
기사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던졌다·
“누구 사주야···?”
일부 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의 상태를 유지했다·
“단체로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됐어? 공자가 말하는데 대꾸도 안하네?”
“피식····”
내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3시 방향·
덥수룩한 장발과 눈 밑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 기사가 방금 내 말에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웃어?
심기가 아주 살짝 불편해지려는 걸 간신히 눌렀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시선을 돌리던 와중 정면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니들 감정 따위를 물은 기억은 없는데?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잖아?”
“그래도 마지막 예의를 갖추어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눈만 감고 계시면 조용히 잠에 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건 뭐 개 같잖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어?
그래 시키면 따라야하는 꼭두각시인 니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만 반대로 말하면 그런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죄가 될 수 있는 거다·
하물며 재수가 없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는 거지·
근데 일단 내가 물은 말에 대답은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질문만 네 번 한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사주한 게 누구야?”
대답은 애먼 곳에서 나왔다·
“곧 죽을 분이 아실 필욘 없습니다요····”
아 진짜 뚜껑 열리게 만드네·
방금 전 내 말에 비웃었던 검은 사마귀의 기사가 또 한 번 토를 달았다·
이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내 심기도 기어코 끊어지고 말았다·
-서걱
1초도 안 되는 시간과 다섯 보의 거리·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내 얼굴에 붉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딱 사람 머리 하나 떨구기 좋은 시간 속에서 큼지막한 머리 하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
순식간에 창백해진 기사들의 얼굴이 참으로 볼 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