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마왕의 적 (3)
“저희는 마왕의 적입니다!”
“마왕의 적?”
“예! 과거의 본성을 잃고 변해버린 마왕을 따르지 않는 일종의 반대 세력을 뜻합니다!”
추궁을 위해 살려뒀던 마족이 말하길 자신들은 이른바 마왕의 적이라고 하는 반대 무리라고 소개했다·
처음 들었을 땐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변해버린 마왕을 따르지 않아?
그럼 변하기 이전의 마왕은 따른다는 말인가?
덩달아 나를 왜 쫓아 왔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거기에 대해 답하길
“최근 마왕성에 인간이 드나들고 있다는 소문이 저희 쪽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 마왕과 인간으로 추정되는 마족이 여기 ‘아렘’에 왔단 정보가 입수되었고 아무래도 혼자 있는 마왕을 노리는 것보단 뭣도 모르는 인간을 노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해서 쫓아온 것입니다····”
실로 솔직한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기야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정보를 캐내야 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나를 선택하겠지·
마왕의 위용에 대해선 나보다 이들이 더 잘 알 테니·
“그 그리고 저흰 아직 말단이라 잘 모르긴 합니다만····”
눈치를 보던 마족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아닌 다른 반대파 무리에서도 인간들과 접촉하고 있단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인간과의 접촉?”
눈빛이 절로 세워졌다·
“예! ‘데모스 파’라고 이곳 아렘을 근거지로 삼는 분파 무리가 있는데 요즘 들어 저희 쪽과 정보 공유도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일각에선 인간과 접촉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마족은 아예 같이 움직이는 것까지 봤다고····”
확신이 아닌 소문·
허나 소문이란 건 본디 아무런 근거 없이 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고 보이는 것이 있었기에 생겨났겠지·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마왕과 헤어지고 딱 한 시간 뒤·
헤어진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와 다시 만났다·
“야 혼자 움직이는 건 좋은데 어디서 만날지 말은 해야 할 거 아니냐? 내가 너 기다린다고 한 시간 동안 여기서 쭉 짱박혀 있었다고!”
거짓말을 할 거면 좀 그럴듯하게 꾸몄으면 한다·
일단은 내색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마족의 목을 그에게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목은 마왕의 발밑에서 멈췄다·
“뭐냐?”
“당신의 적이라고 자칭하는 놈들의 목인데 혹시 아는 얼굴인가 해서····”
“네가 죽인 거냐?”
“정당방위였을 뿐이야·”
마왕은 날 선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다가도 목에 집중했다·
“당신도 눈치채고 있었을 거라 보는데? 이 주거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릴 뒤따르던 무리가 있었다는 걸·”
내 시선은 자연스레 그의 주먹으로 향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핏자국들이 듬성듬성 묻어있다·
한 시간 동안 짱박혀 있었다는 마족 손이 저렇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이다·
“내 적이라 했다고?”
마왕의 눈이 다시 내게 향했다·
“내가 하나 말해둘 게 있는데 이 마계에서 나를 적이라고 부를 마족들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적이라고 부를 마족은 없어· 그러니까····”
그는 뒷말을 살짝 뜸 들였다·
“내 동족들한테 함부로 검 휘두르지 마라····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준다·”
성에서 보았던 그의 살기 짙은 진면이 바람 불 듯 내 앞에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추종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전부 본인의 휘하 아래 있는 동족들이라 이건가?
“참고는 해두도록 하지·”
당연히 온전히 따를 것이라 장담은 못 한다·
마왕은 다시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잘됐네· 귀찮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따라와·”
그러곤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눈으로 등 뒤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벌컥
거침없는 손길로 문을 확 열어젖힌 순간 나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문 안에 찌들어있던 고약한 피 냄새가 확 몰려든 것이다·
오래된 냄새는 아니었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
퍼진지 얼마 안 된 냄새다·
그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쭉 걸어가니 피에 범벅된 채 널브러진 마족의 시체들이 나타났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내가 한 거 아니다?”
설명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시체들은 죄다 검에 베이기라도 한 듯 단면이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그가 죽인 흔적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단은 계속 그를 따라서 공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여태 풍겨왔던 피 냄새가 이곳에 들어선 순간 가장 강렬하게 진동했다·
일단 당장 보이는 건 탁상에 엎어진 잘린 시체와 그 아래로 나뒹구는 이름 모를 마족의 목이었다·
“네가 가져온 그 목의 수장이 아마 이놈일 거야· 이름이 데모스였던가? 나를 반대하는 분파 패거리들의 수장 중 한 명이지· 선을 넘으면 처리할까 싶어 벼르던 놈이었는데 누가 벌써 선수를 쳐버렸네?”
그 마족 놈이 말했던 분파 무리의 수장이었다·
나는 곧바로 시체에게 다가가 잘린 단면을 먼저 확인해보았다·
기분을 절로 잡치게 하는 익숙한 냄새가 내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누구의 소행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이건 성검의 흔적이다·
“어째 누가 그랬는지 아는 눈치다 너?”
“당신이 왜 그 여자를 그렇게 믿는지 새삼 알 것 같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시체들의 상태를 봤을 때 일을 저지르고 도망친 당사자는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이 주거지에 있을지도 모르지·
밖으로 나온 난 눈을 감고 정신집중에 돌입했다·
“암무 4식: 살기 감지·”
인계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탓인지 감지가 상대적으로 편했다·
이 불편한 공기 속에서 분명하게 다른 기운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니·
검은 돌밭에서 하얀 돌멩이를 찾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다시 눈을 뜬 순간
-휘익!
나는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둘에서 최대 열·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있던 기운들이 내가 움직인 순간 일제히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전부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마족이 아닌 마수 대가리라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나를 유인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놈을 지금이라도 붙잡아 추궁할 수 있지만
놈들이 나를 어디까지 유인하는지 알아보고자 일단은 따라가기로 했다·
주거지를 벗어난 이후에도 계속 쫓아가니 곧 축축한 기운이 몰려드는 습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수 몇 마리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건만 어째 조용하다·
허나 마수를 대신해 나를 반겨주기라도 하듯 곧 사방에서 로브를 두른 정체불명의 무리가 나타났다·
당연하겠지만 마족은 아니다·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마나 구체를 쥐고 있다·
인간 기사·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선의 기사다·
내가 이 땅에 넘어와 찾아야 할 이들과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면서 가장 근거리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던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
마수를 상대하기 직전의 아주 비장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아마 다른 기사들도 전부 마찬가지겠지·
이들은 지금 나를 인간이 아닌 마수 그 이상의 불결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스릉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조용히 케이람만 꺼내 그들에게 겨누었다·
-탓!
마침내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진을 펼치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솟아올라라!”
마나를 발현한 기사들이 주문을 외치자 잔잔히 흐르던 습지의 물이 갑자기 튀어 올라 나를 덮쳤다·
내 시야를 가리려는 의도였다·
나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물길을 갈랐다·
-슉!
그러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그 갈라진 물길 사이로 검날이 파고들었다·
이에 허리를 급히 뒤로 젖혀 검날을 회피했다·
기사들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벼락치듯 검과 함께 낙하했다·
-챙!
맞닿은 검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과연 전투 경험이라면 둘째라도 서러울 그야말로 최고의 기사들·
난 지금 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과 전투를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그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나를 위태롭게 만들겠지·
그 정도로 능한 기사들이란 것엔 나도 인정을 하지만····
그럼 뭐하겠는가?
지금은 본인들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꼭두각시 같은 인형에 불과한데·
나는 저들이 인계를 지키기 위해 오늘날까지 쌓아온 명성과 공적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더불어 저들을 죽이는데 어떠한 죄책감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달려 들었다· 그 순간
-후욱!
한 기사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선 묵직한 장검을 휘둘렀다·
-챙!
로브로 얼굴을 감싸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런 기사가 있었나 싶어 그의 검을 살폈고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
칼날 중심에 선명하게 새겨진 익숙한 인장·
이 검 내가 아는 검이다·
어렴풋이 아는 것도 아닌 주인이 누구인지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도 명확하게 아는 검이다·
이것은 인계에서 단 한 자루밖에 없는 진정한 수호자를 위한 검·
나는 물론 인계의 그 누구도 이 검을 휘두를 수 없으면 소유할 수 조차 없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대륙의 수호자·
베르트 공작가의 가주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검·
“····”
검의 주인은 당황함에 요동치는 내 눈을 덤덤하게 마주하며 로브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시체를 살핀 후 어딘가로 사라진 시안과 다르게
벨카리온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족의 시체들을 번갈아 보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눈을 감는다거나 한숨을 내쉬는 등·
좀처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얼굴이 아주 가관이군?”
“왜 또 나와서 지랄이실까?”
불현듯 머릿속에서 기이한 목소리가 들리자 벨카리온은 이를 갈며 화답했다·
“보기 안쓰러워서 하는 말이라네· 이성을 앞세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베스티만 너의 마족이고 여기 죽은 마족들은 너의 마족들이 아닌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선을 넘어도 이미 한참을 넘었어· 마족도 아닌 인계의 잡것들이 남의 영역에서 보란 듯이 설치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성을 운운하며 지켜만 볼 거지? 이것이 네가 원하고 그녀가 원했던 마왕의 모습인가?”
벨카리온은 입을 다물 뿐 목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져도 돼· 혹시 폭주할까 봐 두려운 건가? 자네를 말려줄 친구도 생겼는데 뭐가 문제야?”
“누굴 말하는 거지?”
“당연히 그 시안이란 친구 아니겠는가?”
벨카리온은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설마 그 나약한 종족들 속에서 그런 존재가 있을 줄 또 누가 알았겠는가? 나조차도 매우 경이로울 정도야· 이전 싸움에서 나를 꺼내주지 않은 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말이지!”
목소리는 마왕의 내면에 깃든 본성을 계속해서 간질였다·
“이 이상 참지 말게 벨카리온· 이제껏 너를 억누르던 억제를 풀고 본연의 모습을 끌어내게!”
“····”
“그럼· 자네는 바로 알게 될 걸세· 이 마계를 위해 필요한 마왕의 모습이 진정 무엇인지····”
목소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릿속에서 홀연히 떠나버렸다·
-쾅!
기어이 감정이 폭발한 벨카리온은 시체가 엎어진 탁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탁상은 큰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디·
벨카리온은 다시금 감정을 제어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