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마왕의 적 (1)
“윽!”
눈이 스르르 떠짐과 동시에 베스티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전엔 겪어본 적 없는 실로 기묘한 느낌의 두통·
마치 알 수 없는 미지의 기운이 뇌를 꾹꾹 찌르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정신을 제어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
베스티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마왕성이라는 익숙한 장소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마족 아니 인간 여인이 자신의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참 오래도 주무시네요·”
루나브는 숨을 헐떡이며 푸념하듯 말했다·
“베스티님!”
그나마 익숙한 얼굴인 로저스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머리가 좀 아프고 멍한 느낌이 있긴 한데 그것 빼곤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상황을 짧게나마 설명하려던 로저스는 이내 시선이 베스티의 목으로 향했다·
베스티 역시 덩달아 시선이 따라갔다·
벨카리온에게 받았던 펜던트가 그녀의 한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이 이게 왜?”
본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베스티는 의문을 표했다·
허나 어째서인지 손은 좀처럼 펜던트를 놓지 못했다·
마치 정신이 아닌 몸이 거부하는 것처럼·
그러자 잠시 숨을 고르던 루나브가 그녀의 손을 덜컥 붙잡았다·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만 말할게요· 당신이 마왕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마족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마왕이 언급된 순간 베스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벨카리온은 지금 어디 있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밖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 * *
사람은 살면서 접해본 적 없는 낯선 광경을 마주하다 보면 실로 본성적인 감정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마족이라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다·
두 손으로 입을 모으거나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거나 혹은 뿌리 깊은 대목처럼 굳건히 서 있긴 해도 눈동자만큼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등·
성의 마족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눈앞의 광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이게 마왕님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마왕님도 마왕님이지만 저 인간은 뭐야?”
“이거 인간에 대한 인식을 다시 정립해야겠군·”
마왕이 처음 힘을 발휘한 순간 성의 마족들은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매우 복잡했다·
한 번 폭주하면 물불 안 가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그의 성격상 마족도 아닌 고작 인간 한 명이 그 폭주를 진정시킬 수 있단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는 마계의 최강자·
지고의 존재라 불리는 신들조차 꺼리는 존재다·
그 마왕을 힘으로 막아야 한다?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쾅!
시안은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한 번에 휘두르며 땅이 갈라지는 주먹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돼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그의 마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뿐이던가?
투기가 솟은 마왕이 기어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오르자 이에 맞서려 듯 함께 날아올랐고
마족의 뛰어난 시력으로도 전부 캐치하지 못할 파상공세를 서로 전개해 나갔다·
그 광경은 실로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허나 마왕의 공세를 막는 인간의 경지가 암만 경이롭다 한들 상황이 심각하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 마왕님의 마기가 점점 더 차오르고 계신다!”
애초에 그의 분노와 마기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시작한 싸움이지만 전투가 지속되면서 분노는 둘째 치더라도 마기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상승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저 인간의 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증대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서로 계속 올라가다간 어느 경지까지 미치게 될지
그리고 그것의 여파가 잘못 퍼졌을 땐 얼마나 큰 피해로 이어지게 될지
관전자들로선 그 무엇하나 예측할 수 없었다·
“키하하하!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느끼는 감각이지? 정말 짜릿한걸!”
계속되는 전투에 희열을 느낀 벨카리온은 대놓고 웃음을 남발했다·
“인정하겠다 시안! 넌 지금껏 내가 싸워왔던 상대 중 가장 최고! 아니 그 이상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시안으로선 이미 전생에서부터 쭉 해온 생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그는 마계의 최강자·
생을 돌이켜 지금은 더 많은 힘을 축적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마왕은 아직도 얼굴을 일그러지게 할 만큼 굉장히 벅찬 상대였다·
애초에 상대하는 느낌 자체도 전생과는 확연히 달랐다·
전생의 마왕은 마치 본성을 잃고 힘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디까지 올라갈지 도저히 가늠이 할 수 없었다·
현생의 마왕은 본성을 철저히 제어한 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힘의 경지를 최상으로 끌어낼 것만 같았다·
즉 전생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힘을 발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
어쩌면 전생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시안은 이미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절대자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이제는 힘에 의해 누군가를 잃진 않을 거라고·
마왕이 이전보다 최상의 경지를 보여주려 한다면
자신 역시 이에 걸맞은 더 높은 경지의 힘을 끌어내면 그만이다·
그 다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케이람의 힘을 더 발현하려는 순간
“벨카리온!”
문득 저 아래서 마왕을 부르는 다부진 여인의 외침이 퍼졌다·
“···!”
그 외침을 들은 벨카리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베스티?!”
전투 의욕을 단번에 잃게 만드는 무척이나 맹한 표정이었다·
“당장 내려와요!”
연이은 외침에 벨카리온의 눈동자는 요동치듯 흔들렸다·
이윽고 쓴웃음과 함께 시안을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봐 시안·”
“···?”
“우리 잠깐만 쉬는 게 어때?”
시안은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둘은 곧 서로의 힘을 거둔 채 땅으로 안착했다·
벨카리온은 내려오자마자 바로 베스티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잠시 동안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펜던트는 아직 목에 걸려 있었다·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베스티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 다 들었어요 벨카리온· 당신 잘못 아니니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요·”
“응?”
벨카리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바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안해요· 벨카리온· 나 때문에 당신이 이런 고생을····”
그러자 나와의 전투로 치솟았던 마기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미안 베스티· 못난 나 때문에 네가 또 고생하네····”
벨카리온은 이내 소탈하게 웃다가도 베스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성의의 마족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베스티 그녀는 마왕 벨카리온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러기에 이 마계에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
그 생각은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아슬아슬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선배는 꽤 즐기고 있던 모양이네요?”
두 마족의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는 사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루나브가 다가왔다·
돌아본 시안은 깜짝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불과 조금 전과 비교해서 얼굴이 무척 수척해져 있던 것이다·
“저 마족 할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선배랑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한시라도 빨리 저 펜던트를 해제할 방법을 찾으라고·”
루나브는 늘 그렇듯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안 된다고 결론까지 지은 일· 머리 싸매서 고민해봐야 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단 저 베스티란 마족부터 깨우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래서 네 생명의 기운을 다 넘겨주기라도 했다는 거야?”
시안은 흥분한 나머지 루나브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루나브는 뭐가 문제냐며 무심한 시선으로 화답했다·
길게 볼 것 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펜던트에 현혹당한 베스티는 쓰러진 이후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수면 상태에 접어든 이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펜던트에게 생기를 흡수당하고 있었으며 이대로 가다간 영영 눈뜨지 못한 채 영면에 접어들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에 루나브는 베스티가 눈을 뜰 수 있도록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생기(生氣)를 베스티에게 전달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줘서 그녀를 깨우겠단 마음으로·
결국 베스티는 깨어났으며 바로 격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와 마왕을 진정시켰다·
“나 살리자고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선배도 절 살리기 위해 저 마왕이란 남자랑 싸운 거잖아요· 피차 똑같은 일 한 거 아닌가요?”
시안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루나브는 피식 웃다가도 바로 시안의 품에 안겼다·
“지금은 피곤하니까 그냥 잔소리 말고 받아주세요· 결과적으론 잘됐잖아요····”
시안은 뭐라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마족이나 인간이나 결국은 다 똑같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광경이로군요····”
그 모습을 중간에서 지켜본 로저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베스티는 루나브와 따로 자리를 가지고 싶단 의사를 표했다·
벨카리온은 이를 허락해 주었고 그렇게 그들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저를 위해 그리고 벨카리온을 그 남자를 위해 귀한 힘을 빌려주신 두 분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베스티는 손수 몸을 숙이며 루나브에게 감사를 표했다·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전체적으로 힘이 없고 두통이 남아있긴 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절대 안심할 순 없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생기는 계속해서 빠져나갈 테니····”
베스티는 다시금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 이 펜던트가 불순한 것임을 알면서도 전 차마 스스로 벗지 못하겠어요·”
마치 펜던트에 몸이 제대로 구속된 느낌이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참 염치없지만 전 살아야 해요· 저를 위해서가 아닌 벨카리온을 위해서요· 아직 그 남자에겐 본성을 제어할 힘이 부족해요· 그러니 제가 그의 옆엔 아직 제가····”
베스티는 순간적으로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른 감정을 추슬렀다·
“부럽네요·”
“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최강의 남자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 그거 제 바람이거든요·”
당황한 베스티는 눈을 끔뻑였다·
이에 루나브는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감사 인사만 하려고 저랑 따로 자리를 마련하시진 않았을 테죠? 하실 말씀이 뭔가요?”
“로저스에게 전부 들었어요· 이 펜던트의 주인은 벨카리온에게 인간을 향한 증오와 원망을 심어주어서 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의도를 가진 것 같다고·”
루나브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그 당사자들을 찾아 저를 이 펜던트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던데··· 혹시 그들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으셨나요?”
“인계에 있는 저희 쪽에서 알아보고 있긴 한데 단서가 워낙 없다 보니 아마 꽤 힘들어하고 있을 거예요·”
“그분들 전부 마계로 데려오세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루나브는 눈을 밝혔다·
“마계로 말인가요?”
“네· 서로가 가진 정보와 힘을 더한다면 분명 더 높은 효율을 낼 수 있겠죠· 벨카리온은 제가 설득할게요·”
맞는 말이긴 하나 루나브로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베스티의 제안은 마치 에쉘을 비롯한 베르트 공작의 잔당들이 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 생각이 맞다는 듯 베스티는 바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분명 마계에 있을 거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