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마녀를 찾아서 (3)
“그래서 결론이 뭔데?”
“저희의 힘으론 저 펜던트를 해제할 수 없어요· 도움이 못 돼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건 어차피 무의미한 일·
루나브는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마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시안은 옆에서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하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따지고 보면 너희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나름 도움을 주고 싶어 이렇게 와준 마당에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지·”
마왕은 예상과 다르게 쿨하게 반응하며 루나브를 다독여주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혹여 저희 쪽에서 마녀에 대한 단서를 찾았을지도 몰라요· 그렇게만 되면····”
“그만·”
그만이라는 말과 함께 루나브의 입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쨌든 지금은 안 된다는 거잖아· 구차하게 말 늘어놓지 마·”
입은 웃고 있지만 말보다 더 확실한 살기가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긴장과 두려움을 느낀 심장이 급격하게 요동쳤으며 입에선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야 시안·”
벨카리온은 그런 루나브를 지나쳐 시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잠깐 밖에서 나 좀 보자·” 시안은 별 대꾸 없이 그를 따라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두 남자가 밖으로 나간 순간 루나브는 여태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양손을 부르르 떨었다·
“어차피 당신들이 저 펜던트를 풀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로저스가 그녀에게 물 한 컵을 건네주었다·
“나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단 것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루나브는 컵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물을 들이마셨다·
“루나브님이라 하셨죠? 제가 급히 조언하건대 1초라도 빨리 저 펜던트를 해제할 방법을 찾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같이 온 저분과 함께 온전히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말이죠·”
그 말을 들은 루나브는 바로 깨달았다·
이 중년의 마족 신사는 지금 자신에게 조언이 아닌
경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 * *
문득 전생의 마왕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마왕의 사검(死劍)과 내 케이람의 영혼이 전력을 쏟아붓고 서로 소멸한 이후였기에
나름 처음으로 이루어진 온전한 둘만의 대화였었다·
(너흰 모르지? 내가 왜 관심도 없는 저 선을 넘어서 니들이랑 지랄 맞은 광란의 파티를 즐겨야 했는지?)
(이제 와서 알아야 하나?)
(생각보다 쿨하네? 너도 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이 있지 않아? 가족이라든지 친구라든지?)
그때는 솔직히 많이 놀랐다·
설마하니 저 악랄한 마왕의 입에서 가족이나 친구라는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
그때만큼은 아주 잠시 그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넌 우리 인간에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다· 그 살육에 이유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널 다르게 보진 않아·)
(킥킥! 그래 네 말이 맞네! 이제 와서 말을 늘어놔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 니들은 그냥 절대로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고· 난 이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내 아픔을 니들에게 똑같이 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왕이 말한 그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이란 게 무엇이었을까?
대체 우리가 뭘 건드렸기에 이런 끔찍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는가?
그 이유를 물을지 말지 몇 초 안 되는 시간 동안 입술이 수없이 움찔댔지만
난 결국 묻지 않았다·
(됐다 이제 그냥 죽여라· 그래도 마지막엔 즐거웠다· 네놈 손에 죽는 거면 그리 비참하진 않겠네·)
마왕은 사검(死劍)을 던진 채 순순히 목을 내어주었다·
이는 마치 자신의 마지막을 책임져 달라는 일종의 부탁처럼 보였다·
나는 그 뜻을 이뤄주기 위해 다시 부러진 케이람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으며 그렇게 천천히 마왕에게 다가갔지만
(수고했다 시안!)
당시엔 절대로 거스를 수 없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이 이상 너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다! 이 극악무도한 마족에 대한 심판은 내가 담당하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몸은 더 이상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왕과의 혈전으로 인해 체력이 바닥나긴 했어도 마지막을 일격 못 할만큼은 아니었다·
움직이긴커녕 부정의 한마디조차 던지지 못했지·
난 그렇게 마왕의 마지막 순간을 내가 아닌 성검의 주인에게 강탈당했다·
눈뜬 송장마냥 멍청하게·
(빛이 이끄는 곳에 진리가 있나니···!)
마왕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한 구원의 검이 마침내 마계 하늘에 도래하고
그 검을 멍하니 쳐다보던 난 마지막으로 마왕과 눈을 마주쳤다·
한심·
너도 결국은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빛·
난 그때의 그 생생한 감정을
생을 한번 건넌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피에 적셔진 것처럼 붉디붉은 마계의 하늘·
성 바로 앞 탁 트인 광야 위에서 마왕이 나를 보며 말했다·
“첫 만남 때 내가 물었었지? 날 본 적이 있냐고·”
그때 난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거든· 그 눈빛 자세 분위기까지· 누가 봐도 날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마치 일전에 어디선가 날 봤던 것처럼·”
“착각이야·”
“그래?”
마왕은 소탈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예전의 나였으면 아마 일말의 고민 없이 너희의 경계를 넘었을 거야· 협상?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말을 이어감에 따라 서서히 가라앉는 목소리·
덩달아 주변의 분위기 또한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대충 눈치챘지? 내가 뭐 때문에 너희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아까 너희가 봤던 베스티 때문이야· 펜던트에 현혹된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난 그 에쉘이란 놈을 찾았어야 했어·”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본성보단 항상 이성을 앞세워야 한다· 그래야지 내가 아닌 모두를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참 좋은 말이지? 베스티가 내게 해준 말이야· 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지금껏 본성이 아닌 이성을 앞세우며 나 자신을 고쳐왔어·”
그런 그녀가 지금 정신을 잃고 생사불분명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더 최악의 상황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근데 지금만큼은 좀 힘들 것 같다· 지금은 차마 내 본성을 억누를 수 없겠어·”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그의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과도 같은 모습·
지금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좀 억눌러줘야겠다· 이걸 지금 억누르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것 같거든? 우리 마계는 물론 너희 인계에도 말이야!”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선택지라곤 하나밖에 없고 거부권조차 없는 필연의 상황·
결국 어쩔 수 없다 이건가?
[내가 말했지? 굳이 재촉할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다시 나타난 케이람이 요염한 웃음을 내며 내 귀에 속삭였다·
딱히 더 할 말도 없다·
그냥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면 그만일 뿐·
-스릉
케이람을 꺼냄과 동시에 몸에서 검 끝에서 검은 안개가 분출되었다·
그 안개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나는 이내 마왕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암무 9식: 마검 발현·”
* * *
“7년 만이네요· 벨리아스로 돌아가는 게····”
“감회가 새로우시겠군요?”
“나보단 브라이언 당신이 더 새롭겠죠· 나야 7년 만이라지만 당신은 10년 가까이 못 갔던 거 아니에요? 부모님이 얼굴도 못 알아보시겠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이따금 편지는 했었는데 이 불효자식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브라이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한 심정을 표했다·
황녀의 명에 따라 베르트 공작가 소속의 시녀 에밀리를 벨리아스로 이송하는 마차 안·
실로 오랜만의 귀환임에도 에밀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도련님도 거기 계신 거겠죠?”
“그 그렇지 않겠습니까?”
“순방을 가면 가신다고 얘기라도 하시지 굳이 말 안 하고 가실 건 뭐람?”
브라이언은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에밀리님께서도 벨리아스에 부모님이 계신 겁니까?”
“없어요· 애초에 전 부모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고아니까·”
화들짝 놀란 브라이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뭘 놀래요 이제 와서?”
“저 전혀 몰랐습니다! 에밀리님께서 그런 사정이 있으실 줄은····”
그녀가 평소 시안에게 하던 짓을 봤을 땐 혹여 다른 귀족 가의 여식은 아닐지 생각했었던 브라이언이였기에 이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럼 베르트 가에는 어떻게?”
“그냥 뭐 우연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달까?”
에밀리는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며 대충 대답을 무마시켰다·
급격히 가라앉아버린 분위기·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면서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에밀리라는 분 혹시 마녀이신가요?’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 생각·
이전날 하스티아가 했던 질문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마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진 모르지만 언뜻 들어도 그렇게 좋은 어감이 들진 않았다·
인간이 아닌 화이트 엘프의 눈에는 뭔가 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내면에서 작게 피어난 호기심은 점점 빠르게 치솟기 시작했다·
“저 에밀리님?”
“왜요?”
“에밀리님은 혹시 마녀란 것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기어이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심장이 요동침과 더불어 식은땀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 위태롭게 맺혔다·
“····”
당황한 걸까? 아님 무심한 걸까?
에밀리는 속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브라이언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마녀요? 글쎄요? 난 처음 듣는 말인데요?”
이내 처음 듣는 말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그건 왜요? 누가 뭐 마녀란 사람을 찾는데요?”
“아 아닙니다! 별거 아니니 그냥 흘려 들으셔도 됩니다·”
“뭐에요? 싱겁게?”
에밀리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한 질문 했다고 생각한 브라이언은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딴생각 말고 그녀를 위한 호위나 잘하자고 생각했지만
“근데 브라이언·”
“예?”
“그 마녀란 말은 어디서 들었어요?”
순간 뒷골이 서늘해지고 싸한 기류가 감돌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에밀리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했으며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선 여태껏 접하지 못한 낯선 분위기와 기세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 그게 그러니까·”
뭐라 수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던 것도 잠시
-덜컹!
잘 가던 마차가 갑자기 크게 들썩였다·
“꺄악!”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에밀리를 브라이언이 잽싸게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딜 만져요 지금!?”
뭘 잘못 했는지 몰라 눈만 끔뻑이건 것도 잠시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브라이언은 바로 그녀를 놔주었다·
급하게 잡는다고 본의 아니게 에밀리의 엉덩이에 손을 대 버린 것이다·
수치심을 느낀 에밀리는 마차 구석에서 브라이언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 일단 앉아계십시오!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브라이언은 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금방 해결할 터이니 안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허나 언뜻 봐도 안에서 맘 편히 기다릴 상황은 아닌 듯했다·
마차로부터 정확히 20m 앞·
신원 미상의 무장한 용병들이 마차의 앞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