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접촉 (3)
“그거 아니 에쉘?”
가만히 앉아 입술을 쓰다듬던 하니엘이 붉은 하늘을 올려보며 물었다·
“사람은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존재할 때 비로소 삶의 가치가 실현되는 법이란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저 움직이는 송장과 다를 바가 없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에쉘은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 힘을 쓰면서 느꼈을 거다· 너의 진면이 아닌 가면을 보며 웃어주는 사람들 따윈 있어 봐야 외로울 뿐이라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기분이지·”
“어머니께서도 그러하셨습니까?”
하니엘은 대답 대신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인간은 나약하지· 나약하기에 항상 사랑과 보살핌받는 것을 갈구하는 거란다· 그런 지극히 본능적인 습성을 우린 따랐을 뿐인데 세상은 그런 우리를 모욕하고 멸시했지· 마녀라는 이름까지 붙이면서 말이야····”
순간 하니엘의 한쪽 눈동자에서 붉은 광채가 번쩍였다·
“이젠 정말 우리를 기억하는 이가 없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남아있더구나· 그분은 나를 보며 아주 명확하게 마녀라고 지칭하셨지·”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느끼셨습니까?”
“아니·”
하니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금빛 머릿결을 휘날리며 에쉘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마찬가지야·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마치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악녀로 취급하고 있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에쉘?”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의 확고한 대답에 그녀는 만족의 큰 웃음을 지었다·
“너도 내 피를 이어받았다면 그럴 수밖에 없어· 필요할 땐 피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을 때까지 쓰다가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던지겠지· 하지만 말이다 에쉘· 그게 삶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다· 인간의 주어진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실로 올바른 삶이라고 할 수 있어!”
하니엘은 하얗고 뽀얀 손길로 에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너를 이 세상에 낳고 신의 선택까지 받게 했으니! 너는 반드시 이 세계의 정점으로 군림해야 해! 네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리라는 것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단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내 삶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을 거야!”
어느덧 감정이 복받쳐 오른 손길은 에쉘의 얼굴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에쉘은 이를 거부하거나 뿌리치지 않았으며 그저 은은한 미소만 계속 유지했다·
“부디 내가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주렴· 아들아····”
“예· 어머니·”
에쉘은 부들부들 떠는 하니엘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
모자의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는 그 모습을 베르트 공작은 뒤에서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 * *
전선 내 진영 캠프·
베르트 공작의 흔적을 쫓기 위해 레메아 협곡으로 향하려던 순방단은 예기치 못한 존재를 맞닥트리고 말았다·
마족·
마족이다·
저것은 누가 봐도 틀림없는 마족이다·
혼란에 휩싸인 순방단은 뭐라 대처할 여지도 없이 머릿속에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단 한 명 루나브를 제외하고선·
‘마족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존재가 마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만 저 마족이 이곳에 왜 있는지를 알아야 할 터·
정체는 무엇인지 어떤 이유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는지 아직까진 무엇하나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너 이리 와 봐·”
‘대화가 가능하다?’
마족은 정확히 루나브를 지목하며 또박또박 언어를 구사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상호 간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일 터·
루나브는 차오른 긴장감을 침과 함께 삼킨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세상 대담한 물음에 순방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희 인간들에게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지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저 미지의 존재와 대화를 나누겠다는 것인가?
“루 루나브님! 지금 무슨 생각을?”
“어이 후배님! 제정신이야?”
주위의 격한 만류에도 루나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반쯤 내려앉은 눈으로 벨카리온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야·”
이에 벨카리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너보고 오라 했지 입을 열라고 했어?”
상당한 불쾌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대화의 주도권이 없음을 판단한 루나브는 바로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딜 가려고 루나브?!”
깜짝 놀란 아린이 팔을 붙잡으며 막았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 아시잖아요· 일단 저쪽도 원하는 게 있어서 온 것 같으니 요구에 적당히 응해주면 괜찮을 거예요·”
“널 어떻게 할 줄 알고?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잖아!”
“그럼 도망가면 되죠·”
실로 단호한 대답에 아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녀올게요·”
루나브는 그 말과 함께 무리를 벗어나 벨카리온에게 다가갔다·
“걱정 마· 여차하면 내가 녀석한테 달려들라니까·”
세트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듯 양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끽해야 스무 걸음은 될까 싶은 무척 짧은 거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무슨 살얼음판 걷는 것처럼 굉장히 불안했다·
루나브는 품속의 지닌 마서를 꽉 쥐며 나직이 속삭였다·
“거기 계시죠 레미하람님?”
“물론이지· 숙녀님·”
레미하람은 실체화하지 않고 루나브와 감응만 이어 나갔다·
“혹시 저 마족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확실한 건 아닌데 추측되는 건 하나 있어·”
말을 잇는 레미하람의 목소리에선 미약하지만 떨림이 일고 있었다·
“그럼 빠르게 계산 좀 해주세요· 지금 저 마족을 해치우기 위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저 마족을 해치우겠다고?”
레미하람은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딱 하나만 말해줄 게 숙녀님·”
“···?”
“그냥 틈이 보였다 싶으면 냅다 도망쳐· 저 마족은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실로 비관적인 대답이었다·
루나브는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으며 마침내 벨카리온과 두 발짝 거리에서 몸을 마주했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담대한 물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허나 벨카리온은 그저 루나브의 전신을 쭉 훑어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너 이름이 뭐야?”
의외로 이름을 먼저 물었다·
“루나브 레인리버라고 해요·”
“너 혹시 마녀냐?”
처음으로 듣는 낯선 호칭에 루나브는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닐 거예요· 적어도 제가 살면서 마녀라는 호칭으로는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거짓 없는 대답에 이번엔 벨카리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입고 있는 옷 벗어봐·”
느닷없는 황당한 요구에 루나브는 물론 둘을 지켜보던 순방단 전원의 눈이 번뜩 뜨였다·
“저런 미친놈이···!”
흥분을 참지 못한 세트가 기어이 달려들려고 나섰지만 루나브는 그런 세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만류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
“강제로 벗기시진 않는 걸 보면 그쪽도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벨카리온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에 루나브는 별다른 저항 없이 주섬주섬 겉옷부터 벗기 시작했다·
-스르륵
“더 벗을까요?”
벨카리온은 그녀가 벗은 겉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긴 뭐가 들은 거야?”
루나브는 직접 보여주려는 듯 로브 속에 품고 있던 마서를 꺼내 보였다·
“그렇게 재밌는 책은 아니에요·”
“계속 벗어·”
찾고 있는 물건이 아니었는지 그는 계속 벗을 것을 지시했다·
루나브는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옷을 벗었다·
그렇게 웃옷을 벗고 그다음 셔츠까지 벗으려는 순간
“잠깐·”
돌연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러곤 이번엔 물음 없이 그녀가 벗은 웃옷을 집어 올렸고 볼록하게 튀어나온 주머니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 주머니에 손을 갖다 대려 하자
“거긴 손 안 대시는 게 좋을 텐데요?”
이를 루나브가 만류했다·
“별로 좋지 않은 물건이 들어있거든요·”
행동을 멈춘 벨카리온은 바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뭐가 들었는데?”
딱히 숨길 필요 없다고 생각한 루나브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펜던트요·”
“···!”
그녀가 옷을 벗는 동안 잠시 가라앉았던 벨카리온의 눈에서 다시금 분노를 비롯한 부정적인 기운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벨카리온은 루나브를 향해 거칠게 손을 뻗었다·
이에 살기를 느낀 루나브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물러서 후배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세트의 육중한 몸이 공중에서 벼락처럼 낙하했다·
-쾅!
벨카리온은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회피했다·
세트는 이에 멈추지 않고 착지한 순간 바로 모래로 뭉쳐진 주먹을 날렸다·
-퍽!
피하지 못한 벨카리온은 중심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화악!
허나 얼마 안 가 날개를 펴서 중심을 잡아냈다·
그러곤 다시 세트를 향해 날아들며 역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의 동선을 확인한 세트는 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
그의 주먹이 닿은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무지막지한 힘을 경험해 볼 순간이 언제 또 있을까?
반동을 견디지 못한 세트의 몸은 순식간에 순방단이 있는 곳까지 밀려나 버렸다·
“와! 힘 진짜 장난 아니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하다 못해 주저앉을 상황·
허나 세트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오른 희열을 얼굴에 가득 머금은 채 다시 벨카리온에게 달려들었다·
-쾅!
“마계에는 당신 같은 존재가 널려 있나 보지?”
벨카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살기 가득한 시선은 계속해서 루나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인간·”
“그럴 순 없지! 나 아까부터 많이 참았거든?”
대목처럼 몸을 지탱하던 세트의 발밑으로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벨카리온 역시 더 봐주지 않으려는 듯 몸에서 알 수 없는 검은 오라가 일렁였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혼란 속에서 몸을 추스른 루나브는 황급히 레미하람을 펼치고선 주문을 외쳤다·
“공간의 순리를 거슬러 불어닥친 위기를 벗어나리라!”
그러자 루나브의 발밑을 시작으로 순방단이 있는 곳까지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대공간전이(Spatial transition)!”
곧 마법진에서 솟아오른 푸른 빛이 그 위에 자리한 모두의 몸을 감싸 안았다·
“···!”
뭔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판단한 벨카리온이 급하게 나서려 했지만
-후우웅
이미 늦어버렸다·
곧 루나브와 세트를 포함한 순방단 전원은 벨카리온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털썩!
그렇게 전이된 어딘가·
순방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곳은 후방캠프?”
“대체 어느 틈에?”
대공간전이 마법을 통해 순방단 전원이 후방캠프로 이동된 것이다·
이 복잡하고도 심오한 마법을 구사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그 마족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요· 일단 경계문 밖으로 대피하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아린은 바로 지시를 내렸다·
“순방단 전원! 지금 즉시 경계문 밖으로 대피하겠습니다!”
순방단은 속히 이동했다·
“근데 그 마족은 뭐야? 왜 후배님을 공격한 거지?”
“추측되는 게 있긴 한데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해요!”
루나브는 일단 대피가 우선이라며 물음을 무마시켰다·
“경계문이 보입니다!”
곧 그들의 앞으로 경계문의 모습이 보였다·
아린을 우선으로 순방단은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경계문을 통과했다·
“근데 이렇게 도망친다고 끝날 일은 아니지 않아?”
“모두 물러나세요· 지금 바로 결계를 칠 테니까!”
순방단을 물리고 문 앞에 선 루나브는 제한 결계를 치기 위해 다시 마서를 펼쳐냈다·
하지만
“···!”
주문을 외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 어느 틈에?”
지나온 경계문 너머로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며 순방단을 마주하고 있는 익숙한 마족·
벨카리온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그 살기와 분노가 더욱 치솟은 느낌이었다·
허나 벨카리온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기만 할 뿐 좀처럼 넘어오려 들진 않았다·
“기 기분 탓인가? 넘어올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은데?”
뭔가 넘어서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경계문엔 어떤 마법이나 결계도 서려 있지 않은 만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넘어올 수 있었다·
-저벅저벅
그런 침묵의 시간 속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익숙한 냄새를 맡은 루나브의 눈이 번쩍 떠졌다·
“···!”
곧 경계문 너머 순방단과 벨카리온의 사이로 익숙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를 마주한 벨카리온의 눈에서도 격한 떨림이 일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러곤 웃는지 화내는지 모를 기묘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
“시안 베르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