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현혹 (1)
-쑤욱
레시무스는 나오라는 외침과 함께 손을 뻗어 아린을 막사에 강제로 빼냈다·
얼떨결에 나온 것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아린은 곧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말을 잇지 못했다·
“뭐 뭐야?”
마수를 향해 검을 휘둘러야 하는 전선의 기사들이 돌연 순방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급습에 순방단은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가 갑자기 기사들이 왜?”
-후웅!
놀란 마음에 눈이나 크게 뜨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린은 레시무스의 호위를 받아 급히 뒤로 대피했으며 그런 그녀의 앞으로 장검을 쥔 두 기사가 달려들었다·
“뒤로 물러서 아린 황녀!”
이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트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데저트 블레이드(Desert Blade)!”
주문과 동시에 그의 양손에서 모래로 빚은 듯한 갈색 칼날이 나타났다·
세트는 육중한 덩치에 걸맞지 않은 빠른 동작으로 칼날을 휘둘렀다·
-챙!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힘·
기사들은 주춤거리던 몸을 간신히 제어하고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신의 통고(God’s Strike)!”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이번엔 경계문 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마법 기사 한 명이 순방단이 있는 곳을 향해 주문을 외쳤다·
곧 그들의 머리 위로 흑구름이 드리워지며 천둥이 번쩍였다·
“신의 보호(God’s protection)·”
이에 순방단 쪽에 있던 루나브 또한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쳤다·
-파직!
통고와 함께 내리쳐진 벼락은 보호의 장막에 막혔고 그대로 공중에서 터져버렸다·
그 잔기가 사라지는 동안 양측은 잠시 대치에 돌입했다·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저 기사들 우리랑 같은 편 아니었어?”
선두에서 굳건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세트가 루나브를 보며 물었다·
“같은 편이라기보단 같은 쪽이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죠·”
“어쨌든 서로 공격하면 안 되는 사이인 거 아니야?”
“네 안 되죠· 그래서 저도 지금 이해가 안 돼요·”
세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는 거 많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후배님께서도 이해가 안 될 상황이다?
그 말은 즉 지금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라는 걸 넘어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임을 의미했다·
-스윽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마침내 베르트 공작이 막사에서 나왔다·
그는 순방단과 전선 기사들에게 어떠한 설명이나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순방단에게 무심한 등만 보인 채 다시 경계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멈추세요· 베르트 공작!”
아린이 급히 앞으로 나와 소리쳤지만
“내 말 안 들리나요 베르트 공작? 당장 멈춰서 지금 상황에 대해 해명하세요!”
공작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공작은 경계문을 지나 전선 지역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기사들은 순방단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그 앞을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내가 알기론 저런 행위를 두고 반역이라고 하던데?”
“그건 우리가 아닌 황녀님께서 판단하시겠죠·”
수행원들은 일단 말없이 아린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감히 황제의 권한을 대신한 황녀의 명을 거스른 것도 모자라 검까지 휘두른 죄·
이것은 엄연한 반역이고 반란이었다·
하지만 아린으로선
“대체 무슨 생각을?”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자신의 행위 자체가 옳고 그른지 분간조차 못 하겠다고?
어찌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막사에서 대화를 주고받은 남자가 정말 베르트 공작이 맞는 건지 이제는 의심마저 들었지만
“뒤 뒤에서 기사들이 몰려옵니다!”
상황은 더욱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몰려온다는 기사들이 설마하니 황군일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순방단의 아군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포위당했네요·”
루나브의 무심한 한마디와 함께 순방단의 몸에서 일제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까무러치게 놀라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지·
그냥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냐고?
어이가 없어서다·
친모란다·
마음으로 낳고 기른 양모도 아닌 진짜 친어머니란다·
믿어져? 저 얼굴이?
아니 뭐 그래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별할 수 없는 법이지·
일단 나만 봐도 그러니까·
근데 저건 좀 아니지 않아?
애 엄마는커녕 나와 비슷하다 못해 오히려 더 앳된 얼굴을 가진 여자가
그 악마 놈의 친모라고?
얼굴 목 가슴 하다못해 손까지·
성인 남성을 아들로 둔 여자가 그 흔한 주름 한 점 안 졌다는 게 말이 되나?
화장으로 감추는 것도 정도가 있다·
혹여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건 아닐까 싶어 마력의 기운까지 감지해 봤지만
없다·
즉 저건 저 여인의 진짜 얼굴이다·
“순방단과 함께 계실 줄 알았건만 설마 저택으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려 10년 만의 귀환이시죠? 집에 돌아오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당신이 물어볼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라도 되니 여쭤봐 드리는 겁니다· 이 저택 아니 벨리아스에서 당신의 방문을 크게 환영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순간 친모는 둘째치더라도 일단 그놈과 관계있는 여자란 걸 강하게 느꼈다·
하는 짓이 딱 그놈이랑 똑같거든·
사람 속 역겹게 만드는 거·
“그 사람의 친모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죽었다고 알려졌을 뿐이지요· 적어도 이 저택 내에선 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말에 모순이 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그럼 이 저택은 어떻게 장악한 거야?
저런 무장 병력까지 데리고·
[이것 봐라?]
흥미가 담긴 목소리와 함께 속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케이람이 실체화를 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나만 보이는 것이 아닌 모두에게 모습을 보이는 완전 실체화였다·
“저 저 여자는 또 뭐야?”
“····”
당황을 금치 못한 크란츠 모자와 다르게 여인은 크게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달가워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케이람은 그런 그녀를 두 눈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이게 웬일이야? 너희가 아직 이 세상에 남아있긴 했구나?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갑네?]
케이람은 마치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를 보는 것처럼 굉장히 다정다감한 반응을 보였다·
“너 저 여자 알아?”
[그럼 알지!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함께했던 추억이 지금도 머리에 잔뜩 남아있는데····]
케이람은 실로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를 받아들이려는 듯 그녀 역시 물러서지 않고 케이람을 마주했다·
[하기야 너희처럼 질긴 년들이 쉽게 없어진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동안엔 누구 등딱지에 붙어 있었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누구를 생각하시는진 몰라도 전 당신이 생각하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 그래? 그럼 내가 잘못 본 건가? 기운이 너무 닮은 나머지 오해를 한 모양이네· 미안해라~]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 있····”
[이게 어디서 꼬리를 숨겨?]
활짝 웃던 케이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러곤 그녀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뒷머리를 꽈악 움켜쥐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처럼 살기로 범벅되어 있었다·
[너 마녀잖아·]
“···!”
[눈에 보이는 건 죄다 홀리고 다니는····]
-두두두두
순간 복도를 타고 울리는 기사들의 묵직한 발소리가 방안에 전해졌다·
소란을 듣고 밖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지원을 온 것이다·
그들은 머지않아 방에 도착하였고 바로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바로 목을 그어버릴까 싶다가도 왠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어서 잠시 멈칫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구 빛의 기사단 소속으로 벨리아스를 오랫동안 지켜왔던 기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함께 달려온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
죄다 한 번쯤은 마주한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크윽!”
조금 전 가차 없이 죽인 기사들과 다르게 이들은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굉장히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내면의 고통과 사투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
그러다 힘겹게 입을 여는가 싶더니
“도와주십시오·”
난데없이 도와달라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퍽
주먹으로 그들의 얼굴을 한 대씩 강하게 후렸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일부 기사들은 아예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으며 그나마 버티던 기사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기침만 남발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먹 한 방에 나자빠질 기사들은 아닌데?
확실히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피잉!
잠시 기사들에게 시선이 팔린 사이 등 뒤에서 빛과 함께 마나의 기운이 발했다·
나는 공간 전이 마법이라는 것을 인지하곤 바로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불 꺼지듯 사그라드는 마나의 기운과 구석에서 벌벌 떠는 크란츠 모자뿐·
그야말로 빛과 같은 속도로 도망쳐 버렸다·
* * *
“나한테 물어봐야 나오는 거 없어· 기습으로 기절 당해서 3일 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걸 자랑이라고 잘도 떠드는군·”
“나라고 뭐 당하고 싶어서 당한 게 아닌···!”
홧김에 화를 분출하려는 것도 잠시
“어 어쩔 수 없었다구!”
크란츠는 나와 눈을 마주한 지 1초도 되지 않아서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니엘이라고 하는 그 여자가 사라지자마자 저택을 지키던 기사들은 일제히 두통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서 몇 분 정도 신음을 남발했다·
이후 정신을 차린 일부 기사들이 찾아와서 설명하길 그 여자는 3일 전 홀몸으로 갑자기 저택에 찾아와 자신이 에쉘의 친모라고 설명했고 이후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부턴 기억이 없어졌다고 했다·
즉 그녀 하나로 인해 자그마치 중대급의 병력이 놀아난 것이다·
농락도 이런 농락이 없군·
“넌 왜 돌아온 것이냐?”
침대에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던 공작부인이 내게 눈을 세우며 물었다·
“그 가증스러운 눈은 여전하구나! 감히 인간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곳에 발을 디뎌 가문과 제국을 능멸한 주제에 뻔뻔스럽게 다시 벨리아스에 얼굴을 들이밀어? 네놈은 수치심도 없느냐?”
나도 성격 많이 죽긴 했군·
저런 소리를 듣고도 화는커녕 측은함만 생길 지경이니·
오히려 내가 아닌 크란츠가 그녀를 직접 만류하기에 이르렀다·
저 모자란 모자한테 붙어 있어 봐야 얻을 것도 없겠지·
나는 곧바로 방을 나왔다·
“야 시안· 잠깐만!”
그러자 크란츠 놈이 바로 따라붙었다·
“내가 지금 딱 생각난 게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기사들한테 말하는 것보단 너한테 말하는 게 나은 것 같다·”
“영양가 없는 소리 할 거면 가서 네 어머니 입이나 막아·”
활짝 열린 방문 너머에선 나를 향한 공작부인의 욕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겠지! 사실 내가 기습당해서 창고로 옮겨지는 동안에 어렴풋이 하나 들은 게 있어· 아무래도 이 저택에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감금당한 것 같더라·”
“또 한 사람?”
“어· 그 여자가 묻기를 이 저택에 창고 외에 아무도 쓰지 않는 빈방 같은 게 있냐고 묻더라고· 거기에 기사들이 10년 동안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방이 하나 있다고 말했지·”
“어딘데?”
“네 방·”
나는 아주 잠시동안 크란츠의 눈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아 왜? 내가 아닌 기사들이 말한 거라니까! 10년 동안 아무도 쓰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아무튼 거기에도 누굴 하나 가뒀을지도 모른다고!”
그래 창고도 아닌 방에 가둬놨다면 그래도 네놈보단 훨씬 가치 있는 걸 가뒀다는 뜻이 되겠지·
나는 그 길로 크란츠를 지나쳐 바로 내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 내 방문 앞에 이른 순간
“하!”
나도 모르게 외마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집 나간 망나니 자식이라지만 그래도 청소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주 문에서부터 먼지가 칙칙 쌓여 있는 것이 이건 뭐 창고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조금은 씁쓸해진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으니
“····”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에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문을 열었다·
-벌컥
딱히 뭔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다·
크란츠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로 구속되어있는 누군가가 눈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으니·
헝겊과 밧줄이 아닌 철 가면과 쇠사슬로 온몸이 칭칭 감겨 있었다·
“후욱욱····”
그 역시 내가 온 것을 인지한 듯 떨구고 있던 목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입 쪽에 작게 뚫려 있는 구멍으로 간신히 숨만 뱉어내는 상태·
나는 바로 그의 구속을 풀어주고 가면을 벗겨 주었다·
호·
설마하니 이 남자를 내 방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못해도 지금 저택이 아닌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 남자 아니었나?
“시 시안 도련님이십니까?”
구 빛의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이자 아버지의 오른팔로 자리하며 어릴 적 내 호위를 담당했던 기사·
율켄 다리우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